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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Jan 26. 2023

양파를 썰다가 양으로 승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파스타 집에서 일을 시작한 지 벌써 6주. 쉽사리 적응하지 못해서 때려치울까를 수십 번 고민했지만 어느덧 일 인분에 가까이 0.8인분 정도를 해내고 있다.




설 명절이었다. 우리 가게는 설 당일 하루만 휴업을 하고, 다른 날은 모두 정상영업을 하기로 했다. 명절에 누가 양식을 주문하겠어, 가만히 있어서 한식-전이 생각나는 날인데 말이야.


그런 생각은 모두 착각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파스타 주문이 이어졌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단체주문이 아예 없고 모두 메뉴 1~2개만 주문하는 손님들 뿐이었다.


주문서를 보면서 자연스레 '명절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피차일반. 나 역시 명절 당일을 제외하고는 출근은 하는 마당에 남을 측은하게 여길 겨를이 없었다.


가족들을 만나 잠깐 설 기분을 내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빨간 날이지만 출근이 당연한 요식업이기 때문에 한편으론 직장을 다닐 때의 삶이 그리웠다.




설 다음 날. 빨간 날이다. 사람들이 명절 내리 배불리 먹었는지 주문이 통 들어오지 않았다. 오전 10시 30분에 오픈해 12시까지 평소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나는 매출이었다.


나는 직원이기 때문에 조금은 감사와 여유라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쉬엄쉬엄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데 주문이 띠링, 그리고 다시 띠링,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또 띠링, 울렸다.


어라? 연속으로 세 개가 들어오네?


오산이었다. 띠링! 띠링! 띠리리리리띠링! 주문이 계속해서 울렸다. 재료를 손질하던 손을 멈추고 급하게 조리 보조를 했다. 14시까지 쉴 틈 없이 주문을 소화했고, 평소의 고작 3분의 1 수준이었던 매출이 순식간에 평소 수준으로 올라왔다.


설에 무슨 파스타야!


그날 저녁은 난리였다. 식당에 취직한 지 6주 만에 최고 매출을 달성했다. 설날엔 한식만 먹는 게 아니라, 그냥 음식을 많이 먹는구나. 귀성길에 지친 사람들이 손하나 까딱하지 못해 뭐라도 주문해 먹는구나. 문을 닫은 식당들이 많기 때문에 주문이 몰린 이유도 있을 터이다.


그렇게 마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퇴근을 했다. 오늘 양파를 얼마나 썰은 거지?




연휴 다음날. 어제의 주문량이 그대로 이어졌다. 오전부터 파스타를 찾는 사람들. 기름 가득한 전만 먹다가 양식이 떠오른 것일까. 게다가 술을 적잖이 드셨는지 해장 파스타가 그렇게나 잘 팔렸다.


양파를 썰고, 또 썰고, 썰어두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다시 썰고. 양파지옥에 빠졌다. 모든 파스타에 양파가 들어가기 때문에 소진이 너무 빨랐다. 평소보다 두 배가 넘는 주문량을 감당하면서 양파도 두 배로 썰어야 하니 내가 파스타집에서 일하는지 양파집에서 일하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퇴근 시각이 가까워질 무렵, 다시 양파가 바닥이 났다. 퇴근은 하고 싶지만 이대로 간다면 남아있는 직원이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리나케 양파 한 망을 뜯어 껍질을 벗기고 도마 위에 양파를 올렸다.


다다다다다!


도마 위에 양파, 양파 위에 날으는 식칼. 양파를 써는 속도가 급진적으로 빨라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요식업이 손에 맞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렸는데 웬 걸. 양파 지옥에 빠진 양파 썰기 달인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손이 이렇게 빨라질 수 있다니.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나 경쾌해 신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20분을 더 근무하면서 양파를 썰어댔지만 지치기보다 오히려 신났다.




존경하는 사업가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양적팽창은 질적전이로 이어집니다. 사업을 잘하고 싶다고요? 일단 많이 해보세요. 그러면 질도 올라갑니다."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앉아 일을 진득이 해보는 것. 어떤 일이든 잘하는 경지에 오르려면 그만큼 시간도 누적되어야 한다.


조금 더 빠른 길이 있을지 언정,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책을 많이 읽으면 속독이 가능하고, 운동을 많이 하면 몸매가 가꿔지고, 공부를 많이 하면 어느 수준의 성적을 얻을 수 있고, 일을 오래 하면 합당한 인정을 받는다.


양파 썰기도 마찬가지였다. 식칼이 어려웠던 이유는 단 하나, 많이 해보지 않아서였다. 요식업이 맞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건 잠시 미뤄둬야겠다. 고작 6주 만에 판단하기엔 너무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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