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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Oct 06. 2024

시칠리아에서 처음 느낀 낭만

Macari, Mazara del Vallo

  오후 늦게 ‘산 비토 로 카포’의 유로 주차장에서 나오는 길, 왼편으로는 깎아지른 바위산이 저 멀리까지 이어지고 오른편으로는 바다가 펼쳐졌다. 이 마을로 들어올 때는 이미 어둡기도 했고 이 풍경을 등지고 달렸기 때문에 이 길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었다. 해변 근처로 빠져서 차를 세울 수 있는 길이 있어서 차에서 잠시 내려 풍경을 바라봤다. 기울어가는 진한 햇살이 척박한 풍경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전날 ‘산 비토 로 카포’로 오는 길에 발견했던 넓은 공터 같은 무료 주차장을 찾고 있었다. 길 저편에 캠핑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한 남편이 찾아보니 후기가 꽤 좋은 무료 주차장이어서 ‘산 비토 로 카포’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들러보자고 했었다. 이 날 인터넷이 계속 먹통이라 네이게이션을 사용할 수 없어서 못 찾을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여전히 캠핑카들이 모여 있어 다행히 쉽게 눈에 띄었다.


  주차장이지만 공터의 바깥쪽에 붙여서 주차하면 창문을 열거나 밖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앉는 정도는 허용해 주는 분위기라고 하더니, 역시나 도로를 등지고 들판으로 문을 둘 수 있는 좋은 자리는 이미 적당한 간격을 두고 다 차 있었다. 우리는 일단 다른 면의 어중간한 자리에 차를 세우고 혹시 나가는 차가 있는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얼마 뒤 한 아저씨가 밖에 뒀던 의자를 창고에 접어 넣는 것을 발견! "저 아저씨 나가려나 봐." 나는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가서 물어보고 와."


  아저씨는 지금 바로는 아니고 좀 이따 간다고, 여기서 이틀 있었는데 참 좋았다고 하셨단다. 우리는 혹시 아저씨 차가 나가는 타이밍을 놓쳐 그 자리를 놓칠까 봐 바로 캠핑카를 정리하고 운전석에 앉아 기다렸다. 부담스러우실까 봐 일부러 그쪽은 보지 않고 그냥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거셨다. 일찍 나가시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을 보고 차를 앞차와 붙여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신 거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아저씨의 손짓에 따라 우리는 얼른 그 자리에 차를 넣고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그저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아저씨 가족은 한 시간 정도 더 머물다 떠났는데, 우리가 계속 기다리지 않도록 베풀어 주신 친절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예전에 읽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기회가 되면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어 한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캠핑카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이 그랬다.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타인인데, 인사를 하고 짧은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기꺼이 친절을 베풀어 줬다. 우리는 아저씨 차가 나간 뒤에도 우리 차를 앞으로 옮기지 않았다. 앞뒤로 다른 차와 간격을 널널하게 두는 대신에 새로운 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둔 것이다. 그 자리에는 곧 어느 가족의 차가 들어왔고 우리는 남몰래 뿌듯해했다.


 

  며칠 있어 보니 이곳은 떠나기가 아쉬울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비수기라 차가 별로 없어서 안 그래도 넓은 주차장은 더욱 쾌적하고 사방 어디를 둘러 보아도 광활한 자연이 펼쳐지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저녁에는 먼 바다에서부터 산과 들판을 물들이는 노을이 자연 속에서 캠핑하는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처음으로 캠핑카로 시칠리아까지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해변과 주차장을 오가는 무료 셔틀 열차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주차장에서 해변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는데, 이 셔틀 열차 덕분에 뜨거운 햇살 아래 해변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훨씬 덜 수 있었다. 주차장도 무료로 이용하는데 셔틀 서비스까지, 우연히 발견한 곳이 이렇게 좋은 곳일 줄이야. 화장실과 샤워 문제만 해결된다면 여기서 남은 시간을 다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침마다 오는 빵차에서 피스타치오 크림이 가득 들어간 커다란 꼬르네또(Cornetto; 크루아상과 비슷한 이탈리아의 페이스트리)를 사 먹는 즐거움도 이곳의 매력이다.



