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공방전 3 - 견훤 왕건의 공방전 1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6
ㅡ 후삼국시대 (889~936) 12 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3 - 견훤 왕건의 공방전 1)
918년,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다시 건국한다.
'태봉'과는 대립각을 세워왔던 후백제는 왕건에 의해 고려가 세워진 직후 의외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태봉시절에는 서로 인질 교환하며 볼모로 삼는 등 큰 전쟁 없이 조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건국 직후,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전략적으로 후백제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던 상주 세력가 '아자개'가 고려에 항복하고 귀순한 것이다.
아자개는 다름 아닌 후백제 왕 '견훤'의 부친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이었기에 일부 학자들은 아자개가 동명이인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자개가 귀순할 당시 왕건이 직접 마중 나가 극진히 예우했다는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견훤 부친 아자개가 맞는 것으로 보는 견해 가 일반적이다.
아자개가 이미 왕이 된 아들 견훤이 아닌, 신생 국가 고려에 귀순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정치적 생존과 현실적 판단에 따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록에 따르면 아자개는 상주 지역에서 상당한 재력과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따르는 무리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점은 견훤이 왕건처럼 완전한 금수저 출신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은수저에 해당하는 배경을 지녔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아자개 역시 아들 견훤 도와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이후 부자 관계는 점차 소원 해졌다.
견훤은 왕권강화를 위해 기존 호족세력을 견제했고, 그 과정에서 부친 아자개 역시 견제 대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부자 간 갈등은 심화되면서 아자개는 후백제와는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이 시기, 왕건은 고려를 막 건국한 직후 신라와 후백제 지역 호족들을 포섭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아자개 역시 이러한 흐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고려에 귀순하게 된다.
참으로 이례적인 가족사 한 장면이다.
이후 견훤의 가족사 전개는 더욱 기묘하다. 훗날 견훤 역시 친아들 '신검'에게 축출당한 뒤 고려로 귀순해 오히려 앞장서서 친아들과 싸우며 후백제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자기 아버지에게 당한 것을 자기 아들에게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왕건은 견훤 아버지 아자개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 견훤마저 공손히 맞이해 극진히 대우했다. 부자 두 사람이 모두 아들을 등지고 왕건에게 의탁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왕건 인품과 정치적 포용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자개 귀순 문제로 인해 견훤이 곧바로 고려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918년 고려건국 이후 수년간, 왕건은 궁예 잔존세력 반란과 호족 이탈을 수습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견훤은 왕건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견훤 관심은 오로지 신라에 있었다. 그는 920년, 왕건에게 지리산 대나무 화살과 공작부채를 선물할 정도로 외교적 우호를 표시했다.
이러한 견훤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고려를 살리고, 왕건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가 된다.
만약 이 시기, 국력이 안정돼 있던 후백제가 고려를 공격했다면 왕건은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삼국통일은 후백제 견훤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견훤은 후백제 건국 직후 901년부터 무려 19년 동안 신라 최후 관문이었던 '대야성'을 공격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920년에 대야성을 함락한다. 이는 백제 의자왕 이후 약 250년 만에 다시 백제세력이 대야성을 차지한 것이었다.
대야성은 의자왕 당시에도, 견훤 당시도 신라 최후 방어선이었다.
250년 전, 의자왕에게 대야성을 빼앗겼던 신라는 이 위기의식 계기로 당과 연합해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견훤에게 대야성을 빼앗긴 당시 신라는 그러한 외교력이나 군사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했다.
신라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고려 왕건뿐이었다.
견훤은 대야성 함락에 만족하지 않았다. 신라 수도 서라벌 인근의 '진례'까지 진군했다. 위기를 느낀 신라 '경명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왕건은 견훤의 추가진격을 막기 위해 군사를 파견한다.
이 시기 양측 간 직접충돌은 없었다. 고려 왕건은 병력을 이동시켜 후백제 견훤 북진을 차단했다. 신라와는 연대해 창원·김해 일대로 후백제 동진을 저지했다.
