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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쉴만한 물가 Nov 25. 2024

내일 걱정은 내일로

오늘만 살아보자  

 결혼 후 남편 작장 근처에 터를 잡아 7년 동안 출산과 양육에 몰두했다.

 두 아이의 영유아기를 가열차게 보낸 이곳 오산은 아이들에겐 고향, 서울토박이인 나에게도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이사를 앞두고 양가부모님이 멀리 계셔 도움받을 곳 없어 혈혈단신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런 아쉬움과 애틋함을 뒤로한 채 앞이 흐려 보이지 않는 첫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새로 이사한 곳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혁신도시였다.

기러기생활은 할 수 없다는 남편을 따라 이사한 곳은 이제 막 입주하는 새 아파트들이 즐비한 신도시였다.

서울의 공기업들이 혁신도시로 이전한 탓에 고층 건물들과 새 아파트들이 줄지어 들어서있었다. 

새 아파트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화이트 톤으로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지만 왠지 불편했다. 

"집이 이렇게까지 밝다고?" 

당장 생활비 걱정에 침울했던 나의 현실과 남향 거실 뻥뷰의 18층 전셋집 사이의 괴리감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공대생이었던 남편은 연구실에서 과제를 수행하며 연구비 명목으로 월급처럼 고정적인 수입을 받아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네 식구의 생활비로는 부족했다. 생활비 걱정에 잿빛이 되어가는 나에게 대리운전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마련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던 그였지만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논문과 씨름하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하고 있을 때쯔음 퇴근하는 남편의 얼굴이 잿빛이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예상치 못한 일이 있어. 건강보험료가 20만 원이 넘게 나왔어."

퇴근하며 들어온 남편의 손에는 20만 원이 넘는 건강보험료 고지서가 들려있었다. 

생활비를 최소로 줄여야 했던 우리에게 20만 원은 큰돈이었다.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 간의 간극이 이렇게 클 줄 우리는 몰랐다.

예상치 못한 큰 금액의 고정비에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내가 뭐라도 해야 했다. 


몇십 만원씩 하던 아이들 유치원비용도 부담이라 몇 달 후면 초등에 입학하는 큰 아이는 몇 달만 데리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둘째는 가야 했기에 유치원 몇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이사오기 전에만 해도 커리큘럼이 좋다는 유치원을 고심하며 골라 국가지원 외에 수십만 원을 추가 지불하면서 보냈었지만 지금은 찬밥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 현실에 가. 성. 비. 그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몇 군데 전화문의를 해보니 이전 동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유치원이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고민 없이 두아이의 입학을 결정했다. 아이들이 몇 개월이라도 잘 적응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이제 아이들 원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일을 찾아야 했다. 


아이들이 오후에 돌아오니 풀타임 근무는 불가능했고 파트타임 혹은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7년 동안 자기계발이라던지 나를 돌보는 일은 뒷전이었기에 일을 구하려니 막막하고 위축되었다. 어디에서 나 같은 아줌마를 써줄까 싶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열심히 잡코리아를 뒤지던 중 카페 알바모집공고를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나에게 맞춤이었다. 오전 10시~오후 4시 근무면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에 딱 맞춰 데리러 갈 수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카페 알바 공고보고 연락드려요."

" 네~ 우리가 이틀뒤에 오픈인데 원래 하기로 했던 사람이 사정이 생겨서 못하게 돼서 바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을 구하고 있어요. 지금 면접 보러 오실래요?" 

" 네, 바로 갈 수 있어요"

그날 바로 면접을 보고 다음날부터 투입되어 오픈준비 및 교육을 받게 되었다. 오픈조라 본사에서 교육 담당자가 파견 나와 교육을 해주었다. 


10여 년 전 카페 알바를 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커피문화가 참 많이 바뀌었다. 

휘핑크림을 듬뿍 올린 비엔나커피, 초콜릿을 직접 칼로 깎아 카페모카를 만들던 시절과는 달랐다. 

원두 적당량을 갈아 지그시 눌러 템핑해야 했고 우유를 스팀 하는 방법에 따라 라떼의 맛도 완전히 달라졌다. 커피를 즐기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하나씩 배우고 맛보며 출근하는 삶은 나에게 활력을 주었다. 

나보다 열 살 위 여사장님은 아이 셋을 키우는 선배맘이기도 했다. 우리 아이가 아프거나 급한 일정이 생기면 시간을 조정해 주시며 배려해 주신 덕에 남편이 학위를 취득하는 2년 동안 몸은 고되어도 마음 편히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남편이 학위를 위해 직장을 그만뒀을 때, 남편 해외출장 중 혼자 두 아이들 데리고 원주로 이사해야 했을 때, 월 수입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막막함에 밤잠을 설쳤고 속으로 끙끙 앓다 위장병을 얻어 병원에 다녔던 몇 달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원주에서의 2년을 돌아보니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감사한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뛰어든 생활전선에서는 뜻밖의 좋은 인연을 만나 보듬어 주시는 따뜻한 배려를 배웠고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이 부족하다며 툴툴거렸던 내가 반도 안 되는 돈으로도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살아지는 경험도 했다. 


우리의 생각 속에 걱정과 염려가 차지하는 일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일 때가 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대책을 세우려고 끙끙 앓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될 때도 있다. 

원주에서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두고 오늘의 나는 지금 현재에 충실하면 좋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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