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아오 Jul 14. 2023

자만하다 데이터 몽땅 날린 썰

외장 하드를 컴퓨터에 연결하자 메시지가 떴다. "이 디스크의 볼륨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노트북에 연결해도 마찬가지였다. 꿈이길 바랐다. 사업 2년 만에 디스크 하나로 멘털이 털릴 줄야.




불과 2년 전만 해도 데이터센터의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서버를 24시간 상시 가동해야 했기 때문에 서버를 이중화도 해놓고, 데이터는 별도로 삼중사중 백업하기까지 했다.


한 번은 임시로 구축한 서버에서 AI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데이터를 모조리 삭제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파트너사의 한 직원 분이 자신들의 Tool을 설명하다가 실수로 Delete 했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이건 타짜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완숙한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뇌가 판단하기도 전에 손이 습관처럼 움직인다.


그 직원 분도 그랬다. 늘 테스트 서버만 다루셨기 때문에 삭제든 뭐든 마음껏 시뮬레이션하셨다. 하지만 이때는 달랐다. 서버에는 무려 4개월치의 방대한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었다.


하필 DB(Data Base)를 이용하는 Tool이라니. 현장엔 열댓 명이 있었지만 누구의 입도 그분의 손보다 빠를 수 없었다. 뇌가 '아차!'라고 느꼈을 땐 이미 벌어진 후였다.


DB에 저장된 4개월치 Data가 날아간 뒤 꼬박 일주일을 회사에서 보냈다. 회사 생활 11년 만에 처음이었다. 퇴근을 하지 않는 게, 그보다 출퇴근 구분 없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게 뭔지 알았다.


집에 씻으러 갈 때는 새벽 4시였다. 그리고 아침 8시면 다른 유관 서버들을 수색하며 Data를 모았다. 그 후로 지독하게 백업을 신경 썼다. 다시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퇴사를 하고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이 되어 가니 나름대로 자료가 쌓인다. 1TB 용량의 외장 하드디스크에는 업무 자료뿐만 아니라 매출, 세금 서식까지 꽉 채워졌다.


다행히 비싼 서버를 구축하지 않아도, NAS를 도입하지 않아도 Web클라우드를 이용해 자료를 충분히 백업할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러다 한 달에 한 번씩.


"이 디스크의 볼륨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메시지 창이 뜨자마자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백업을 그렇게 신경 썼으니 중요한 자료는 모두 있을 터였다. 클라우드에 없어도 중요 자료는 카카오톡과 노트북 내장디스크에 복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4월 이후로 사업 자료들이 보이지 않았다. 클라우드에도, 카카오톡에도, 내장 디스크에도 말이다. 혹시라도 있을 법한 메일함이나 다른 USB를 탐색했지만 없었다. 아무 곳에도.




두 달 전, 부업으로 일하던 파스타집을 퇴사했다. 두 번째 사업도 성수기가 다가와 준비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니 각오와 딴판이었다. 나는 한껏 해이해져 있었다.


주기적으로 하던 백업은 물론이고 제품관리도, 공부도 미뤄두었다. 바쁠 때는 바쁘니까 더 꼼꼼하게 일정과 업무를 챙겼다. 지금은 여유가 있으니 정신까지 여유를 부렸다.




동종업 대표님들께 데이터가 몽땅 날아갔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전화가 걸려왔다. 나보다 다섯 살은 더 젊은 분이다. "형님 잘 지내세요?"


이걸 잘 지낸다고 해야 할지. 까마득해. 어쩌지? 그런 말은 숨기고 냉큼 "그럼 잘 지내지~"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내 사태를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 한껏 위로해 주셨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위로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략을 전수받았다. 수면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한 결과라고 한다. 피곤하지 않냐는 물음에 "이제야 사업하는 것 같아서 진짜 재밌는걸요" 그야말로 우문현답.




디스크는 복구해 보고 있다. 100% 성공할 수 없어도 일단 시도는 해본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5월부터 자료들을 다시 수집하고 정리하면 된다. 물론 과거처럼 며칠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도 이제야 사업을 하는 것 같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깨지는 상황을 드디어 겪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채찍을 맞아서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 102권을 팔고 17만 원 받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