이러한 왕건의 군사행동 이후, 경북지역 여러 호족들은 점차 왕건에게 호의를 보이며 귀부 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고려와 후백제 관계는 본격적으로 악화국면에 접어들며 양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 첫 충돌이 바로 '조물성전투'였다.
조물성전투는 920년 대야성 함락 이후 냉각되던 고려와 후백제가, 924년에 처음으로 직접 맞붙은 전투였다(1차).
이듬해 925년에는 왕건이 고려 왕으로서 처음 친정에 나선 전투 이기도 했다 (2차).
전투 세부 전과는 전해지지 않지만 정황상 고려군은 조물성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후백제군은 야전에서는 우세했으나 조물성 점령에는 실패했다. 또한 충청도 전역에서 고려명장 '유금필'에게 패하며 거점 상실위기에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양측은 1·2차 전투 모두 결정적 승부를 내지 못한 채 화의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 화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926년 4월, 고려에 인질로 잡혀 있던 견훤의 생질 '진호'가 급사한다. 견훤은 이를 고려의 고의로 의심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백제에 인질로 잡혀있던 왕건 육촌동생 '왕신'을 처형한다. 이 사건으로 양국의 화의는 완전히 파기된다.
이때쯤 후백제가 서라벌 인근까지 세력을 확대하자 신라는 외교·군사적으로 더욱 고려에 의존하게 된다.
왕건은 조물성전투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927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공격적 전략을 선택한다.
용주성·운주성·근암성 공격을 시작으로 후백제를 포위해 나간 것이다. 이에 호응해 신라 경애왕 역시 신라군을 파견한다.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인 견훤은 신라의 친고려 왕실을 제거하기 위해 서라벌로 출정한다.
후백제와 고려 간 2차전 쟁이 본격화된다.
초기국면에서는 후백제 견훤이 우세했다. 견훤은 고려 영토였던 '웅주'를 공격해 충청도 전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한다.
견훤 군이 웅진으로 진출하자, 고려·신라 연합군은 웅진과 문경 일대에서 교전을 벌였다. 이때 고려장군 '영창'과 '능식'은 한반도를 반 바퀴 돌아 '강주'에 상륙해 네 개 마을을 함락시켰다.
또한 신라장군 '김락'은 견훤이 9년간 공들여 점령한 '대야성'을 탈환하고, 후백제 장군 '추허조'를 생포한다. 이 기동으로 인해 견훤은 어느 방향으로 진격하든 고려군 협공을 받게 되는 형세에 놓인다.
왕건은 직접 '진주'까지 남하해 백성들을 위무했다. 이에 문경 일대 호족들까지 고려에 투항하면서 견훤은 전략적으로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빠진다.
만약 이 흐름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후삼국 통일은 상당히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견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견훤은 고려가 점령한 '근품성'을 탈환하고, 신라 '고울부'(영천)를 점령함으로써 다시 한번 신라로 하여금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게 만든다. '영천'은 '경주' 바로 앞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왕건은 급히 '공훤'에게 1만 병력 맡겨 신라 구원에 나서게 한다. 문제는 후백제군 포위망 형성 과정에서 경주 인근이 일시적으로 비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견훤은 이 틈을 정확히 간파했다.
상주–군위–영천–경주로 이어지는 급소, 오늘날 '상주영천 고속도로' 경로를 따라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견훤은 서라벌 기습에 성공하고,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한다. 왕비와 궁정 역시 참혹한 수난을 겪었고 서라벌은 큰 피해를 입는다. 견훤이 직접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을 세운다. 신라는 후백제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이에 왕건은 우선 '공훤'에게 자신과 합류할 때까지 섣불리 경주로 진격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동시에 대야성에 주둔해 있던 '김락'에게 고려·신라 연합군을 이끌고 대구로 집결하라 지시한다.
그리고 왕건 자신은 정예 기병 5천을 이끌고 남하한다. 아마도 그의 직속병력 대부분 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명한 '공산전투'가 시작된다.
당시 견훤 병력은 약 5천, 고려군은 그 두세 배에 달했다. 수적으로는 견훤에게 불리한 싸움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사 속 대부분의 전쟁은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나게 된다. 견훤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