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22

후삼국시대(889~936) 15 마지막 편 ㅡ후삼국 통일의 길과 왕건의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22

후삼국시대(889~936) 15 마지막 편 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7 - 후삼국 통일의 길과 왕건의 통일전략)


한반도가 다시 통일 길로 접어든 것은 930년, 고창(현 안동)의 들판에서 울려 퍼진 전쟁 함성 이후였다.


고려 태조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맞붙은 '고창전투'는 단순한 전투 넘어 후삼국통일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왕건은 후백제 전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 견훤 지도력에도 균열을 만들었다.


참고로 927년 '공산전투'(현 대구 팔공산 부근)에서 고려가 패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단 3년 만에 판세가 완전히 역전된 셈이다.


고창전투 이후 왕건은 섣부른 정복 대신 내실을 다졌다.

정치적 안정과 병력강화에 집중하며 후백제 허점을 기다렸다.


1. 신라 귀순과 마의태자


935년,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고려에 귀순했다. 그러나 경순왕 아들, 신라 황태자였던 인물은 고려 입조를 거부하고 붉은 삼베옷을 입고 산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 (麻衣太子)라 불렀다.


마의태자는 아버지 실용적 선택과 달리 신라 자존심을 지키려 했고, 지리산, 금강산, 속리산 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서는 그가 도를 닦아 신선 이 되었다거나, 미륵불처럼 다시 돌아올 구세주로 믿어졌다고도 한다. 이처럼 마의태자는 역사적 인물일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민중 희망과 저항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2. 후백제 내부균열과 '일리천 전투'


같은 해, 후백제에서는 견훤 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


신검은 오래전부터 형제간 경쟁과 아버지 견훤과 갈등으로 불만이 컸고, 935년 군사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었으나, 나중에 몰래 탈출해 고려로 망명, 왕건과 손을 잡게 된다.


이후 936년, 일리천 전투(현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서 고려와 후백제 최후전투가 벌어진다. 왕건은 북부에서, 견훤은 후백제 지역을 잘 아는 남부에서 협공하며 신검군을 압박했다. 결국 신검은 항복했고, 후백제는 멸망하며 후삼국 분열은 고려통일로 마무리 되었다.


3. 왕건의 통합정치


왕건은 단순히 군사적 승리만으로 통일을 이룬 것이 아니다. 내부분열과 외교적 기회를 활용하며 정치적 유연성과 통합능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왕건은 고려 태조로서 정통성과 권위를 확립했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며 새로운 왕조 기틀을 마련했다.


왕건 통합정치는 단순한 권력 결합이 아니라 신뢰와 미래에 대한 약속이었다.


신라와 후백제, 지방호족들까지 아우르며 공동체를 만들고, 등을 돌린 이들도 끌어 안았다.


왕건 전략은 배제와 보복이 아니라 포용과 연합이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4. 오늘의 교훈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세대적 갈등 속에서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있다.


왕건 통합정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라를 세우는 자는 칼이 아니라 마음으로 백성을 얻어야 한다."


통합은 타협이 아니라 용기이며, 누가 먼저 손을 내미는가가 첫걸음이다.


잘못된 행위까지 무조건 용서하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서로 적으로 보는 대신 공동미래 향한 협력과 신뢰를 선택해야 한다.


천 년 전 왕건이 그러했듯, 우리도 다시 함께 나아갈 길을 모색하며, 후삼국시대 고대사를 마친다.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어서 중세사가 시작되는 <고려사도 흐른다>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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