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gnano, Salerno
6월 10일, 이탈리아어 수업이 종강한 다음 날 우리는 바로 캠핑카를 타고 다시 한 번 남쪽으로 떠났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지난해에 가 보지 못한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였다. 다음 달 17일에 이탈리아 북부의 산속 마을에서 열릴 친한 동생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7월 12일 팔레르모에서 제노바로 돌아오는 배를 예약해 두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한 달.
체류허가증이 예상대로 발급됐다면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을 돌아보러 떠났을 테지만, 체류허가증은 발급될 기미가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여행을 하며 백수로 보내는 시간을 최대 2년으로 정해 두었기 때문에 이번에 유럽으로 나가지 못하면 야심찼던 우리의 여행은 흐지부지 끝나게 될 것이다. 계획보다 훨씬 적게 여행했는데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줄어드는 잔고와 우리의 나이를 고려할 때 그 이상 기간을 늘리는 것은 무리였다. 겨울에는 아르헨티나에 있는 남편의 가족들을 (무려 9년 만에) 만나러 가야 해서 그 비용도 빼 두어야 하고 여행을 마무리한 후 일을 구할 때까지의 월세와 최소한의 생활비도 남겨야 했다.
체류허가증 발급 지연에 대해 문의하면 그냥 기다리라는 답변만 돌아왔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실낱 같은 기대를 놓치지 않은 채 시칠리아로 떠났다. 시칠리아 여행을 마칠 때쯤 체류허가증이 발급되어 결혼식 참석 후에 바로 유럽 다른 나라로 떠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래도 큰 아쉬움 없이 2년의 시간을 마무리할 수 있을 텐데.
일단은 기한이 정해진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최대한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려 했다. 내려가는 길에 시간을 낭비하면 그만큼 시칠리아에서 보낼 시간이 줄어드니까. 그런데 토스카나를 지날 때 남편이 루치냐노(Lucignano)라는 작은 마을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캠핑카 주차장을 찾아냈고, 잠만 자고 떠날 생각으로 간 그곳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이틀을 보냈다.
이 너그러운 마을은 아래로는 넓은 토스카나 들판이 내려다 보이고 주변에는 올리브 밭이, 위로는 마을이 보이는 넓고 전망 좋은 공터와 오수를 버리는 시설, 물과 전기를 모두 무료로 제공한다.
우리는 낮에는 마을의 오래된 골목을 걷다가, 오후 늦게 캠핑카로 돌아오면 풀밭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서 여유를 만끽했다. 한가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이틀째 밤에는 왠지 잠이 오지 않아 차 밖으로 나갔다. 초여름 밤의 선선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까만 어둠을 바라보다 하늘하늘 풀밭 위를 떠다니는 갸냘픈 불빛을 발견했다. 반딧불이였다. 수는 적었지만,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어 바로 알았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한국에서 본 반딧불이와는 생김새가 달랐지만 똑같이 선명한 노란 빛을 꽁무니에 품고 있었다. 하늘하늘 멀어지는 반딧불이를 따라 천천히 풀밭을 걸었던 그날 밤은, 지금도 꿈결처럼 아련한 기억이다.
다음 날, 아쉬움을 뒤로하고 루치냐노를 떠난 우리는 그대로 쭉쭉 달려 로마를 지났다. 그리고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무료 샤워를 제공하는 오토캠핑장을 찾아갔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곳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에스프레소 두 잔을 살 테니 텀블러에 얼음과 같이 넣어 줄 수 있냐는 부탁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얼음을 가득 넣어 주셨던 상냥한 사장님이 계시는 곳. 이번에는 바쁘신 것 같아 그냥 80센트짜리 하드를 사 와서 은행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먹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무성한 잎을 흔들고 있었다. 샤워하고 개운한 몸으로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고 있자니 더없이 만족스럽고 평화로웠다. 이번에 추가로 한 리모델링 덕분에 불편하고 힘든 부분들이 많이 개선되어 확실히 이전보다 수월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하다 보니 늘어서 우리도 나름 캠핑카 여행 베테랑이 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캠핑장 바로 옆은 공사장이거나, 공사 자재를 보관하는 공터거나 해서 보기에 좋은 뷰는 아니었지만 그날 저녁 하늘이 참 예뻤던 기억이 난다. 연한 하늘색 하늘에 뜬 하얀 구름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행복이 얼마나 쉽고 사소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생각했다. 행복을 느끼기란 이렇게 쉬운데,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행복한 순간들을 수집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캠핑카 여행을 하면서, 행복한 순간들을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마주하고 있다고 느낀다. 사실 대부분은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는 평범하고 사소한 행복들이다. 샤워하고 개운한 몸으로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병, 더운 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예쁜 색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같은. 예전의 나였다면 행복하다 느끼지 못하고 놓쳐 버렸을 작은 행복까지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다음 날 그곳을 떠난 우리는 칼라브리아 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폴리 아래 위치한 살레르노에 들렀다. 살레르노의 바닷가 캠핑카주차장은 지난해에 왔을 때 밤마다 덥고 습한 공기와 모기떼의 공격으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곳인데, 굳이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일단 저렴하기 때문이고, 살레르노 도시 자체와 해변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폴리의 다 미켈레 피자였다. 나폴리에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 피자만큼은 간절하게 또 먹고 싶었던 우리는 이곳에 캠핑카를 세워 두고 버스로 나폴리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오로지 그 피자를 다시 한 번 먹기 위해서.
오후 늦게 도착한 우리는 나폴리에는 다음 날 가기로 하고 플라스틱 의자를 가지고 해변으로 갔다. 도로만 건너면 바다였는데 횡단보도가 멀어서 좀 걸어야 했다. 날씨도 더웠고 이번 여행 처음으로 보는 바다가 반가웠지만 그날 오전에 샤워한 게 아까워 수영은 하지 않았다. 앞으로 며칠 동안이나 캠핑장에 갈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깨끗한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고 싶었다. 수영은 칼라브리아에서 하면 되니까, 자신을 다독이며 뜨거운 햇볕 아래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그날 저녁에는 주황빛 분홍빛으로 노을이 내려앉고 커다랗고 하얀 달이 떠올랐다. 바람도 시원해 이번에는 쾌적한 밤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도 역시나 후덥지근한 공기와 사나운 모기떼의 공격으로 잠을 설쳤다. 모기기피제도 소용없는 지독한 모기떼를 작년에 이어 또 만난 것이다. 이 모기들은 이 주차장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나 보다. 당연히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나폴리에 다녀오는 것도 다 귀찮고 힘들게 느껴졌다. 일단 지난해에 구경하지 못했던 구시가지를 걸으면서 기운을 좀 올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살레르노의 구시가지에 다 미켈레 피자집이 있는 게 아닌가? 그 사이에 지점이 생긴 거였다. 틀림없이 피쩨리아 다 미켈레(L'Antica Pizzeria da Michele)인 것을 확인한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주변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12시가 되자마자 첫 손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접한 마르게리따 피자. 작년에 나폴리 본점에서 먹은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감동적인 그 피자였다. 가격도 여전히 5유로. 만세다! 덕분에 우리는 그날 바로 만족스럽게 살레르노를 떠날 수 있었다. 나폴리까지 다녀오는 비용과 수고를 덜고, 주차장비도 아끼고 주차장에서 밤을 기다리는 모기떼들에게도 영원히 작별을 고했다. 생각할수록 신바람이 나는 일이다. 일이 꼬이려면 말도 안 되게 꼬이기도 하지만 풀리려면 이렇게 별 거 아니란 듯이 풀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