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실용적 통합정치’와 훈요십조 8조 재해석)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
ㅡ 왕건의 호족연합국가 '고려' 탄생 2 ㅡ
(왕건 ‘실용적 통합정치’와 훈요십조 8조 재해석)
왕건 후삼국통일은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들어가는 전환점이 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고려는 외형적 통합과 달리, 중앙집권체제가 충분히 정비되지 못해 아직 강력한 국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왕건시기 지방호족 분열 문제는 단순한 권력다툼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 왕조 정체성과 통치 기반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 등장한 구조적 긴장이었다.
왕건은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호족세력을 포섭하여 혼인 정책을 통해 혈연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각 지역세력 자율성을 일정 부분 인정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념적 통합이라기보다 현실정치에 기반한 실용적 통합이었다.
그러나 독립성과 군사력을 유지한 지역세력 들과 연합은 통일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중앙집권체제 확립이라는 과제와는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다. 즉, ‘호족연합체제’는 왕권강화를 전제로 한 국가체제와 구조적 으로 충돌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왕건의 정치적 역량은 바로 이 긴장을 관리하는 데 있었다.
그는 특정호족에게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고, 상호견제 가능한 균형구조를 유지했다. 후백제계, 신라계, 태봉계 인물을 고르게 등용한 인사정책 역시 이러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1. 훈요십조의 성격
943년 왕건은 죽음을 앞두고 후계자들에게 유훈을 남겼다. 이것이 이른바 '훈요십조' 이다.
'훈요십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니 주요 내용을 좀 더 살펴본다.
1) 국가의 대업이 불교의 호위와 지덕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숭상할 것
2) 절의 쟁탈과 마구 만들어 내는 것을 금할 것
3) 왕위계승은 적자적손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어질지 못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4) 거란과 같은 야만국 풍속을 배격할 것
5)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6) 연등회·팔관회 등의 중요한 불교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7)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8) 차현산맥 이남으로서 공주강 바깥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9)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10) 옛일을 거울삼아 지금을 경계할 것
이처럼 '훈요십조'는 불교중심 정치, 풍수지리 신봉, 공신과 호족 예우, 덕치와 충신 중용, 북진정책 유지를 핵심으로 하며, 후세에 고려왕조 기틀을 마련하는 지침 역할을 한다.
2. ‘차현’ 해석에 대한 학계의 견해
그런데 여기서 지금까지도 문제 되는 것은 '훈요십조'에 여덟째, <차현이 남 인맥등용 금지> 명시 여부이다.
원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형지세 (山形地勢)가 배역(背逆) 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이 구절은 "차현 이남 백성은 교만하고 야만스러우며…" 식으로 해석되었다. 특히 차현 이남은 차령산맥 이남으로 변질되어 전라도에 대한 부정적 인식 역사적 뿌리를 이 구절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이 구절은 오늘날까지도 지역차별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나 또한 학창 시절 역사시간에 그렇게 배웠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순간까지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 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때그때 정치적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정치적 맥락 속에서 강화된 해석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회과부도'를 보면서 달달 암기해 왔던 그 '차령산맥'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다고 밝혀졌다.
2005년 발표된 '국토연구원' 설명에 의하면, "차령산맥뿐 아니라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노령 등 여러 산맥도 구릉(언덕) 상태인 것으로 드러나 실제산맥으로 분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체계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일제강점기 '고토분지'라는 일인 지질학자였다. 그는 1903년에 일꾼 6명과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그것도 단 14개월 동안 답사하는 것으로 산맥체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주먹구구 방식으로 측정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산맥체계였던 셈이다. 이것이 조선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 나 '산경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차령산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아래지도 참고)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뉜다.
1) 풍수지리적 해석
해당지역 지세가 “배역(背逆)”하다는 표현에 주목하여, 정치적 의미보다 풍수적 경고로 보는 견해다.
2) 정치·군사적 경계선 해석
차현을 당시 정치적 긴장이 존재했던 남방 경계선으로 보고, 특정 반왕건 세력에 대한 경계로 이해하는 견해다.
3) 특정지역 세력 견제설
청주 등 일부 지역호족 세력이 잠재적 위협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견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재 학계에서도 ‘차현’의 정확한 위치와 의미가 단일하게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를 곧바로 특정 현대지역 전체에 대한 차별의식으로 연결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3. ‘차현’과 ‘차령’ 혼동 문제
근대 이후 일부 교과과정에서 ‘차현’을 ‘차령’과 동일시하는 해석이 등장했다. 차령산맥이라는 지리개념은 근대 지질학 체계 속에서 정리된 것이다.
왕건 당시는 산맥이란 말도 없었고 산맥을 구분할 기술도 없었다.
다만, 이것이 곧 훈요십조 내용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는 원문이 아니라 해석 변화 과정이다.
조선후기 일부 문헌에서 차현을 넓게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근대기에 이르러 산맥체계가 정비되면서 ‘차현 이남’이 오늘날 전라도 지역과 연결되는 설명 방식이 굳어졌다. 이 과정에서 해당구절이 지역차별 역사적 근거처럼 인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문은 지리적 범위를 명확히 오늘날 도 단위 행정구역과 일치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현대적 지역구분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해석상 비약일 수 있다.
4. 왕건의 실제정책과 지역인식
왕건은 나주지역 호족 오 씨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그 소생인 '혜종' 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는 특정지역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려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고려 초 정치구조는 지역차별 이라기보다 정치적 안정과 권력 균형이 우선 과제였다. 따라서 훈요십조 8조는 특정지역 전체를 비하했다기보다, 당시 정치질서 유지를 위한 제한적 조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5. 현대정치와 연결문제
20세기 이후 한국정치에서 지역 갈등이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곧바로 훈요십조 8조와 직선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 연속성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다.
역사는 특정시대 맥락 속에서 작성되며, 이후 시대 이해관계에 따라 재해석된다. 훈요십조 8조 역시 시대별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호출되어 왔다.
중요한 것은, 이를 오늘날 지역
갈등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해석은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6. 왕건정치의 핵심유산
왕건은 근본적 구조갈등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관리하고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대규모 호족반란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권력충돌은 2대 혜종 시기 이후 나타난다.
왕건 정치유산은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충돌을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한 능력이었다.
이것이 바로 ‘실용적 통합정치’의 의미다.
7. 결론
훈요십조 8조는 특정지역에 대한 단순한 혐오선언으로 보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해석이 시대에 따라 정치적으로 활용되어 온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역사는 고정된 교훈이 아니라 해석의 층위를 가진 기록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료를 절대화하기보다, 작성 당시 맥락과 이후 해석 변천과정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왕건 훈요십조에 의한 유훈통치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인 시사점은 지역을 차별, 배제하는 정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다양한 세력을 포섭하면서도 권력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정치적 감각에 있다. 그는 후삼국이라는 분열의 시대 속에서 특정지역이나 세력에 치우치기보다, 혼인정책과 사성 정책 등을 통해 통합과 안정을 도모했다. 이러한 포용과 균형의 리더십이야말로 고려건국기 가장 중요한 정치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후 시대의 정치적 관점이나 지역구도에 비추어 당시를 해석함으로써, 왕건통치를 지역중심 시각으로 단순화하거나 왜곡해 온 측면이 있다. 이는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우리는 고려 건국기 정치상황과 시대적 조건을 정확히 짚고, 왕건통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균형 있게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현재 정치와 사회를 성찰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고려영토에 대한 논쟁 편> 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