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공방전 4 - 공산전투: 왕건, 지고도 이긴 싸움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9
ㅡ 후삼국시대 (889~936) 13 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4 - 공산전투: 왕건, 지고도 이긴 싸움)
'공산전투'(公山戰鬪, 현재 대구 동구 팔공산 일대)는 후삼국시대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세력 구도가 결정되는 분수령이었다.
후삼국시대, 신라와 적대적 관계였던 궁예와 달리 왕건은 고려를 창건하며 신라와 화친정책 폈다.
반대로 후백제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며 고려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왕건과 견훤 첫 대결 ‘조물성전투’였는데 그 전투에서 후백제가 우위를 점했지만, 고려는 성을 지켜 승패가 명확히 갈리지는 않았다.
그 균형은 공산전투로 깨졌다.
그럼 공산전투에 대해 상세히 정리해 본다.
1. 공산전투 개요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왕건은 정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에서 견훤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다.
견훤 군사에게 왕건이 포위당하자 장수 '신숭겸'과 '김락'이 몸 던져 싸우다 전사했고, 왕건은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특히 신숭겸은 왕건의 옷으로 갈아입고 대신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로, 왕건은 신숭겸의 충성을 치하하며 그의 성씨까지 왕 씨로 하사하고 후손들을 극진히 대우했다.
공산전투에서 승리한 견훤은 경주로 진격하여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고, 이후 '경순왕'을 옹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왕비를 겁탈했다는 내용은 사료 간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견훤의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어쨌든 이후 신라는 사실상 후백제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로써 후백제는 신라 9주 중 6주를 점유하며 최대 판도에 이르렀다. 반대로 고려는 한주, 삭주, 명주 3주만 남아 변두리에서 힘겹게 유지되었다.
2. 공산전투의 의의
군사적으로 공산전투는 고려에게 최악의 패배였다. 신숭겸 등 주요 고려장수 상당수와 말단병사들 까지 전사하고, 왕건마저 겨우 살아남았다.
왕건의 지원군은 그 이후에도 한동안은 후백제군에게 패배하기 일쑤였다. 경애왕 당시까지 신라왕실에 충성하던 서라벌 근처 호족들은 제아무리 신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어도 당장은 살아남기 위해 견훤에게 협조할 수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 견훤은 드디어 아버지 아자개 세력인 상주와 고향인 문경에 있던 세력들을 군사력으로 찍어 눌러 후백제 휘하에 강제로 데려온다. 그동안에는 아버지의 세력권이고 어려서부터 봐온 고향 사람들이라 사정을 봐주었지만 더는 봐줄 수 없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왕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과적으로는 왕건이 지고도 이긴 싸움이 된 것이다.
견훤이 경주에서 왕을 죽이고 왕비까지 겁탈하며 신라왕실을 짓밟았다는 소문은 신라귀족과 호족들에게 큰 반감을 불러왔다.
신라 일반 백성들 마저도 견훤의
잔악한 만행에 등을 돌렸다.
공산전투 이후 '명주'를 지배하고 있던 호족 '김순식'이 위무를 목적으로 직접 개경으로 왕건을 찾아간다.
김순식은 명주 군왕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호족이었고, 궁예가 독립세력을 꾸리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처럼 김순식은 원래 궁예사람이었다.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의 관계가 그동안은 아주 불편했음에도 공산전투 패배를 위무하고자 김순식이 직접 왕건을 찾아온 것이다. 사실상 김순식의 왕건 지지선언 이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 된다.
신라에 충성도 하고 반감도 가지고 있었던 통일신라 시절 북부 3주 김순신을 비롯한 지역 호족들은 견훤의 지나친 경주만행 소문을 듣고 견훤보다는 왕건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견훤의 경주만행이 주요 호족들이 후백제를 버리고 고려에 동조하는 큰 계기가 된 것이다.
견훤이 즉위시킨 경순왕도 즉위 초기에는 백제 눈치를 보았지만 결국은 고려로 갈아탄다.
이와 같이 공산전투는 견훤의 대승리였으나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는 고려가 후삼국통일로 가는 결정적 밑거름이 된 것이다.
