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난 기억합니다
“짐이 너무 많아서 이 작은 집에 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남은 짐들은 다 버려야 해요.”
하루아침에 쫄딱 망했다는 말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일이 우리 집에게 그리고 나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처음 분당으로 이사하던 날부터 시작해 본다.
분당으로 이사하기 전 우리 집은 잠원 한강지구 근처 아파트에서 살았고, 남 보기에 부자는 아니었어도 엄마 아빠는 늘 부족함 없이 우리를 키워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분양받은 아파트라며 이제 곧 분당으로 이사 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도 나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었고, 아무것도 없는 낯선 동네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 싫었다.
우리가 이사를 했던 때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11월 경이다. 그 당시만 해도 분당은 신도시 입주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서울에서 분당으로 가는 버스가 2,3대 정도뿐이었다. 좌석버스도 아닌 일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나는 유난히 서글펐다. 창 밖으로 보이는 논을 보는 것도 시골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싫었고, 더불어 내 인생도 어두워지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앞으로 닥칠 더 큰 어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이 때는 그 당시의 삶에서 가장 슬펐던 것 같이 느껴졌다.
우리가 분당으로 이사하기 전부터, 아빠는 분당에 일식집을 오픈할 준비를 하셨었다. 그리고 내가 고3이 되던 봄, 아빠는 분당 서현동에 일식집을 오픈하셨다.
회사에 다닐 때부터 영업과 마케팅에 두각을 보였던 아빠는 분당의 관공서, 경찰서에 매일같이 먹음직스러운 새우튀김을 들고 영업을 다니셨다. 당시 분당은 신도시라서 식당이 많지 않았고, 공무원들의 회식 장소가 마땅한 곳이 없었다. 아빠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고, 커다란 새우튀김을 몇 상자씩 포장해서 나누어 주며, 회식 때 한번 들려달라고 인사를 다니셨다.
사실 아빠가 새우튀김을 들고 온 동네에 인사를 다니고 나면 효과는 바로 나타나곤 했다. 아빠의 마케팅 작전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대학에 합격 발표가 난 후로 겨울 송년회 특수시즌에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뚝배기를 들고 날라야 했다. 그때의 나는 아빠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고, 나의 시간을 빼앗은 아빠가 너무나 밉기만 했다.
그렇게 미웠던 아빠가 암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아빠는 병원과 집만을 오가게 되셨고, 차츰 병원처럼 꾸민 집의 안방에서 하루종일 잠만 자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상태가 안 좋아지면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어느 봄날, 아빠는 꿈처럼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일식집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식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빠는 일식집을 준비하는 도중에 본인이 대장암을 알게 되었지만, 나중에 아빠가 잘 못 되더라도 엄마와 우리의 생활을 위해서 일식집을 오픈해서 먹고살게 해 준다는 생각이셨다. 하지만, 상황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바로 일식집도 처분 했어야 했다고 후회를 하시고 했다.
사실, 엄마도 활동적이라 분당 안에서 여러 활동을 하셨고 주위에 홍보도 열심히 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실수는 일식집은 요리는 요리사가 각자 담당하는 요리를 맡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사장은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필요한 재료만 사면 되는 줄 알았던 것이었다.
메뉴개발, 메뉴의 상태, 그리고 음식을 매일 먹어보며 평가하는 과정이 없다 보니, 요리사는 아빠가 계실 때와는 달리 성의 없이 요리를 내어놓기 시작했고, 변화는 바로 나타났다. 아빠가 계실 때 매일 같이 오던 손님들, 관공서 공무원들은 점점 오지 않게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당시 IMF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지자, 모두들 일식집은 비싸다는 선입견이 강해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루에 매운탕 1개, 초밥 1개를 파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아빠가 건강과 바꾸면서까지 공들여서 준비했던 일식집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도 되지 않아서 엄청난 빛만 남기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분당으로 입주한 첫 번째 집은 방 4개의 조금 넓은 집이었으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자 우리는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일식집까지 넘어가고, 한순간에 엄청난 빛만 남기고 망하게 되었다. 우리는 15평의 아파트를 월세로 겨우 구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짐들을 언제 넣을 수 있는 거예요!! 그냥 두고 갑니다!!”
잔금이 부족했던 우리에게 집주인은 200만 원이 부족하다고 집 열쇠를 주지 않았고, 아파트 건물 앞에 우리의 짐들이 쏟아져 내렸다. 엄마가 여러 차례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다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다행스럽게 밤이 되기 전 먼 친척의 도움으로 우리는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줌마, 이 수납장들은 다 버려야 해요. 수납장이 너무 많고 커서 이 집에 안 들어가요!”
“피아노도 버려야 해요! 어디에 놓을 거예요?”
엄마는 이사센터 아저씨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우리의 이삿짐을 모두 다 집 안으로 들여왔다. 마루 겸 방인 곳에 엄마와 내가 쓸 침대를 하나 놓고, 주변으로 가구를 다 밀어 넣었다. 작은 방은 막 대학생이 된 동생에게 양보했다.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의 통로만 남겨두고 모든 짐을 겹겹이 쌓아 두면서 우리의 슬픈 이삿짐 정리가 끝이 났다.
엄마는 그 집으로 이사 오고 난 후, 거의 매일 새벽 양평으로 혼자 드라이브를 다녔다. 그 당시는 기름값이 리터당 500원대였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나는 새벽에 어둠이 채 가시기 전 집을 나서는 엄마의 마음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렇게 힘든데, 엄마만 혼자 놀러 간다고 생각하는 철없는 딸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엄마가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고, 그날 따라 마음이 동해서 엄마를 따라나섰다. 지금은 구도로인 양평 가는 길에 있던 한 포장마차에 엄마가 차를 세운다. 포장마차에서 머릿수건을 한 사장님이 엄마를 반기며 나를 보고 하는 말이다.
“어머, 네가 엄마가 그렇게 자랑하는 큰 딸이구나!”
“힘든 상황에 대학에 붙어서 장학금 받고 다닌다고 얼마나 자랑하는데, 예쁘네!”
“엄마 힘든데, 많이 도와준다고 얼마나 칭찬을 하시던지, 너무 보고 싶었어!”
그 순간 나는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어려운 상황에서 마음에 숨통이라도 트임을 느껴보고 싶어서, 양평으로 무작정 달렸던 엄마를 동생과 나는 엄마는 이런 상황에 놀러만 다닌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포장마차 사장님은 엄마가 그렇게 나와서 아무 말 없이 강을 보면서 믹스커피 한잔만 마시고, 딸들이 기다린다고 돌아간다고 했다. 엄마와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먹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나는 겨우 한마디를 건넸다.
“엄마, 그렇게 좋은 곳에 가면서 혼자 가면 어떻게 해? 앞으론 같이 가!”
집으로 돌아오니, 짐으로 꽉 차서 조금이라도 살이 찌면 지나갈 수 없는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고 있는 동생과 나에게 엄마가 웃으면서 말한다.
“너희들 살찌지 말라고 엄마가 짐 다 안 버린 거야! 살찌면 여기 못 지나다니는 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