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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Oct 12. 2024

시칠리아에 왔으니까

  


  이쯤 해서 지도를 보자. 우리가 덧없이 이동만 한 경로가 확연하다. 우리는 서쪽 끝까지 거의 갔다가 이제 예정보다 빨리 남쪽으로 한참 내려와 있었다. 이대로 남쪽 해안을 따라 천천히 돌면 가장 좋겠지만, 이번 여름에는 가족처럼 아끼는 친한 동생 커플의 결혼식이 이탈리아에서 열릴 예정이라 7월 12일에 돌아가야 했다. 남쪽으로 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돌아갈 때는 팔레르모에서 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멀리 가지 않고 최대한 서쪽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오토캠핑장의 주인 할아버지께 어디가 좋을지 여쭤 봤더니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가 볼 만한 곳이 한 곳 있다고 하셨다. 셀리눈테(Selinunte)였다. 


  셀리눈테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식민 도시로, 기원전 7세기 고대 그리스 유적을 볼 수 있는 고고학 공원이 있다. 신전이 많지 않고 띄엄띄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셔틀기차표도 같이 사는 것이 좋다.(입장료 6유로, 셔틀기차 6유로) 카르타고의 공격으로 거의 다 파괴되어 볼 게 많지는 않지만 유명한 아그리젠토보다 더 오래된 유적이다. 우리는 보통 입장료를 내야 하는 곳은 패스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아그리젠토에 가지 않을 생각이라 표를 샀다. 이날은 엄청나게 더운 날이었다. 셔틀기차가 있어도 중간에 걸어야 하는 구간이 있어서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 달궈졌다. 너무 더워서 그냥 바다에나 갈 것을 왜 여기에 왔나 살짝 후회가 되었지만 그리스 신전을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함에 들뜨기도 했다.



  지금은 빚다 만 도자기 같은 색을 띠는 이 신전들의 벽, 기둥, 지붕 모든 부분이 다채로운 색으로, 무늬로, 그림으로 칠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박물관에 복원한 이미지가 있는데 너무나 화려해서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예술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오히려 과거보다 퇴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마지막 신전으로 가기 위해 셔틀 기차를 탔다. 가장 오래된 신전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있었다. 이곳은 공격을 심하게 받았던 탓에 형편없이 허물어져 한쪽 면의 기둥만이 남아 있었다. 그 주변의 주거지도 모두 파괴되어 돌무더기가 흩어져 있는 공터에 불과해 보였다. 그 오래된 폐허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밝은 하늘빛의 바다는 그때 그대로일 텐데, 인간의 삶이 덧없게 느껴졌다. 



  우리는 원래 아그리젠토(Agrigento)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예정에 없이 셀리눈테까지 내려오고 보니 거리가 꽤 가까워져 가 볼만 하다 생각했다. 게다가 아그리젠토 바로 전에 스칼라 데이 투르키(Scala dei Turchi), 계단처럼 생긴 새하얀 절벽이 있다는 사실도 우리의 마음을 끌었다. 시칠리아까지 왔으니까 유명하고 아름다운 걸 좀 보고 싶었던 마음. 그 절벽 위에는 오토캠핑장도 있어서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스칼라 데이 투르키(Scala dei Turchi)는 '터키인의 계단'이라는 의미다. 계단처럼 보이는 하얀 절벽. 이탈리아에서 '데이 투르키(dei Turchi)'라는 이름이 붙은 해변은 예전에 튀르크족이 침입해 온 곳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이름이 붙은 곳은 보통 해변이 아름답다는 사실. 그런데 이쪽 지형이 해변으로 가려면 계단을 엄청나게 내려가야 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간 후에 바위가 듬성듬성 드러나 있는 해변을 한참 걸어야 했고, 그렇게 터키인의 계단까지 갔더니 출입 금지. 허허. 안전상의 이유로 올라가지 못한단다. 아쉬운 대로 새하얀 절벽이 보이는 그 부근에서 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앞 해변은 완전히 온갖 징그러운 해초 천지의 얕은 해변이어서 그걸 다 헤치고 밟고 200m 정도 가야 바위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뭐든 실제로 보면 인스타에서 보는 것과 다른 법. 



  하지만 터키인의 계단은 정말 가 볼 만한 곳이다. 푸른 바닷물 위로 길게 누운 절벽이 반질반질 새하얗게 빛나서,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한다. 해초가 있는 구간은 정말 끔찍하지만 그곳을 벗어나서 바위 위로 올라가면 거기부터는 깊고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에메랄드빛 물에 풍덩 뛰어 들어 하얗게 빛나는 절벽을 바라보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오후 늦게 오토캠핑장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전망대에 가기 위해 해가 질 무렵에 절벽 위 도로를 따라 걸었다. 전망대에 도착해 보니 저녁에 관리인이 없을 때를 틈 타 사람들이 터키인의 계단에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도 갈까? 여기까지 왔는데 터키인의 계단에 올라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 순간 들었지만 우리는 하지 말라는 건 못 하는 소심이들이다. 우리는 그저 전망대에 서서 노을에 물드는 하얀 절벽을 오래 바라봤다. 이 풍경을 오래오래 기억에 담아 둘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날 우리는 아그리젠토로 갔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유적지로, 가장 오래된 유적은 아니지만 규모가 워낙 크고 이후 로마시대에도 사용된 덕분에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유명한 곳이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아닐까 싶다. 그 전에 갔던 셀리눈테가 변함없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유적이 주는 심상이 있었다면, 아그리젠토는 까마득한 과거의 유적과 현재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겹쳐지는 풍경이 특별한 곳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폴란드 조각가 Igor Mitoraj의 작품도 인상적이다. 청동 이카루스 동상이 하늘에서 막 추락한 듯한 모습으로 신전을 배경으로 누워 있는데 실제로 보니 더 아름답고 신비롭고, 마치 그리스 신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를 다 그곳에서 보내고, 앞으로 그리스에 보더라도 여기서 그리스 유적을 실컷 봤으니 됐다 싶은 마음으로 우리는 아그리젠토를 떠났다. 동쪽으로 수는 없고 근방에는 무료로 곳이 없어 일단 셀리눈테의 무료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이제 돌아갈 날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 남짓, 남은 시간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낼지 고민이 깊어져갔다.



 



https://tumblbug.com/chomare_italia


첫 번째 브런치북 <낡은 캠핑카로 이탈리아를>을 다듬어 전자책을 제작했어요. 텀블벅에서 10월 27일까지 펀딩 중이니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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