반면, 견훤은 공산전투에서 군사적 천재성을 보여주고 후백제 전성기를 맞았지만, 신라왕실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과장된 소문으로 인해 정치적 지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후삼국 통일은 왕건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3. 역사적 논란
공산전투 승리로 욱일승천하던 견훤 위세로 삼국통일로 이끌지 못한 것은 견훤이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능력이 왕건에 비해 많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경애왕 강요로 자결시킨 거와 그 왕비 겁탈이 견훤 왕 자질에 대한 치명타가 되었다.
그러나 견훤은 이후 왕건에게 보내는 편지에 경애왕 살해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서 보니 경애왕은 이미 죽어있었다고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삼국사기나 고려사등 정사에 견훤이 죽인 것으로 나와있다.
[결국 경애왕은 견훤의 강요로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며 이후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겁탈했고 장군들은 첩들을 겁탈했으며 경애왕의 동생 박효렴(朴孝廉) 등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ㅡ 삼군사기, 고려사 ㅡ
확실한 것은 그 당시에도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에 견훤도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여기서 견훤의 경애왕 자살 압박 유도와 왕비 겁탈설에 조금 다른 의견이 있어 덧 붙인다.
경애왕 자살과 왕비겁탈 이야기는 정사 '삼국사기'에 나온다. 고려사에도 나오지만 고려사는 삼국사기를 참고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때 유학자 김부식이 신라중심으로 기록했다는 말들이 많다. 그래서 이 기록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다.
견훤 경주만행도 당시 가담항설을 김부식이 진실처럼 정사에 기록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드는 것 중 하나는 견훤이 포석정으로 침입한 것은 12월인데 추운 겨울날 야외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놀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고, 아무리 무능한 왕일지라도 그 많은 병사들이 쳐들어 오는데 그걸 전혀 모르고 놀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왜 경애왕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까?
경애왕은 신라말기 보기 드문 박 씨 출신 왕이었다.
신라는 사위가 왕위를 물려받는 일이 많았는데, 대개 근친혼이 많아서 넓은 의미로 박혁거세 시조를 중심으로 김 씨, 박 씨. 석 씨 성씨와 관계없이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모두 같은 혈족이었다. 그래서 성씨가 김 씨인 김부식이 박 씨 출신 왕인 경애왕을 조금 홀대해서 기록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경애왕 재위기간은 3년에 불과했지만 '고려'나 '당나라' 등에 신라를 지키기 위하여 이런저런 외교적 시도들을 볼 때 분명 무능하진 않은 용기 있고 나름 유능한 군주였다. 이런 그가 견훤부대가 경주 포석정까지 들이닥치는데도 그걸 모르고 그 추운 겨울에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 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견훤이 당시 60세를 눈앞에 둔 나이였는데 얼마나 성적 욕망이 있었다고 왕비를 겁탈을 할 수 있었겠냐는 설도 있다.
한 나라를 창업한 견훤정도 되는 사람이 왕비겁탈이 후에 얼마나 욕된 역사가 되는지 몰랐거나는 것이다.
견훤도 왕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러한 것들에 대해 극구부인하는 내용이 삼국사기 기록에도 나온다.
견훤의 경주만행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우리는 우선은 정사 삼국사기 기록을 깨뜨리는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정사 기록을 기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4. 결론
공산전투는 고려 왕건 개인과 고려에게는 군사적 참패였지만, 정치적·전략적으로는 장기적으로 승리한 싸움이 되었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살아남아 후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견훤은 군사적 승리를 충분히 정치적 성과로 연결하지 못한 채 전력과 기세를 소진했다.
이처럼 공산전투는 전술적 성과만 놓고 보면 패배에 가까운 전투였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지고도 이긴 싸움’이라는 아이러니한 평가를 받는다.
이 전투는 혼란스러운 전쟁 초기, 군사적 우위보다 민심 향배가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던 시기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투 결과는 그 순간에 갈렸을지 모르지만, 이 전투가 남긴 의미는 훨씬 오래 이어졌다. 공산전투는 전쟁이 단순한 힘의 충돌이 아니라 민심과 신뢰 문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무리 전시라는 극한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인간 도리를 저버린 잔혹한 행위로는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결국 이 전투는 힘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 승부가 어디에서 결정되는지를 조용히 되묻고 있다.
이어서 '후삼국시대 공방전 5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