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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미세뷰 Feb 08. 2021

잘가라, 오랜 인연아!

생선 가시같이 발라내 버려야 하는 필연적 인연

설날 대목이 다가와 몇몇 고마운 분,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집 앞으로 종종 선물을 보내곤 한다. 

그중에서 튀기고 구어야 하는 과정에서 냄새가 배고 귀찮아 여간해선 먹기 싫지만,

누가 또 해주면 잘 먹는 게으름뱅이.


우리는 조기의 붙어 있는 살이 적든 많든 그것을 먹기 위해 목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가시를 발라낸다. 

아니 발라내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구멍에 상처를 낼 수 있으니까.


30대가 된 나는 인간관계도 그러하다 느꼈다. 인생에서 내 건강한 관계에 상처가 될 것 같으면 가차 없이 그 관계는 발라내야 한다. 내가 가진 인간관계가 적든 많든 불필요한 인간관계는 없애 버리는 것이 맞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나는 좁은 인간관계를 지향하기에 대인 관계가 넓지도 않다. 


따라서 오래된 인연이 계속 가능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관계를 끝낸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큰 아픔이다. 한 명의 친구라도 오래 숙성되고 알찬 관계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이번에 15년 알고 지내는 친구를 냉정한 나도 끊어 내기 상당히 어려웠다. 


항상 성격상 경계심이 많아 누굴 사귀는 것도 어려워하고, 내 울타리 안에 그들을 들여주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사람’이라 여겨지면 나름 잘하는 타입. 또한, 내 사람이라 칭하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주어진다. 여기까지 들어온 사람은 내 기준에 충족했다는 것이고, 그만큼 까탈스러운 내 성격과 가치관에 부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하는 것, 가치관, 행동에서 애초부터 안 맞는 사람은 친한 변두리에 잘 두지 않는다.


하지만, 나름 잘 솎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오판이었나 보다. 인생은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맞는데 그게 친구일 줄은 몰랐다. 처음에 맞았을 때는 뒤통수가 너무 얼얼해 심적으로 힘들었고, 이내 얼마나 충격이 심했는지 몸져누웠다.


사건의 발단은 집순이인 내가 오랜만에 나와 놀고 있을 때,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친한 친구는 자신이 남자친구에게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터지는 눈물 때문에 숨소리도 고르지 못해 보였다. 


무엇보다 안정이 필요해 보이는 그녀에게 쉽사리 ‘네 잘못’ 같은 소리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래서 숨을 크게 쉬라며 조언하고, 나름대로 잘 토닥이며 전화를 잘 마무리 지었다. 


평소에는 남자친구 덕에 연락도 잘 안 했지만, 이별 징조가 보이면 끊임없이 전화나 카톡을 하는 부류도 잘 걸러야겠다고 이번기회를 통해 다짐하였다. 당장 자신을 만나러 와줄 수 없느냐 물었고, 지금 만나는 그 친구와 언제 헤어지는지 내내 물어보며, 저녁에도 만날 수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다음 날까지 회사 앞에 찾아와 자기 힘든 얘기 좀 들어 달라고 하며, 계속 징징거렸고 실제로 만났다. 하지만, 이 또한 우정이 일환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아량을 품고 넘어갈 일이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기댈 곳이 어디 많은가. 결혼까지 약속한 남자친구와의 헤어짐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이별 얘기는 또 오래된 친구가 들어줘야 제맛이고, 슬픔이란 감정도 배가 되어 감정의 배출구로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회사 앞 레스토랑에서 친구를 만났고 그날 들은 이야기로 너무도 정이 떨어져 버렸다. 

아니, 그냥 인간의 탈을 쓴 네가 가증스러웠다.


이야기인 즉슨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재작년부터 유부남을 만났고, 두 번 정도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한번은 물론 가정이 있는 남자였기에 퇴짜를 놓았지만, 두 번째 받아 줬다고 한다. 유부남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고, 내 친구였던 인간도 제대로 돌아버린 것 같다. 어쨌든 사내에서는 자신의 카톡을 본 직원들이 수군거리며 욕을 했고, 이와 같은 소문이 커지고 커져 윤리징계위원회에 끌려가서 조사도 받았다고 한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갑자기 왜 때려치우며 공기업 취업 준비를 하나 했더니, 자긴 아니라고 하지만 이 연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을 거다.



유부남을 좋아한다고 얘기했을 땐, 이 인간의 정신 상태가 심히 이상해 보여 되도록 안 만나려고 했었다. 그때부터 명목상 친구였는데 재 작년부터 이걸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니. 내 도덕적 레이더망에 안 걸린 게 후회스럽다. 추태를 부리고도 사내에서 남자친구를 만든 모양, 그분이 그녀의 도덕적 결함까지도 감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다시 유부남의 연락을 받아들였고 그쯤에서 남자친구와 관계가 시들해질 때쯤 헤어질 것 같다며 나한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자신의 가장 깊숙한 이야기까지 드러내서, 나를 진정한 친구로 여긴 것인지 그 이후로 카톡으로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 지는 공부하느라 널찍한 게 시간이겠지만, 직장인인 나는 받아 주기 힘들었고 이미 그 이후로 마음속에서 그 애를 친구라고 여기지 않은 게 확실했다. 가장 마음에 와닿은 조언은 ‘너와 걔의 연인은 딱 거기까지 였다고, 더 좋은 추억 망가지기 전에 보내줘’라는 것이었다. 물론 완전히 맞는 말이었다. 


망설이는 데 이틀이 걸렸지만, 끝내 나는 카톡으로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절연을 선언했다. 나는 유부남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람과는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적은 메시지를 보냈고, 걔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모든 연락 수단을 차단했다.


그래, 그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 것이었다. 후회한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학창 시절의 추억이 있었고, 좋은 여행지에 놀러 갔었 어도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하고 계속 친구로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걸 알게 된 이상 예전과 같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죽마고우로는 못 지낼 테니까.


속된 말로 내 안에 있는 구한말 선비가 그녀를 볼 때마다 앵무새처럼 나쁘다고 말하는 데 자신 있게 얼굴은 못 쳐다보겠다 싶었다. 거기서 다시 나의 팽팽한 이성의 끈이 돌아온 것을 느꼈다. 그래서 단칼에 관계를 끊을 수 있었다.


이게 나를 위해서 최선이라 생각했다. 어찌 보면 아까운 관계였고 인연이었다. 하지만, 언젠간 끊어내야 할 사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15년의 세월이 아깝지 않다. 더 나이를 먹고 세월이 쌓여 그때 알아버렸을 때보단 일찍 안 것이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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