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공방전 5 -‘고창전투’, 고려건국 이후 왕건의 첫 대승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20
ㅡ 후삼국시대 (889~936) 14 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5 -‘고창전투’, 고려건국 이후 왕건의 첫 대승)
우리가 흔히 ‘고려건국’과 관련해 혼동하는 지점이 하나 있다.
고려 건국은 '918년', 왕건이 궁예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며 국호를 ‘고려’로 선포한 해다. 그러나 고려가 후삼국 통일한 '936년' 을 실질적인 고려건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918년과 936년 중 어느 해를 고려건국으로 보아야 하는가는 단순한 연도 논쟁이 아니다.
이 문제는 국가정체성, 민족단위, 통일의 의미와 직결된다.
정치적 행위, 즉 왕조수립과 국호 선포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918년 이 타당하다. 반면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통일국가로서 완성을 기준으로 본다면 936년을 건국시점 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는 ‘정치적 시발점’과 ‘지리적·민족적 완성’ 중 어디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 문제다.
이 때문에 역사교과서와 대부분 공식기록 에서는 918년을 고려건국 연도로 삼되, 936년을 후삼국통일 해로 별도로 강조해 서술한다. 다만 통일을 국가성립 핵심요소로 보는 일부 역사인식에서는 936년을 고려 실질적 출발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918년 고려가 정치체제는 갖추었지만,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미완국가’로 인식된다. 완전한 국가성립은 민족적· 지리적 통합이 이뤄졌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이 논점은 오늘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둘러싼 ‘건국시점 논쟁’과도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다. 즉, 체제성립과 민족 전체 대표성 사이 긴장관계라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 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이는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정통성을 지닌다는 헌법적 선언인 동시에, 통일 당위성을 내포한 조항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936년을 고려 실질적 건국으로 강조하는 해석은, 통일을 국가정체성 완성으로 보는 역사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통일은 단순한 영토확장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한반도 단일국가 체제 복원이라는 이상과도 연결된다. 일부에서는 고려 후삼국통일 과정을 오늘날 분단 극복 역사적 사례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 역시 이번 글을 정리하면서, 고려건국 연도를 둘러싼 논쟁이 이처럼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그럼 오늘은 고려가 후삼국통일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고창전투'(高敞戰鬪,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고창동 일대, 전라북도 고창이 아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1. 고창전투 – 고려의 첫 반전
왕건이 918년 고려건국 이후, 930년 '고창전투'에 이르기까지 약 12년 동안 고려는 후백제 견훤에게 단 한 차례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927년 '공산전투'에서 패배 이후, 당시 정세만 놓고 보면 후삼국통일 주도권은 오히려 후백제가 쥐고 있었다.
견훤이 당시 그 기세를 몰아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면, 통일 주체가 고려가 아닌 후백제가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930년, 왕건은 신라와 연합을 모색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견훤은 약 2만 명 규모 군사를 이끌고 북상해 고려를 공격한다.
후백제군 기세가 워낙 거셌기에, 왕건은 고창지역을 포기하는 방안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이때 희대의 명장으로 평가받는 '유금필'이 강력히 반대한다.
유금필 요지는 분명했다.
고창을 포기할 경우 상주 일대가 완전히 상실되고, 후백제에게 북진 교두보를 제공하게 되며, 이는 곧 고려 내 호족들 대규모 이탈로 이어져 국가존망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금필은 고려에게 고창은 결코 내줄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라며 고창 사수를 강력주장 했던 것이다.
당시 고창에는 고려군 약 3천 명 주둔하고 있었고, 이를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그에 협력한 신라지역 호족병력이 포위하고 있었다. 왕건은 유금필 말대로 직접 군을 이끌고 고창으로 진군, 이들과 대치한다.
전투는 3~4일간 치열하게 이어졌다. 초반에는 후백제가 우세했지만, 전황은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견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고창일대 신라계 호족들이 고려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927년 서라벌 함락 당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왕실을 능욕했으며, 대규모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이 사건은 신라인들에게 깊은 원한으로 남아 있었고, 고창전투에서 그 감정이 폭발한다.
전투 중반 이후, 신라계 지원군 일부가 후백제를 이탈해 고려군에 합류하며 후방을 공격했다. 그 틈을 타 유금필은 '저수봉' 일대에서 정예기병을 이끌고 결정적인 반격을 가한다.
결과는 후백제 대패였다.
후백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고 '견훤'은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퇴각한다.
2. 고창전투의 의미
고창전투는 고려건국 이후, 후백제를 상대로 거둔 첫 결정적 대승이었다.
고창전투 승리를 통해 고려는
군사적 자신감을 되찾고,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며,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후대 고려왕조가 고창전투 승리를 기념해 고창일대를 ‘안동'(安東), 즉 동방을 안정시켰다는 의미의 지명으로 개칭한 것도 이 전투가 지닌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이후 후백제는 한동안 북진을 멈추고 방어에 치중하게 되었고, 고려는 군사적 사기를 크게 끌어올리며 신라와 연합기반을 더욱 공고히 해 본격적인 세력확장에 나선다.
고창전투 대승은 고려왕건이 주도한 통일전쟁 본격적인 서막이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왕건, 통일전쟁과 후삼국통일> 편으로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