  여기서 이틀을 보내고, 우리는 이제 캠핑카의 물을 갈아야 하고 샤워도 해야 했지만 떠나기가 아쉬워서 최대한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무슨 일인지 캠핑카가 심하게 흔들려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차가 흔들리는 정도와 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굉장해서 태풍이라도 온 건가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창문을 열어 봤더니 온풍기를 켠 것 같은 뜨끈한 바람이 후욱하고 몰아쳐 들어오는 거였다. 숨이 턱 막혔다. 조심스레 바깥에 나가 보니 공기의 온도와 질감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여름의 더운 공기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텁텁하고 뜨뜻한 공기가 파도가 밀려오듯 압도적인 위력과 풍성함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때가 6월 말, 여름이 시작되어 낮에는 꽤 더웠지만 그래도 밤에는 선선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문을 몰랐다. 뭔가 특별한 현상임이 분명한테 하필 인터넷이 안 돼서 알아볼 길은 없고.. 일단은 위험해 보이진 않아서 다시 잠을 청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었는데도 바람의 강도가 조금 약해졌을 뿐 여전히 뜨뜻한 열기를 품은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황사 같은 황토색 먼지가 차체를 덮고 있었다. 안테나를 고치고 있긴 한 건지 여전히 인터넷이 먹통이라 이게 무슨 현상인지도,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떠나야 할 때이기도 해서 우리는 더 기다리지 않고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네이게이션을 사용할 수 없어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지만 일단 큰 길을 따라 도시를 통과해 이 지역을 벗어났다. 도심속 길가에 세워진 차들도 모두 황토빛 먼지로 뒤덮혀 있었다. 30분 정도 달려 도시를 벗어나니 드디어 신호가 잡혔다. 역시 그 동네만 통신 문제가 있었던 거였다. 인터넷이 연결되자마자 검색해 봤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시로코'라고 하는 시칠리아의 특별한 기후현상이었다. 시로코는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모래 바람으로 한겨울에도 이 바람이 불어오면 며칠 동안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시칠리아는 한여름 최고 기온이 35도 정도인데 시로코가 불면 37~8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면서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한 날씨가 지속된다고. 며칠 동안이나 이어지는 뜨거운 기온과 강한 바람, 모래 먼지라니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싶어 우리는 많이 이동하더라도 시로코의 영향이 최대한 적은 곳으로 피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쪽으로 쭉 내려왔다. 중간에 마르살라에 들러 장을 보고, 계속 달려 남서쪽 해안의 작은 도시 마짜라 델 발로(Mazara del Vallo) 외곽의 오토캠핑장에 도착했다. 이곳을 목적지로 한 것은 그저 이 오토캠핑장이 적당한 가격에 무료 샤워를 제공하고, 코인 세탁기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착해 차에서 내려 보니 여전히 시로코의 존재가 느껴지긴 했지만 벽과 나무 덕분에 확실히 바람이 덜했다. 주인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여기도 어젯밤에 바람이 굉장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호일에 싼 뭔가를 먹어 보라며 주셨는데, 캠핑카로 돌아와 열어 보니 반죽 중간에 잼을 넣어 설탕을 발라 위 아래를 기름에 구운 것 같은 작은 디저트였다.


  시칠리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여행자에게 먹을 걸 챙겨 주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다. 아껴 뒀다가 점심을 만들어 먹은 후에 커피와 함께 먹었는데, 오렌지 향이 나고 달달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는 기운을 내어 밀린 설거지와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샤워도 했다. 이 캠핑장은 저렴한 대신 시내에서 멀어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고 대중교통도 없어서, 주인 할아버지께서 유료로 차를 태워다 주고 데리고 오는 픽업 서비스를 운영하고 계셨다. 한 명에 5유로로 비싼 편이라 고민하다가 심심하기도 하고 바람도 꽤 잦아든 것 같아 오후 늦게 시내로 갔다.



  시내에 내려 큰 길을 따라 걸어보니 일부러 구경할 것까지는 없는 평범한 소도시 같았는데, 아주 오래된 골목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다. 도착해 보니 오래된 골목은 정말 그냥 오래된 골목이었다. 그런데 그 골목에서 이어지는 골목으로 깊이 들어가서 돌아다녀 보니 특색 있게 꾸며진 건물들이 나타났다. 시칠리아 특유의 감성으로 꾸민 골목을 구경하며 즐겁게 걸었다.



  그리고 골목에서 나와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넓고 뽀얀 광장에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과 민트색 돔을 올린 거대한 대성당이 나타난 것이다. 저녁 시간이라 기울어가는 해의 진한 햇살이 광장 전체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켠에 바가 있었는데, 광장의 분위기에 반해 버린 우리는 돈도 아낄 겸 저녁 식사를 포기하고 거기서 아페리티보를 하기로 결정했다. 자리에 앉아 아페리티보 메뉴를 주문하고 아페롤스프리츠를 골랐다. 아페리티보(Aperitivo)는 초저녁 시간에 술을 주문하면 작은 샌드위치나 빵 조각 위에 이것저것 올린 브루스게따처럼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같이 주는 이탈리아의 식전주 문화다. 함께 나온 음식은 특별할 것 없었지만 아페롤스프리츠가 제대로였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달콤쌉싸름한 아페롤스프리츠만한 술이 없는 것 같다.



  아페리티보를 즐기는 동안 광장은 오렌지빛 진한 햇빛에 물들었다가 천천히 푸른 어둠에 잠겨들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에 조명이 켜지고, 테이블 위 무드등과 거리의 가로등이 반짝이며 빛나고, 우리는 시칠리아에 온 후로 처음으로 휴양지다운 여유와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원래 올 생각이 전혀 없었던 곳에서. 계획에 없었을 뿐더러 있는 줄도 몰랐던 곳이었다. 갑작스럽게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면 이곳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에서의 낭만적인 시간은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시로코가 우리에게 준 선물 같았다. 그래, 계획대로 되는 일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떠도는 것도 캠핑카 여행의 낭만이겠지. 그러다가 이런 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잔을 비웠다.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쯤에는, 어느새 뜨끈한 모래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https://tumblbug.com/chomare_italia


첫 번째 브런치북 <낡은 캠핑카로 이탈리아를>을 다듬어 전자책을 제작했어요. 텀블벅에서 10월 27일까지 펀딩 중이니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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