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권력교체 구조와, 실현되지 못한 역사적 가능성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6
ㅡ 후삼국시대 (889~936) 10 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1- 권력교체 구조와, 실현되지 못한 역사적 가능성)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국호를 '태봉' 에서 '고려'로 바꾸면서 <후삼국시대 공방전> 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먼저 앞 '궁예나 왕건 편'에서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로 다시 재건국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는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 즉 왕건이 어떻게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재건국했는가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오해가 많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드라마 <태조 왕건>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서 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다. 이는 중국 나관중 소설 '삼국지연의' 속 영웅담을 실제 역사로 착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삼국지연의는 검증된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고, 인물들은 실대했지만 그 이야기는 허구다.
태조왕건 드라마 또한 왕건을 과도하게 미화하고, 궁예를 극단적으로 악마화한다. 여기에 예언, 도술, 초자연적 사건을 덧붙이며 궁예에서 왕건으로 권력교체 원인을 ‘정치’가 아닌 ‘운명’으로 바꿔 놓는다.
도선대사의 예언, 피 흘리는 초상화, 신비한 치료 장면들은 극적이지만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사건 이후에 만들어진다. 이미 벌어진 일을 “원래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라고 합리화하기 위해서다. 야사는 반복되며 사실처럼 굳고, 드라마는 이를 더욱 강하게 각인시킨다.
문제는 미신적 장치가 분위기 연출을 넘어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 동력으로 사용될 때다.
왕건의 정치적 계산, 세력 간 이해관계, 군사적 현실은 사라지고 하늘의 뜻만 남는다.
그 순간 역사는 판타지가 된다.
<태조왕건>이라는 드라마는 스스로를 정통사극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더 조심했어야 했다. 내레이션 정도 해명은 기억되지 않는다. 기억되는 것은 강렬한 장면뿐이다.
역사는 예언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권력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선택이다. 오늘 글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추정하고 보다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후삼국시대를 떠올릴 때 대중의 머릿속에는 비교적 선명한 구도가 자리 잡고 있다.
온화하고 포용적인 성군 왕건, 그리고 관심법에 사로잡혀 스스로 몰락한 폭군 궁예.
그러나 이 이미지는 역사라기보다 사극과 승자의 기록이 만들어낸 서사에 가깝다.
왕건과 궁예의 대립을 개인의 선악이나 성격 문제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후삼국이라는 격변기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 싸움은 한 영웅이 폭군을 제거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구조가 충돌한 결과였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1. 폭군 이전에 혁명가였던 궁예를 살펴봐야 한다.
궁예는 신라 말 중앙권력이 붕괴된 틈에서 등장했다. 지방호족은 각자 독립했고, 농민과 유민은 기존질서에서 이탈했다. 이런 상황 에서 궁예는 혈통이나 귀족신분이 아니라, 신앙과 동원을 통해 세력을 조직했다.
그가 내세운 '미륵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광신이 아니었다. 기존 질서로부터 배제된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정치 언어였고, 실제로 태봉은 우리 역사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중동원형 정권'이었다.
이 점에서 궁예정권은 폭군국가 이기 이전에 '혁명정권'이었다.
2. 궁예가 ‘미쳐간 왕’이란 기록은 한계가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궁예가 점점 의심이 많아지고, '관심법'을 내세워 신하와 왕비, 본인 자녀까지 죽였다고 기록한다. 이런 기록을 전부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 설명방식과 의도이다.
궁예정권 실패는 거의 대부분 정책실패와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사서는 이를 개인의 광기와 성격파탄으로만 환원한다. 이는 승자서술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궁예 혁명정권이 제도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내부통제는 강화되고, 숙청은 늘어난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에서도 반복된 현상이다.
상황은 전혀다르지만 궁예의 폭압 역시
이런 맥락에서 재해석될 필요는 있다.
3. 왕건 쿠데타는 ‘덕망’이 아니라 ‘연합’이었다
왕건은 분명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 성공을 인품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다.
왕건은 이미 궁예체제 내부에서 가장 강력한 대안세력이었다. 송악을 기반으로 한 해상 무역과 경제력, 지방호족과 혼인연결망,
군사력과 보급능력 집중 등 왕건은 이미 궁예보다 실질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궁예정권의 급진적 혁명에 불안을 느낀 기득권세력 이해관계 가 왕건에게 쏠린 것이다.
이 조건 속에서 왕건은 ‘반란자’라기보다 체제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이동한 권력중심 이었다.
삼국사기 등 정사기록에 나오는 '추대'란 말은 왕건에게 도덕적 감화를 받았다기보다 이해관계가 '합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건 쿠데타는 혁명이 아니라, 혁명을 종료시키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궁예와 왕건 승패를 가른 것은 '인물'이 아니라 '구조'였다
궁예정권은 민중 동원을 통해 출발했지만 호족과 안정적 타협에 실패했다. 궁예는 제도화 이전에 권력이 미륵신앙이라는 신권으로 집중되었으며 지속가능한 행정구조도 만들지 못했다.
반면 왕건은 기존 지배질서를 일정 부분 인정하고, 사회피로도를 낮추는 방향을 택했다.
이와 같이 후삼국 승패는 누가 더 선했는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정치구조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는가 문제였다.
4. 만약 궁예정권이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흔히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말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우리 역사 속에서 너무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살펴본다.
가설적으로 보자면 궁예정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첫째, 미륵신앙의 정치적 절대화 완화하고, 신앙과 행정을 분리했어야 한다.
둘째, 호족세력과 전면적 대립보다는 부분적 타협과 제도적 편입이 필요했다. 이러한 선택은 혁명기 정치과정에서 늘 이율배반적 으로 작용한다.
즉, 기득권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기득권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슬픈 논리이다.
셋째, 민중동원을 일회성 열광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제도로 전환했어야 한다.
이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우리 역사에 고려와는 전혀 다른 성격 국가가 등장했을 것이다.
귀족중심 국가가 아닌 보다 민중중심을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국가, 혹은 불교적 이상국가 실험이 일정 부분 제도화된 체제 말이다.
물론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이처럼 궁예실패가 곧 그의 광기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단지 미완의 실험이 중단된 결과였을 뿐이다.
5. 우리는 무엇을 다시 봐야 하는가
궁예는 실패한 폭군으로, 왕건은 완벽한 성군으로 기억되기에는 역사가 너무 복잡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영웅을 숭배하거나 폭군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왜 어떤 선택은 살아남고, 어떤 가능성은 사라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왕건은 더 도덕적이어서 이긴 것이 아니라, 더 지속가능한 구조를 선택했기에 이겼고, 궁예는 폭군이어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혁명적 실험을 제도화하지 못했기에 사라졌다.
그 지점에서 후삼국시대는 단순한 통일전쟁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역사 정치질서가 어떤 방향으로 수렴되었는지를 결정지은 분기점이었다.
그 분기점 권력투쟁에서는 패배했으나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이름 '궁예'가 있다.
또 궁예를 짓밟고 그 위에 서서 질서를 완성한 인물 '태조왕건'이 있었다.
이어서 <후삼국시대 공방전 2>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