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5

후삼국 난세 속에서 ‘덕’으로 고려를 세운 '태조왕건' 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5

ㅡ 후삼국시대 (889~936) 9 ㅡ

(후삼국 난세 속에서 ‘덕’으로 고려를 세운 '태조왕건' 2)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세 인물이 등장해 각각 나라를 세우고,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같은 세대 안에 통일을 이룬 사례는 없었다.

이 세 사람이 활동하던 시대를 다루는 앞선 편들에서는 '견훤'과 '궁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늘은 마지막 편으로, 세 인물 가운데 '왕건'을 중심으로 그의 성장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1. 비슷한 시대, 다른 출발선


견훤(867년), 궁예(869년), 왕건(877년) 세 사람은 불과 10년 남짓한 나이 차이를 둔 동시대 인물이었다.


그러나 출발선은 같지 않았다.


'견훤'과 '궁예'가 몰락한 질서 속에서 스스로 세력을 일군 인물이라면 '왕건'은 당시 기준으로 보아 ‘금수저’ 환경에서 출발한 인물이었다.


왕건 본관 송악(오늘날의 개성)은 해상교통과 상업 요충지였다.

왕건 아버지 '왕륭', 혹은 할아버지 '작제건' 은 서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지역 유력호족으로 성장했다.


북송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은 왕건 가문을 ‘고구려대족(高句麗大族)’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왕건가문이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계 유민 집단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송악일대 에는 시간이 흘러도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궁예가 초기국호로 ‘고려’ 선택한 것 역시, 이 지역 고구려계 세력을 포섭하려는 정치적 판단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2. 궁예가 국호를 ‘고려’에서 ‘태봉’으로 바꾼 이유


오늘날 우리는 궁예 나라를 편의상 ‘후고구려’라 부르지만, 당시 궁예가 사용한 국호는 ‘고려’였다.


당대에는 ‘고구려’와 ‘고려’가 혼용되었고, 고구려 역시 장수왕 이후 공식국호로 ‘고려’를 사용한 바 있다.


궁예는 이후 국호를 '마진', 다시 '태봉'으로 변경한다. 이 변화는 흔히 그의 광신적 행보와 연결되어 설명되지만, 정치적 맥락에서 볼 여지도 충분하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첫째, 단순한 고구려 계승을 넘어 새로운 왕조 창건자임을 강조하려 했을 가능성이다.


둘째, 자신을 미륵불 화신으로 내세운 궁예 통치이념과 ‘태봉’이라는 국호가 지닌 태평성대적 상징성이 맞닿아 있다는 점으로 추정된다.


셋째, ‘고려’라는 이름이 오히려 왕건을 비롯한 고구려계 호족들에게 정통성 근거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의식했을 가능성이다.


물론 이를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국호변경이라는 중대한 선택이 단순한 변덕이나 광기 산물이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궁예 권위 신성화와 잠재적 경쟁자를 견제를 동시에 노린 정치적 선택으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3. 왕건의 성장과 현실감각


왕건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노골적인 불만이나 정치적 도발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해상세력과 연계를 강화하며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차분히 다져 나갔다.


왕건 청소년기, 신라는 이미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이 시기에 왕건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892년 궁예가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 왕건은 아버지 왕륭과 함께 궁예의 군에 합류한다.


이때 왕건의 나이는 이십 대 초반으로 매우 젊었으나, 그의 가문이 보유한 해상 연결망은 궁예세력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후백제 견훤과 신라는 해상교역과 수군운용에서 일정한 강점을 갖고 있었던 반면, 궁예정권은 상대적으로 해상력이 취약했다. 이에 왕건가문은 서해일대를 장악하며 견훤의 해상교역을 견제했고,

이는 곧 궁예정권의 경제적 기반 강화로 이어졌다.


이 지점에서 왕건은 단순한 장수나 후발주자가 아니라, 궁예정권 구조적 약점을 보완하는 핵심 인물로 성장해 갔다.


4. 왕건의 과장된 기록과 실제의 간극


고려건국 이후 편찬된 사료들 에서는 마치 궁예가 왕건을 얻자마자 군권을 넘긴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궁예전'과 최근 판독·공개된 금석문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궁예는 단순한 명목상 군주가 아니라 상당기간 직접 군을 지휘하며 주요 전투를 주도한 인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최근 탁본 판독결과가 주목된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경유대사탑비)에 따르면, 후고구려가 후백제 나주지역을 공략한 사실이 기존에는 왕건의 군사적 업적으로 이해되었으나, 실제로는 궁예가 직접 출병하여 전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왕건 공적이 과대평가되었다기보다는, 고려건국 이후 시조를 부각하는 과정에서 서술이 일정 부분 단순화·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왕건이 어느 시점 부터 송악지역을 넘어 호족세력 전체 핵심인물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이 성장은 혈통이나 배경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왕건 능력이 그만큼 출중했다고 볼 수 있다.


5. 왕건이 ‘덕장(德將)’이라는 평가


사료와 정황을 종합해 보면, 왕건은 위와 아래를 동시에 아우를 줄 아는 체제운영 고수였다.


왕건이 귀순한 장수들을 포용적으로 처리한 방식이나, 항복해 온 후백왕 '견훤'과 신라 '경순왕'을 융숭하게 받아들이는 사례, 고려 건국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혼인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궁예가 점차 종교적 권위 앞세우며 급진화할 때에도, 왕건은 노골적 대립을 피하면서 자신 입지와 신뢰를 동시에 유지했다.


후삼국통일 이후, 고려 역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라기보다는 호족연합 성격이 강한 체제였다. 왕건사후 '혜종' 대에 혼란이 발생했고, '광종'에 이르러서야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 왕권이 강화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왕건통치가 제도적 강압보다는 개인 판단력, 관계 조정 능력, 그리고 포섭 전략 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왕건에게 ‘덕’은 도덕적 이상 이라기보다 난세를 건너기 위한 현실적인 '정치기술'에 가까웠다.


6. 힘의 시대에 왕건 '덕'이 살아남은 이유


난세에는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영웅보다 적까지 끌어안을 줄 아는 지도자가 살아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 초한지의 '항우'와 '유방' 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왕건 역시 수많은 전투에서 목숨을 걸었고, 결코 온건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끝내 선택한 방식은 압도보다는 조정이었고 배제보다는 포섭이었다.


왕건 덕성은 성품이기 이전에 전략이었고, 도덕적 이상이라기보다 난세를 통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그를 '태조왕건'으로 만들었다.


이어지는 편에서는 왕건이 이러한 덕성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후삼국시대 치열한 공방전 편>이

계속됩니다.


— 초롱 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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