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21

후삼국시대 공방전 6 - 후삼국 시대 명장들, 왜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를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21

ㅡ 후삼국시대 (889~936) 15 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6 - 후삼국 시대 명장들, 왜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를까)


오늘은 <후삼국시대, 통일로 가는 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이 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그 시대를 빛낸 인물들에 대해 먼저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계사에서 ‘명장’이 가장 밀집해 등장한 시기를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중국 삼국시대를 떠올린다. 220년부터 280년까지 약 60년간 이어진 그 시대에는 조조, 유비, 손권, 제갈공명, 관우, 장비, 조자룡, 주유, 사마의 등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삼국시대 인물들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데에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뿐 아니라, 원말명초 나관중이 집필한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이 크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서사는 인물들을 단순한 정치· 군사 지도자가 아닌 영웅적 존재로 재탄생시켰다. 그 문화적 영향력은 정사를 넘어섰다.


흥미로운 점은 삼국시대가 중국사 전체에서 절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라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뛰어난 서사가 더해지면서 그 시대는 특별한 영웅들 무대로 재구성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는 이러한 격동기가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바로 후삼국시대였다.


1. 후삼국시대, 또 하나의 격동기


우리에게도 약 50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과 권력투쟁의 시대가 있었다. 889년 궁예와 견훤의 활동을 기점으로 936년 후백제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후삼국시대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 삼국지 인물들 이름은 쉽게 떠올리면서 후삼국시대 인물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낯설다. 이는 단순히 규모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진수 삼국지처럼 특정시대를 중심으로 밀도 있게 서술한 단일 사서의 형태는 아니었다. 더구나 이를 토대로 한 나관중 삼국지연의처럼 걸출한 장편 역사소설이 형성되지 못하면서, 후삼국 인물들은 대중적 영웅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후삼국 인물들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계기는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이었다.

이 작품은 정사와 전승, 야사를 결합하여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조명했고, 그 결과 궁예, 견훤, 왕건뿐 아니라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 최승우, 최응 등의 이름도 다시 조명되었다.


그러나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역사칼럼에서는 정사 기록을 중심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 글은 정사와 야사를 적절히 조합해서 당시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겠다.


2. 창업 군주 세 사람


세 사람은 앞 편들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오늘은 간략히 특징만 정리한다. 후삼국을 연 세 인물은 모두 군사적 기반 위에서 성장 했다.


1) 궁예


신라 왕족출신이라는 설이 전하나 확정적이지는 않다. 신라 말 반란 세력에 가담해 세력을 키웠고,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초기에는 강한 카리스마와 정치적 감각으로 지지를 얻었으나, 말년에는 미륵불 자처와 과도한 숙청으로 신뢰를 잃었다. 결국 왕건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2) 견훤


상주지역 호족 아자개의 아들로 전해진다. 신라군관으로 출발해 옛 백제지역에서 세력을 확장, 후백제를 건국했다. 공산전투 등에서 고려를 압박하며 한때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후계 분쟁 끝에 아들 신검에게 축출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는다.


3) 왕건


개경 해상세력 출신으로 궁예 휘하에서 성장했다. 온화하고 포용적인 성품으로 신망을 얻었고, 궁예 축출 이후 고려를 건국했다. 군사력뿐 아니라 혼인 정책과 포섭정책을 통해 호족연합을 구축한 점이 가장 큰 강점이었다.


카리스마형 지도자 궁예,

군사 전략가 견훤,

포용형 군주 왕건.


세 인물의 대비는 후삼국 긴장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이 세 사람 이외에도 '관우' '장비' '조자룡' 같은 뛰어난 장수도 꽤 있었다. 간략히 살펴본다.


3. 고려의 명장들


1) 유금필


후삼국시대 격변의 중심에서 고려의 정착과 군사력 기반을 닦은 핵심인물이다.

그가 없었다면 왕건의 고려건국은 훨씬 험난했을 것이며 후백제와 주도권 싸움에서도 불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기록상으로 보면 유금필은 한국사 통틀어서도 무력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무공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유금필 별명이 '상승장군'인 것처럼 후백제군과 싸우면 무조건 이겼다. 이러한 이야기는 정사기록에도 나온다.

