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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03. 2016

우리 욕망의 주체는 누구일까?

[서평] 그레구아르 들라쿠르의 소설 <개인주의 가족>

“미워도 다시 한 번!” 학교에서 숙제로 가훈을 적어오라고 했다는 딸아이에게 박찬욱 감독이 적어 준 가훈이라는 얘기를 듣고 웃음을 머금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화내고 싸우고 미워해도 결국 화해하고 다시 보게 되는 가족의 의미를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 우리는 흔히 가족을 피붙이(살붙이)라고 한다. 때로 내 몸의 피부처럼 살갑게 느껴지고, 싫다고 해서 떼어낼 수도 없는 존재. 우리는 직업을 바꾸거나 배우자를 바꾸거나 하다못해 얼굴까지 바꿀 수도 있지만 가족만은 바꿀 수가 없다. 정해진 운명처럼 평생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아름다운 구속(김종서 곡)’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가족 역시 ‘행복한 굴레’가 될 수도 있을까? 그것은 각자의 생각에 맡겨야 할 것 같다.      


프랑스 작가 그레구아르 들라쿠르의 최근작 <개인주의 가족>은 가족의 연대를 상실해 분열된 가족 구성원들이 ‘가족의 치유’에 집착하는 모습을 통해 가족의 복구와 치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문학적 재능을 타고나 가족 모두를 기쁘게 함으로써 가족의 구심점이었던 주인공 에두아르. 그가 더 이상 재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구심점을 상실한 그의 가족은 가족이란 연결성을 잃고 개인으로 분열된다. 전쟁으로 우울증을 앓던 아버지는 난청이 되고, 어머니는 사랑의 결핍으로 외로워하고, 가족의 해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갖던 남동생은 자기 내면세계에 갇혔으며, 여동생은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 그리고 에두아르는 부모가 원하는 글쓰기에 집착한다.      


“자, 받아라.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글을 쓰면 아문다는 걸.” - 본문 12쪽 (아버지가 소설책을 건네며 에두아르를 기숙학교에 들여보내며 했던 말)   


엄마는 에두아르 네가 언젠가 글을 쓸 거란 걸 알아, 우리가 겪은 균열과 두려움, 그 모든 것을 다 얘기하겠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을 네가 꼭 찾아내렴.  - 본문 39쪽


가족 해체의 원인은 부모의 갈등과 이혼에 있었지만, 가족 회복의 책무는 아들인 에두아르에게 맡겨진다. 마치 <파랑새>의 틸틸과 미틸이 '행복'이란 이름의 파랑새를 찾아 나선 것처럼 그의 부모는 에두아르의 글쓰기를 통해 가족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고자 떠난 여정에서 결국  ‘행복’이란 이름의 파랑새를 찾지 못했다. 알고보니 집에 있는 틸틸의 멧비둘기가 파랑새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찾으려 애쓰는 행복은 저 멀리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 일상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행복했던 과거를 되돌리고자 에두아르의 글쓰기에 집착하는 그의 부모 역시 언젠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될까? 서로를 치유하는 건 에두아르의 글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라는 걸 말이다.      


가족의 분열에 책임을 느낀 에두아르는 자신이 원해서 작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작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부모의 욕망을 자기화한 것이다. 부모의 기대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명문대에 진학하고, 판검사가 되며, 능력 있고 조건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수없이 맞선을 보는 이들의 모습을 우리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당신들의 기대와 욕망을 강요하지만 정작 자식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럼에도 자식들이 부모의 기대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자의 욕망을 자기의 것으로 믿는 순간, 우리는 계속해서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그 결과 자기 존재의 불안감과 결핍을 야기하게 된다. 결국 타자의 욕망은 인간의 욕망의 원인인 동시에 욕망을 소외시키는 이중성을 갖는다. 타자의 욕망을 실현하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소멸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라캉의 말을 증명하듯 에두아르는 자기 욕망을 깨닫지 못한 채 타자의 욕망(부모의 욕망, 모니카의 욕망, 애니 바숑의 욕망)을 반복적으로 추구하다 결국 그 자신을 소외시키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아내가 된 모니카도, 연인이었던 애니 바숑조차도 에두아르를 욕망의 대상으로 봤을 뿐, 그가 가진 욕망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가 아닌 광고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모니카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애니바숑은 열정적이었으나 쾌락적 행위가 끝나면 그를 가차 없이 내쫓았다.     

 

광고 카피라이터로 수많은 광고상을 휩쓸고 ‘크리에이션 부서장’으로 백만 프랑의 연봉을 받으면서도 에두아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였다.      


나는 스물아홉 나이에 글로 먹고 살았다. 하지만 잉크병을 잘못 골라 펜을 담갔다. 

글을 쓰긴 했지만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나는 너무도 쉽게 운을 맞추고, 웃긴 슬로건을 뽑아 내고 있었다. 보비가 말한 이상향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빠의 가르침도, 엄마의 격려도. (본문 162쪽)      


에두아르는 타자의 욕망을 자기의 것으로 믿었고, 타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에 불행했다. 딸 마틸드가 태어나고 모니카와 다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에두아르의 책무였던 ‘가족의 치유’는 결국 불가능한 것일까?      


저자는 전작 <행복만을 보았다>에서와 같이 이 소설의 결말에서도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주려 했지만, 이를 단지 ‘몇 마디 말’에 집약시킴으로써 서둘러 모든 소설적 갈등을 봉합하려 한 것처럼 보인다.    

  

-에두아르, 네 소설은 지금 어떻게 돼 가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넌 세상 그 어느 책보다 더 멋진 이야기를 우리에게 써 주었어. (본문 211쪽)     


어머니가 건넨 이 말 한마디에 에두아르가 부모(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기 욕망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 또한 다소 작위적이다. 이러한 결말의 한계에도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건, 반복해서 타자의 욕망을 추구했던 에두아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곱씹게 만든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타자의 욕망이 아닌, 자기 욕망의 주체로 살고 있는 걸까?      


* 책 정보 - <개인주의 가족>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문학테라피/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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