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의 사이 벽을 마주하다
서울에만 가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캠퍼스의 낭만에 빠져 한창 놀았던 1학년 시절을 제외하면 줄곧 좋은 성적을 유지했기에.
인 서울 대학에 다니는 교회 선배들이 주말마다 토익시험, 각종 자격증 취득에 면접 스터디까지 하며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리는 모습은 마치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 같았다.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이제 한 달만 고생하면 나도 서울에서 살 수 있겠구나”
눈앞으로 다가온 지방민 청산 기일을 손꼽으며 지낼 즈음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취업 소식이 들려왔다.
교회에 한 커플은, 오빠는 쌤송, 언니는 공기업 비서실에 합격했고, 이 권사님네는 입사 축하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인재를 우리 회사에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문구와 함께.
권사님 부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해왔다.
나도 지금 백수인 건 아니었다. 아직은 일을 하고 있었다.
선아 씨에게 인수인계 중이었고, 차곡차곡 사무실의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백 팩 둘러메고 머리 질끈 동여 멘 수험생 같던 취준생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교직원 자리 들어가기가 어렵다는데 좋은 데서 일한다며 부러워했던 교회 언니는 공기업 비서실에 합격하자 신상 루이백을 들었고 실내에서도 채널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고 다녔다. 그녀의 얼굴은 한주가 다르게 번들번들 윤이 돌았고, 5:5로 가르마로 옹졸해 보였던 헤어스타일도 브랜드 미용실의 힘으로 우아하게 거듭났다. 그들은 취업과 동시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한 달 전의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러웠다는 듯.
그즈음부터였을까, 서울 생활에 대한 부푼 기대감은 밀려오는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알처럼 흩어졌고 불안이라는 감정이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두어 달이 지난 때에, 성북동 사모님이 저런 모습일까. 취업에 성공한 그들의 표정에 여유가 묻어났다.
부지런히 쫓아가야 했다.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짐칸일지라도 그 열차에 탑승해야 했다.
잡코리아와 사람인을 뒤져 웬만한 곳에는 다 지원했다.
1차 서류심사 광탈. 을 몇 차례 경험하고야 현실의 벽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중소기업에선 아직 받아준다.
사람들도 무난하고 일도 어렵지는 않은데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렵다. 내 삶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수개월 만에 퇴사하기를 몇 차례.
나는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며 사는 사람이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경리업무, 사무업무를 하며 삶의 의미를 찾기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
20대 중후반.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도 빠르지 않을 나이지만 나의 방황은 멈추지 않았다.
의미 있는 일을 찾겠다며 고민만 할 수는 없어 아르바이트라도 구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패션업계였다.
면접관으로 처음 만났던 과장님은 직장을 구하지 않고 아르바이트하는 날 의아해하셨다.
나의 주 업무는 본사에서 전국에 있는 매장으로 보낼 상품의 수량을 결정하는 일.
매장마다 규모도 다르고 잘 나가는 상품도 달랐기에 판매량과 매출을 고려해 매장에 필요한 물건을 보내는 일이었다. 알바가 하는 일치 곤 꽤나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평소 패션에 관심도 있어서 신상품을 제일 먼저 받아보는 이 일이 재미있었다.
회사는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야근이 문화인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5시 정각에 “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라고 외치면 직원들은 “벌써 다섯 시야?” 라며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인사해 주었다. 5시 7분. 도착하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퇴근하는 삶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10개월 정도 일했을 때 같은 회사 매출 1위 브랜드에서 러브콜이 왔고 좋은 조건으로 브랜드 이동을 했다.
1년 반 정도 근무했을 때는 7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 결혼도 하게 되었다. 친지 가족들 회사 동료들의 축하 속에 치러진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더없이 달콤했다. 남편 직주근접인 경기도 외곽에 신혼집을 얻어 출퇴근했다. 근퇴 시간이 길어지긴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여유로운 휴식을 갖고 있을 때 본부장님이 나를 보자 신다. 그녀와 내가 단둘이 마주 앉은 건 1년에 한 번 우리가 계약서를 작성할 때였다. 우리는 기다란 회의실 테이블을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당시 캐주얼 1등 브랜드였던 우리 브랜드의 본부장님은 쇼트커트에 10원 한 장 허투루 쓰지 않을 것 같은 매서운 분위기를 가지신 분이었다. 둘이 마주 앉은 적막한 공간에는 커다란 회의실 시계만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내 눈을 쳐다보지 않으셨다. '뭔가 이상하다.'
한숨을 길게 내 쉰 본부장님이 드디어 입을 연다.
“ 희선 씨, 그동안 너무 고마웠는데 이제 출산도 해야 할 테고, 윗선에서 얘기가 잘 안 되었어.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 ”
그렇게 하루아침에 뱃속에 첫째 아이를 품고 비 자발적 경단녀가 되었다.
후일담을 쓰자면 아기 낳고 3개월쯤 뒤, 다시 나와서 일해줄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다.
"아뇨, 저 애기 봐줄 사람 없어서 못해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한 순간.
이제 내 이름으로 사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