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다툼과 광종개혁 2 ㅡ 혼인은 정치이다!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6
ㅡ 왕위다툼과 광종개혁 2 ㅡ
(혼인은 정치이다!)
오늘날 상류층 혼인풍속을 보면 여전히 ‘전략결혼’ 성격이 엿보인다.
유력 정치가문과 재벌가문 결합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을 넘어 사회적·경제적 의미를 갖는다. 그 가장 큰 본보기가 지금도 이혼소송으로 조 단위 재산분배가 진행 중이어서 화제가 되고 있는 SK그룹회장
'최태원'과 노태우대통령 장녀 '노소영' 결혼이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반복되어 왔다. 또한 세계사적으로도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는 이보다 훨씬 강도 높은 혼인전략이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신라와 고려 초기다.
신라는 골품제 유지를 위해 왕실 혈통 순수성을 강조했고, 그 결과 근친혼이 제도적으로 용인되었다. 혈통은 곧 통치 정당성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초기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복남매, 사촌 등 가까운 혈족 간 혼인이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오늘날 윤리기준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행이었지만, 당시 고려왕실권력은 정치적 생존전략에 가까웠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초기 혼인전략 차이는 있었다.
신라는 골품제 유지라는 제도적 구조상 필연적 근친혼이었고, 광종 이전 고려는 연합왕권 구조 속 권력균형용 혼인이었다.
고려초기 왕실혼인이 권력유지와 어떻게 맞물려 작용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1. 혼인은 권력구조 일부였다
전근대 사회에서 혼인은 개인적 결합을 넘어 정치·사회적 연합의 수단이었다. 특히 왕조 초기와 같이 권력구조가 안정되지 않은 시기에는 혼인관계가 곧 정치적 동맹망을 형성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고려초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왕실내부 및 외가세력과 혼인은 단순한 혈연결합이 아니라,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는 수단이었다.
2. 태조사후 권력구조 불안정성
고려는 태조왕건이 전국 호족세력과 연합을 통해 건국한 국가였다. 이는 건국과정에서 강점이었지만, 왕권의 구조적 취약성을 내포하기도 했다. 왕권은 중앙집권적 관료체계 위에 선 것이 아니라, 지역세력 간 균형 위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사후 왕위계승 과정에서 문제는 단순히 “태조의 아들인가”가 아니었다.
어느 외가와 연결되어 있는가, 어떤 정치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가가 권력향방을 좌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내부 혼인은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는 하나의 선택지로 기능하였다.
3. 초기 왕들 혼인과 정치적 기반
1) 혜종(재위 943~945)
혜종은 어머니 장화왕후 오 씨 가문의 기반 위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동일 외가기반을 공유하는 왕실 구성원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지지세력을 결속하려 했다. 이는 외가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안정도모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혜종 재위기간은 짧았고, 왕권은 충분히 안정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 왕권이 특정혈연 집단 결속만으로는 구조적 불안을 극복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2) 정종(재위 945~949)
정종 또한 왕실내부 혈연을 중심으로 혼인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는 서경(평양) 세력과 연계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천도시도를 통해 정치적 기반 확대 모색했다. 그러나 이 역시 제도적 중앙집권 확립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혜종과 정종 시기는 왕권이 여전히 혈연 및 외가세력 균형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계였다.
4. 광종 선택과 혼인 의미
광종(재위 949~975)은 이전과 유사한 혼인구조 속에서 출발했지만, 그 이후 정치 운영에서는 차별성을 보였다.
그의 정비는 대목황후로, 태조의 딸이자 황보 씨 가문 출신이었다. 이 혼인은 왕실 직계혈통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청주에 기반을 둔 유력 지방호족 외가세력과 정치적 연계를 공고히 하는 의미를 가졌다.
다만, 이를 곧바로 개혁정치 원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광종의 강력한 개혁정책은 다음과 같은 복합적 조건 속에서 전개되었다.
- 초기 왕대의 정치 불안 경험
- 호족 세력 견제의 필요성
- 중국 후주·송 제도의 수용
5. 왕권중심 관료체제 정비요구
이러한 맥락 속에서 광종은 노비안검법 실시와 과거제 도입을 통해 인적 기반을 재편하고 왕권을 제도적으로 강화하였다. 혼인 전략은 그가 즉위 초기에 정통성과 기반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개혁의 직접적 원인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조건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광종 개혁정책 자세한 내용은 광종 편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6. 유교질서 강화와 혼인관념 전환
고려초기 근친혼 혈연동맹은 즉위에는 유리했지만, 지속적 통치체제 구축에는 취약했다.
고려 중·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가족질서가 강화되면서 근친혼에 대한 인식도 점차 변화하였다. 왕실내부 혼인관행은 점차 줄어들었고, 조선에 이르러서는 법적으로 근친혼이 엄격히 금지된다.
이는 혈연중심 정치질서에서 성리학적 윤리질서로 전환을 의미한다. 혼인이 정치적 기술에서 도덕적 규범영역으로 재편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리학 질서와 함께 지나치게 강화된 동성동본 금혼법은 현대 이후까지 유지된다. 이는 혈연을 사회질서 핵심으로 보았던 오랜 관념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동성동본 금혼제 폐지는 최근인 2005년 3월 31일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내 나이 40이 넘어서 까지 내 주위에서 동성동본이라서 결혼을 못 하고 헤어지는 비극적 사랑을 여럿 보았다.
7. 결론
고려초기 왕실 근친혼은 오늘날 윤리적 기준으로 단순 평가하기보다, 당시 권력구조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태조사후 왕권은 제도적으로 충분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혈연과 외가세력은 가장 신뢰 가능한 정치적 자원이자 동맹 기반이었다.
혼인은 이러한 권력 구조를 유지하고 조정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즉 그 시대 '혼인은 정치였다.'
그러나 광종 대에 이르러 왕권은 점차 혈연중심 결속을 넘어 제도적 중앙집권체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고려 정치구조가 연합적 왕권에서 관료적 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따라서 고려초기 혼인정책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국가 형성기 권력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단서라 할 수 있다.
이제 다음 편에서는 고려 3대 왕 정종시대 정치적 전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ㅡ 초롱박철홍 ㅡ
아래 사진은 고려초기 왕실 근친혼 계보입니다. 보기에도 눈이 어지러울 것이니 자세히 보려 하지 마시고 그냥 이처럼 복잡했다는 것만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