야사기록에는 유금필은 '일당만명'의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비, 조자룡'을 합쳐 놓은 인물같이 나온다. 후백제군은 "유금필이 떴다"라는 말만 듣고도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 후백제군은 패배하기 일쑤였다. 왕건은 유금필을 끝까지 신뢰했고, 유금필도 끝까지 왕건을 배신하지 않았다. 고려개국 무신들 중에서도 전장의 중량감과 정치적 무게를 동시에 가진 보기 드문 인물 이다. 다만 ‘일당만 명’과 같은 표현은 후대 과장에 가깝다.


2) 신숭겸


고려가 후백제에 대패한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왕건 옷을 입고 적진으로 돌진하다 전사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충절은 고려 무신의 상징처럼 전해진다.

신숭겸 후손들도 고려 내내 좋은 직을 이어받는다.


3) 최응


고려에서 백제 '최승우' 같은 역할을 했다. 야사에서는 최응이 미인계를 써서 후백제 '능환'을 조정하여 최승우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온다. 최승우와 최응은 중국삼국지 '제갈공명'과 '사마의' 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 역사기록에 최응은 태조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 수행했다. 고려 초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는 데 기여하고 유교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국가운영체계 확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안타깝게 최응은 왕건이 삼한통일을 이루기 직전이었던

932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왕건이 엄청나게 애석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박술희


성격이 용감하였으며 육식을 좋아하여 두꺼비, 개구리, 거미 등도 먹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괘이한 장수다. '태조왕건' 드라마에서도 중국 삼국지 '장비'처럼 수염을 기르고 우락부락 하게 나온다. 박술희는 왕건 삼한통일에 큰 기여를 했고, 삼한통일 후에도 고려에서 실권을 쥐고 왕건사후 후계구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5) 배현경


전투능력 보다도 정보수집과 내정에 강한 장수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 초 중앙권력과 지방관리 간 균형을 잡는 데 큰 기여를 한다.


6) 홍유


궁예시절부터 활동한 무신이자 학자형 장수였다. 유금필과 함께 왕건을 왕위에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운다. 후삼국 통합 이후엔 외교, 예법정비에도 관여한다.


4. 후백제 인물들


1) 최승


공식역사서로만 보면 장수라고 할 수는 없었고,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유학자, 정치가로, 후백제 고위관료로 활동했다. 그는 최치원, 최언위와 함께 '신라 삼최(三崔)'로 불리며 뛰어난 문장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야사'에는 최승우가 제갈공명을 뛰어넘는 지략과 전술로 후삼국시대 커다란 전투에 모두 관여한 것으로 나온다. '공산전투'를 비롯 견훤 모든 승리 전략은 최승우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견훤은 이런 최승우를 보물처럼 아꼈으며 그가 말하는 것은 거의 그대로 행했다.

그러나 최승우는 후백제 후계 싸움에서 견훤은 넷째 '금강'을 후계로 삼아야겠다는 생각과 달리 그래도 장자후계 원칙에 따라 '신검'을 밀었다. 그러나 '고창전투'에서 신검의 못난 행태로 백제가 대패하고, 그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수군을 이용한 개경기습 작전에서 또 신검에게 역할을 주었지만 신검의 독선적인 행동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이에 신검이 휴게자가 되던 금강이 되던 백제에 의한 삼한통일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최승우는 홀연히 사라진다. 이에 크게 충격받은 견훤은 만사 귀찮아져 국정을 멀리하고 큰아들 신검에게 맡겼다가 신검 쿠데타로 쫓겨나고 고려왕건에 귀의한다. 이때 최승우가 다시 나타나 견훤을 도와 신검과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 왕건에 의한 삼한통일을 이루게 하고 또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신비스러운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정사' 속 최승우는 후백제 건국자 견훤을 섬기며 지금의 장관급인 '파진찬' 직위에 올랐고 후백제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관료제 정비와 연호제정등 국가체제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능창, 효공, 애술, 능환,


사실 후백제에 대한 기록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상대적으로 적고, 고려사 또한 고려 중심으로만 다뤄졌기 때문에 세부적인 후백제 장군들에 대한 정보는 고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후백제 장군으로는 '능창' '효공' 등이 고려사 등에서 잠깐 언급될 뿐이다. 견훤과 함께 활동했던 핵심무장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야사'에는 '애술'과 '능환'등도 많이 언급되고 있다.


