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

왕위다툼과 광종개혁 3 ㅡ고려 3대 황제 정종시대!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

ㅡ 왕위다툼과 광종개혁 3 ㅡ

(고려 3대 황제 정종시대!)


앞 편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고려황실 근친혼은 단순한 혈연적 선택이 아니라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행위이었다.


그 뿌리는 고려창업자, '태조왕건' 에게 있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했지만 중앙권력은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지방호족 세력들은 너무 강했고,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황제지위는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었다. 왕건은 지방유력호족 딸들과 결혼하며 동맹을 맺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 문제는 너무 많은 혼인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거의 전국 모든 지방유력호족 딸들과 혼인을 했다.


이 혼인전략은 왕건만의 일로 끝나지 않았다. 후대황족들 역시 지방호족세력과 결혼을 통해 권력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태조왕건이 뿌려놓은 씨앗이 너무 광범위해서 이복남매, 사촌, 심지어 삼촌과 조카 사이까지 혼인이 이어졌다. 이들 또한 권력유지 수단이었다.


권력과 혈연이 뒤엉킨 고려왕실, 그 안에서 경쟁과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의 첫 포문이 터졌다. ‘왕규의 난’이었다.


왕규의 난은 단순한 난이 아니라, 고려초반 황실과 외척세력 간, 힘의 균형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 '왕규의 난'은 무엇이었나?


고려 제2대 황제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사망한다. 그 직전 일어난 사건이 바로 ‘왕규의 난’이었다.


‘왕규’(王規)는 '혜종' 장인이자, 당시 가장 유력한 외척세력이었다. 그는 '태조' 딸과 혼인하여 황실과도 혈연으로 얽혀 있었다. 즉, 황족이면서 동시에 외척이었다.


그 결과 황실내부는 복잡한 혈연관계로 얽히게 되었고, 후대 황제 계승은 필연적으로 세력균형의 문제가 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첫 대규모 권력 충돌이 바로 ‘왕규의 난’이었다.


'고려사'는 왕규가 난을 일으켰고, 이후 혜종이 병으로 사망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혜종은 전장을 누빈 건장한 장수형 군주였다. 그런데도 27세 젊은 나이에 '왕규의 난' 직후 급서했다.


아들(흥화궁군)이 있었음에도 황위는 이복동생 '왕요'(정종)에게 넘어갔다. 정종 즉위 후 혜종 계열 세력은 급속히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고려사'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혜종의 정치적 제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해석한다.


특히 난을 진압한 인물 '왕식렴'과 혜종 이복동생 '왕요'(정종) 관계는 주목된다.


왕식렴은 서경(평양)을 기반으로 한 개국공신이자 군사력을 가진 실력자였다. 그는 왕규 움직임을 제압하고 왕요를 중심으로 정국을 재편했다.


일부견해에 따르면 왕규의 난은 단순한 역모가 아니라 권력재편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충돌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이는 사료가 충분치 않아 단정 하기는 어렵다.


2. 정종즉위 배경


945년, 혜종사후 왕요가 즉위한다. 그가 바로 고려 제3대 황제 '정종'이다.


정종의 정치적 기반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충주 유력호족 가문의 딸 '선명왕후 유 씨'였다.

왕식렴의 군사적 후원도 있었다.

혼인을 통해 후백제계 유력 가문과도 연결되었다.


이처럼 정종은 외가·처가·서경 세력까지 아우르는 비교적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혜종 즉위 당시 왕규가 “왕요가 반란을 꾀한다”라고 고변했으나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점 역시 단순한 형제애라기보다 정치적 현실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3. 왕규의 난 당시, 정종 말고 혹시 또 다른 실권자는 없었을까?


더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정종 역시 과도기적 존재였고, 실제 정치 중심은 훗날 '광종'이 되는 '왕소'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물론 이것 역시 확정된 정설은 아니다. 다만 이후 전개되는 광종의 강력한 개혁을 보면,

이 시기 권력구도가 단순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부분은 다음 광종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4. 정종정책과 시도


정종(재위 945–949)은 4년이란 짧은 재위기간에 몇 가지 중요한 정책을 시도했다.


1) '광군'설치 (947년)


거란(요) 위협에 대비해 ‘광군’을 설치했다. 기록에 따르면 30만 명을 편성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현대 연구에서는 이 수치가 상징적 과장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광군은 전문 상비군이라기보다

농민기반 예비군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는 고려가 처음으로 대외군사체제를 정비하려 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 황권강화 시도


황규세력을 제거하고 즉위한 정종은 호족과 외척을 견제하며 황권중심체제로 나아가려 했다.


다만 기반이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위 4년은 정책을 뿌리내리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 정비작업은

훗날 광종의 강력한 개혁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된다.


3) 불교진흥


946년 국고에서 7만 석을 출연해 사찰을 지원했다. 고려시대 불교는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황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도구이기도 했다.


4) 서경천도 추진


947년 서경(평양) 천도를 추진했다. 이는 서경 실권자 왕식렴 영향도 있었지만, 태조 북진정책과 고구려 계승의식 연장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개경 호족 강력한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5. 정종시대 의미


고려 3대 황제 정종은 강력한 개혁군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혼란기 황위를 비교적 안정시키고 외적대비 체제를 마련했다.


정종치세는 고려가 호족연합체제에서 황권중심국가로 전환하려는 초기 실험단계로 평가할 수 있다.


949년 정종이 사망하자, 아들이 있었음에도 동생 '왕소'(광종)이 즉위한다.


이 선택이 고려역사 방향을 크게 바꾸게 된다.


다음 편에서는 고려를 완전히 다른 국가로 바꾸려 했던 광종개혁 본격적으로 살펴보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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