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7

후삼국시대 공방전 2- 견훤ㆍ궁예의 초기 공방전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7

ㅡ 후삼국시대 (889~936) 11 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2- 견훤ㆍ궁예의 초기 공방전)


대체로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후삼국시대 시작을 견훤이 내부적으로 왕을 칭하던 892년 무렵으로 본다. 그러나 국가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900년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 901년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을 후삼국시대 시작으로 보는 해석이 보다 설득력을 가진다.


오늘은 이 시기 견훤과 궁예 공방전을 중심으로 후삼국시대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 궁예가 왕건에 의해 축출되면서 후삼국시대 주도권은 견훤과 왕건 사이의 대립 구도로 재편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우리가 놓치고 있는 ‘신라’


후삼국시대를 논할 때 궁예 태봉, 왕건 고려, 견훤 후백제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이미 몰락한 국가로 인식되며 자연스럽게 논의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이 시기 신라 여력은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


신라는 920년 대야성 함락 이전까지 후백제 공격을 여러 차례 방어했으며, 중앙권력이 약화된 상황 속에서도 신라왕실에 우호적인 지방호족 세력이 상당수 존재했다. 비록 실질적 군사력과 행정 통제력은 제한적이었으나, 신라왕실 정치적 정통성은 927년 이전까지 명목상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신라가 단순히 ‘이미 끝난 국가’가 아니라 후삼국 정세 속에서 일정한 정치적 변수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 ‘포석정 사건’에 대한 재검토


927년, 신라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중 후백제 견훤 군대가 기습하여 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강간했다는 사건은 신라멸망을 상징하는 대표적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견훤은 김부(훗날 경순왕)를 옹립하였다.


전통적으로 이 사건은 신라말기 왕실의 사치와 방만함을 상징하는 사례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적군이 수도를 기습하기 직전까지 왕이 아무런 경계 없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는 설정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포석정 사건은 사료의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서로, 신라멸망 원인을 내부 도덕적 타락에서 찾으려는 서술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포석정 ‘연회’ 역시 실제로는 정치적 회합이나 의례적 행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단지 후대 편찬과정에서 도덕적 교훈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 이후 신라가 후백제 정치적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신라 국왕이 살해되고 왕비가 능욕당한 사건은 신라계 호족과 백성들에게 깊은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이후 신라 세력이 고려 왕건에게 기울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927년은 신라가 실질적인 정치주체로서 기능을 상실한 시점, 즉 사실상 멸망시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후삼국은 ‘국가 간 전쟁’이었는가?


후삼국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관점은, 이 시기 전쟁을 단순한 국가 대 국가 대립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후삼국 세 정권은 모두 신라말기 지방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성립했으며, 그 결과 각 국가 내부에서도 호족 간 이합집산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실제로 궁예 태봉이 멸망한 이후에도 친태봉 성향 호족세력이 고려에 저항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후삼국시대가 세 국가의 정면충돌 이라기보다, 신라말기 지방호족 사회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과도기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국가 외형을 갖추고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호족연합체 간 주도권 경쟁이 전쟁 본질이었다.


4. 후삼국시대가 짧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후삼국시대는 약 40여 년 만에 막을 내린다. 수백 년간 지속된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매우 짧은 기간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성격 차이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는 오랜 시간 독립된 국가로서 중앙집권체제와 고유한 정치· 문화적 정체성을 축적해 왔다. 반면 후삼국은 통일신라 붕괴 과정에서 등장한 정치세력으로, 내부분열적 성격이 강했다.


2) 국가체제 미성숙


후삼국 각 정권은 행정·군사·경제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기 전에 몰락했다. 이는 이들 정권이 본질적으로 지방호족 연합체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통합에 대한 인식 변화


삼국시대에는 왕조중심 패권인식 이 지배적이었으며, 반드시 한반도 전체를 통일해야 한다는 공통된 인식은 약했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 약 200년간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살아온 경험은, 후삼국시대에 다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4) 내부분열 심화


후백제는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며 급격한 내분에 시달렸고, 태봉은 궁예 폭정으로 인해 왕건에 의해 붕괴되었다. 신라는 이미 독자적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5) 외부압력 부재


삼국시대에는 수·당 및 북방 유목 세력 침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었으나, 후삼국시대에는 이러한 외부압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는 고려가 비교적 빠른 통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이었다.


5. 후삼국시대 초기 주요 충돌


후삼국시대 초기는 견훤과 궁예가 각기 세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국지적 충돌이 빈번히 발생한 시기였다. 이 시기 전투들은 대체로 세력확장과 거점확보를 위한 전투였다.


1) 무진주 장악(892년)


견훤이 무진주를 장악하며 독자 세력 형성의 출발점을 마련했다.


2) 나주 점령(903년)


궁예 태봉이 나주를 장악하며 서남해 해상 교통로를 확보했고, 이는 이후 왕건세력 성장에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3) 철원점령(905년)


궁예가 철원을 수도로 삼아 후고구려 체제를 정비하고, 이후 국호를 태봉으로 변경한다.


4) 신라압박과 국력약화


후백제 지속적인 공격으로 신라는 정치적 주도권을 점차 상실한다.


5) 후백제–태봉 간 충돌


한반도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양 세력 간 긴장과 충돌이 지속된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구도는 다시 재편된다.


6. 결론


후삼국시대는 삼국시대와 같은 장기적 국가 간 대립이 아니라, 신라말기 지방호족 사회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단기적 정치 과도기였다.


이 시기를 거치며 한반도는 다시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려의 통일은 비교적 빠르게 완수될 수 있었다.


이제 후삼국은 고려, 후백제, 그리고 명목상 존속하던 신라라는 구도로 재편되었으며, 통일전쟁은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어서 <왕건과 견훤의 공방전> 편이 계속됩니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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