'애술'은 고려 유금필 못지않은 맹장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삼국사기 고려사 정사에는 이름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능환'은 견훤이 나라 세울 때부터 견훤 동료로서 지금 총리급 백제 '이찬'이라는 최고위 원로로 있었지만 후계싸움에서 신검 편을 들어 견훤을 쫓아내는데 큰 역할 을 한다. 하지만 후삼국시대 마지막 전투 '일리천전투'에서 신검이 패배하고 백제가 멸망하자 왕건에 의해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 신검


후백제 문제는 견훤 큰 아들 '신검'이었다. 어느 나라나 그 나라가 멸망할 때 후계승계 문제가 크게 작용한다.


중국역사 속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고 후백제 바로 앞 고구려 멸망도 그러했다.


'신검'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데 그 과정이 고구려 멸망과 거의 똑같았다.


신검은 후계자리를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을 지명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 '견훤'을 절에 유폐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절을 탈출한 견훤이 왕건에 귀의하고 고려군을 이끌고 백제로 쳐들어 온다.


고구려 연개소문 맏아들 '연남생'이 후계갈등 문제로 동생들에게 쫓겨 당나라로 도망가 당나라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 하고 너무 닮아있다.


연남생이 견훤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이리하여 삼한통일은 고려 왕건에 의해 이루어졌다.


5. 후삼국시대 통일의 의미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키며 삼한 통일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개인영웅 승리라기보다, 호족 연합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통합 결과였다.


왕건은 혼인정책을 통해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이를 통해 지방 세력과 결속을 다졌다. 이러한 방식은 안정적 통합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후계 문제라는 새로운 과제를 남겼다.


6. 왜 우리는 후삼국을 덜 기억하는가?


후삼국시대는 중국 삼국시대에 비해 결코 역동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군사적 충돌, 권모술수, 충절과 배신, 후계 분쟁과 통일의 과정까지 서사적 요소는 충분하다.


다만 우리는 이 시대를 집약적으로 서사화하지 못했다. 정사는 비교적 건조하고, 야사는 과장되기 쉽다. 대중이 접하는 역사인식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형성된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해석의 서사이기도 하다.

후삼국시대 인물들 역시 더 많은 연구와 균형 잡힌 대중적 재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 이야기 결론은 후삼국시대 이야기가 중국 '삼국지연의'나 '초한지' 못지않게 흥미롭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궁예'가 죽고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뒤에 '고려'와 '후백제' 싸움은 중국 '삼국지' 보다는 '초한지'에 더 가까운 내용이 많다.


'견훤'은 역발산기개세 '항우' 모습이고 '왕건'은 포용력 있는 '유방'의 모습이 보인다.


공산전투 이후 욱일승천하며 왕건을 압도하는 모습도 항우가 초기 유방을 압도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견훤이 신라경애왕을 자살시키고 왕비를 겁탈하여 그 포악한 이미지로 인하여 끝내 삼한통일을 못 이룬 것도, 초한지 속 항우가 자기 숙부까지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고 20만이 넘는 양민을 생매장해 죽였다는 그 포악한 이미지로 인해 결국 유방에게 패했다는 것도 비슷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정사에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백제 제갈공명 같은 '최승우'나 고려의 '최응'의 머리싸움과 미인계나 세작을 이용한 권모술수 등 또한 삼국지나 초한지 내용에 비해 전혀 뒤 떨어지지 않게 흥미로웠고 재미도 있다.


나는 '태조왕건' 드라마를 전체를 보지는 않았고 일부 내용을 조금 봤지만 이런 야사 같은 내용도 이 드라마에 상당히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야사 빼고 정사로만 드라마를 만들면 너무 재미가 없어 보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 삼국지를 정사에 충실하겠다며 '진수' 삼국지만을 바탕으로 소설이나 드라마를 만들면 누가 보겠는가?^^


그래서 태조왕건이란 드라마도 역사적 고증면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야사를 적절하게 섞어 우리에게 재미와 흥미를 주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후삼국시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그동안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궁예, 견훤,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 최승우, 최응, 신검>등 인물들을 우리에게 새롭게 부각해 놓았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고

그러한 것을 역사적 사실처럼 내 글에 쓸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삼국사기나 고려사등 정사를 토대로 후삼국시대 명장들 몇몇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보았다.


다음은 마지막 편으로 <왕건 후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시키다 편> 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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