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른고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아오 Aug 09. 2020

짧은 머리 이야기

나 혼자만 잘생김 충전하러 갑니다.

"야 너는 무슨 머리가 10년이나 자라질 않냐" 오랜만에 본 동창이 그런 말을 합니다. 넓은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앞머리, 엣지있게 다듬은 옆라인, 그 라인을 따라 떨어지는 짤막한 구레나룻. 정점에 있는 윗머리는 왁스나 젤을 발라줘도 크게 달라질 게 없죠.


얼마 전엔 이런 적도 있어요. 한 식당에 들어서자 직원분이 다가오시더라고요. 코로나 때문에 체온을 재시려는 건가? 했는데 "군인은 50% 할인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이럴 땐 강한 부인을 하기도 이상해서, 그냥 결제할 때 군인이 아니라고 조용히 말씀드립니다. 택시기사님들이 "우리 아들도 군대에 있어~"라고 하실 때가 가장 애매하죠. 전역한 지 만으로 8년째라 군대가 얼마나 바뀌었을지 감이 안 오거든요.


군인들이 전역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 중 하나가 머리를 기르는 일이에요. 저는 전역할 때 해병다운 멋을 내보겠다고 돌격머리를 하고 전역한 터라 두 달이 거진 다 되어서야 미용실에 갔죠. 그리곤 처음으로 머리에 거금을 썼어요. 몇만 원 하는 그냥 다운펌이 아니라 15만 원 족히 넘는 아이롱 다운펌. 그 뒤론 이상하게 2주에 한 번씩 자르게 되더라고요. 머리가 조금 길면 제가 답답해서요.


미용실은 10년 동안 세 곳만 다녔어요. 지금이야 '바버샵'에서 짧은 머리도 멋있게 만들 수 있지만 예전에는 짧게 머리를 자르면 못난 두상이 그대로 드러나거나 '반삭'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거든요. 그래서 동네에 한 곳, 예약이 꽉 찼을 때를 대비해 옆 동네에 한 곳, 그리고 서울 중심에 한 곳. 그렇게 세 곳만 다녔습니다.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렇게 고심해서 잘 자른 머리는 친구들한텐 그저 군인 같은 머리이지만, 재밌게도 제 얼굴 생김새와 맞물려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어줘요. 캐주얼하게 입으면 앳돼 보이기도 하고, 편하게 입으면 스포츠맨 같기도 하고, 셔츠를 입으면 깔끔해 보이기도 하고요. 물론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요. 이런 상황에 맞는 이미지가 첫인상에서 신뢰를 주는 것 같아요. 


2년 정도 창업을 목표로 개인 프로젝트에 몰두한 적이 있어요. 낮에는 천안에서 회사를 다니고, 퇴근하면 서울로 올라가 동종업계 사람들을 만났죠.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마주했는데, 이메일이나 메신저 한 통으로 만나서 첫인상만으로 협업을 한 적이 굉장히 많거든요. 지금은 창업에 실패하고 다시 취업을 해서 회사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직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어요. 공백 기간도 있었고, 전공에서 살짝 다른 분야로 업무를 맡아서 사실 기술적으로는 굉장히 부족해요. 그래도 선배들이 프로젝트든, 보고서든 항상 제 의견을 반영해 주시는 게 '아 내가 신뢰를 받고 있긴 하는구나.' 싶더라고요. 보여드린 게 별로 없는데도 신뢰해주셔서 항상 감사할 따름이죠.


이렇게만 보면 이 짧은 머리 이야기가 자만심 가득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나를 신임한다'고 여김으로써 자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겨요. 두려운 게 줄어들고, 해보려는 의지가 생기고. 무엇보다 힘들어서 우는 횟수가 굉장히 줄어들더라고요. 중학교 때 선생님께서 "요한이에겐 눈물의 향기가 있어~"라고 하실 정도로 울보였거든요.


한 2년 전쯤 가장 힘든 시기를 맞닥뜨렸어요. 직장은 그만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압류가 들어올 상황까지 모든 게 겹쳤었죠. 눈물부터 핑 돌더라고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상황을 수습하고, 제일 먼저 머리를 자르러 갔어요. 그분들께 바른 행동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약속드렸거든요. 서둘러 사회에 복귀하기 위해서 초췌해진 몰골을 가장 싸고, 쉽고, 빠르게 케어할 수 있는 게 이발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장 힘든 시기로부터 가장 열의를 가진 시기로 전환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침대에 앉아 치킨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행복을 누리며 살죠. 이따금 미용실에서 머리를 반쯤 잘랐을 때 거울을 보면 '내가 잘생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입 밖으론 내뱉지 않으니 이 정도 자신감은 괜찮겠죠? 이렇게 저는 이 주에 한 번씩 미용실로 나 혼자만 잘생김 충전하러 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망의 소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