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난세 속에서 ‘덕’으로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 1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4
ㅡ 후삼국시대 (889~936) 8 ㅡ
(후삼국 난세 속에서 ‘덕’으로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 1)
태조왕건(877~943).
후삼국시대 혼란 속에서 뛰어난 전술과 교묘한 외교로 스스로를 역사 중심에 세운 인물이다.
후삼국 시대(889~936)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견훤(867), 궁예(869), 왕건 (877).
불과 십 년 남짓한 차이의 이 세 사람은 동시대에 태어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움켜쥐고 국가를 세우거나 이어받았다.
우리 한국사에서 이런 경우는 없었다.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훗날 태봉)의 궁예, 그리고 고려의 왕건. 이들 모습은 자연스럽게
중국 삼국시대 < 조조·유비· 손권>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삶은 권력 획득과 몰락, 이상과 광기, 배신과 통합이 얽힌 극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는 중국 삼국시대만큼 대중 상상 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극성을 생생하게 재현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삼국시대가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살아 숨 쉬는 이유는 바로 '삼국지연의'라는 압도적인 소설 덕분이다. 삼국지연의 작가 '나관중'은 역사기록을 재해석하고, 인물에게 선악과 개성을 부여하며, 단순한 사건 나열을 살아 있는 서사로 바꿔 놓았다. 덕분에 유비·조조·손권은 교과서 속 이름이 아니라, 지금도 논쟁과 해석의 대상이 되는 입체적 영웅으로 남아 있다.
반면, 한국 후삼국시대 인물들은 '정사'와 '연대기' 속에 갇혀 있다.
'견훤'은 반역자나 패자로,
'궁예'는 폭군이나 광인으로,
'왕건'은 교과서적 성군으로만 기록된다. 그들 내면과 갈등, 혼란을 감당한 인간적 무게는 이야기 속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후삼국은 ‘드라마 없는 역사’가 되었고, 대중 기억에서도 밀려났다.
'삼국지연의'가 삼국시대 천 년 뒤 에야 쓰였듯, 후삼국시대도 이미 천 년이 지났다. 지금이야말로 역사적 거리와 상상력이 결합할 최적의 시점이다. 후삼국을 무대로 한 대하서사가 나온다면, <견훤·궁예·왕건>은 단순한 역사 인물이 아닌 오늘에도 질문을 던지는 서사적 캐릭터, 입체적 영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태조왕건’이 일부 관심을 환기했지만 이제 문제는 영상 한 편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직접 이야기 만들어낼 의지가 있는가이다.
후삼국시대에 관한 한국판 '삼국지연의'가 없는 이유는 어쩌면 상상력 빈곤이 아니라 그것을 시도하지 않았던 오랜 관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이야기는 역사시리즈로서 이야기가 다소 벗어나는 것 같지만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군웅이 할 거한, 한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격동의 시대를 우리 스스로 너무 소홀히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조조, 유비, 손권>
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견훤, 궁예, 왕건>이라는 걸출한 영웅들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물론 후삼국시대에 관한 소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중국 '삼국지연의'나 일본 '대망'이라는 걸출하고도 압도적인 소설이 없었을 뿐이다. 내가 재능이 된다면 써 보고 싶다.
당시 신라는 이미 실질적 국력을 잃은 상태 였다. 삼국지 속 <위·촉·오>처럼 균형을 이루며 경쟁한 것이 아니라, 명목상 존재만 남아 통치력이 붕괴된 말기 '한나라'와 비슷했다.
따라서 ‘후삼국’이라는 명칭은 실제 당시 권력구도를 다소 왜곡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건국군주’로 보는 것도 한계는 있다. 왕건은 독자적으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했다기 보다 궁예가 이미 세운 국가 틀을 쿠데타 통해 계승하여 새로운 왕조로 재편한 인물 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왕건은 삼국지에서 조조처럼 한 국가를 처음부터 구축한 인물보다는 조조 위나라를 '사마의' 일가가 쿠데타로 장악해 진나라를 세워 최종적으로 통일을 이룬 사례와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즉, 왕건역할은 창업군주라기보다는 기존체제를 전복·재편하여 통일을 완성한 ‘계승형 통일자’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논리적이다.
또 어떻게 보면 후삼국시대라는 명칭과는 달리 당시 구도로만 본다면 '삼국지' 보다 '초한지' 즉 <항우와 유방> 대결에 더 가깝다.
결국 최종승부는 <견훤과 왕건> 두 사람의 싸움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초반 주도권은 '견훤'에게 있었다. 그는 뛰어난 군사감각과 공격적 확장전략으로 후백제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한때 견훤은 후삼국통일의 가장 유력한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후계구도 설정실패, 내부갈등 방치, 결정적 전투에서 연이은 패배로 초반 우위를 지켜내지는 못했다. 만약 그가 몇 차례 선택에서 달랐더라면, 후삼국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한반도 천년의 역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후삼국시대는 결코 밋밋한 시대가 아니었다.
우리가 다만 그 시대를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후삼국시대를 다시 본다면 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닌, 혼란 속에서 질서를 선택해야 했던 인간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태조왕건 성군이라는 평가 너머, 보다 복합적인 인간 '왕건'이 서 있다.
이어서 <왕건의 성장기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아래 사진은 태조 왕건의 상상 초상화로,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왕건 역을 맡았던 '최수종'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