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Nov 16. 2016

‘빵’에 담긴 고유가치를 향유하려면…

[서평] 원용찬의 <빵을 위한 경제학>

아빠 생신이라고 얼마 전에 동생이 조카를 데리고 집에 왔다. 지난 번 조카가 집에 온다고 했을 때 고심 끝에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나오는 오르골과 비슷한, 꼬리를 잡아당기면 멜로디가 나오는 양 인형과 그림책을 선물로 준비했었다. 조카는 이모가 주는 선물이라는 말에 신이 나서 인형의 꼬리를 계속 당겨 보고 그림책을 읽어 달라고 무릎 위에 앉아서 애교를 부렸었다. 조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마음이 흐뭇하던지.      


그런데 이번엔 조카를 위한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부랴부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제과점에 들러 아빠 생신 케이크를 고르느라 챙길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이모를 찾았다는 조카는 생글거리며 반겨주었다. 어휘력이 날로 늘어가는 조카(3세)는 제법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잘 지냈냐는 말에 “응, 잘 지냈어.”라고 대답해 가족 모두를 한바탕 웃게 만들었다. 그런데 조카가 방에 들어와서 잘 놀다가 대뜸 나에게 선물을 달라고 했다. 처음엔 “선물? 무슨 선물?”이라고 되물었는데 “양이(양 인형) 선물”이라고 대답하는 걸 보니 지난번에 이모가 제게 준 선물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미안, 이모가 이번엔 선물 준비 못했는데, 다음엔 꼭 줄게.”라고 대답했는데 영 서운한 눈치였다.      


조카의 마음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조카가 기대한 선물은 단지 재화로서의 인형이나 그림책이 아니었을 거다.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쁨과 인형을 갖고 노는 즐거움, 그림책을 기꺼이 읽어주는 이모를 통해 얻은 만족을 재현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선물로 받은 인형이나 그림책의 가격이 중요하지 않다. 어른들에겐 인형의 가격과 크기, 세탁 여부가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아이들에겐 인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만족이 곧 인형의 가치인 것이다. 이처럼 어린아이들은 ‘재화에 내재한 고유가치’를 발견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데 반해, 어른인 우리는 정작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능력을 점차 상실해 가는 것은 아닐까.      


‘빵’에 담긴 고유가치가 무엇일까      


전북대 경제학부 교수인 저자 원용찬은 책 <빵을 위한 경제학>에서 칼 폴라니, 애덤 스미스, 케인스, 피케티 등의 경제학자 뿐 아니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셰익스피어의 <햄릿>, 톨스토이의 <부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등의 다양한 문학적 텍스트를 넘나들며 주류 경제학에서 벗어나 대안적 경제학을 모색하는 동시에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학문적이고 딱딱한 서술이 아니라 문학적 텍스트를 바탕으로 친숙하게 접근하는 까닭에 경제학이라는 분야가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책의 제목이 인상적이다. <빵을 위한 경제학>이라니. 일견 생산성을 강조하는 의도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빵’은 단순히 재화로서의 빵, 효용가치로서의 빵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빵을 먹고 배 부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빵에서도 의미를 찾아내 고차원적인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능동적 존재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빵 속에 내재된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강조한다.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이 빵을 둘러싸고 함께 대화하는 관계의 기쁨을 향유할 때, 우리는 진정한 부를 얻을 수 있다. 

현재의 주류 경제학은 빵을 먹은 사람이 얼마만큼 효용과 만족을 얻느냐 하는 좁은 시야에 갇혀 있다. 새로운 경제학적 시야는 빵 속에 내재된 대화의 기능을 유효한 가치로 바꿀 수 있도록 인간의 역량을 기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 머리말 6-7쪽      


아무리 맛있는 빵도 자꾸 먹다보면 처음 먹었을 때처럼 만족감이 크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 질릴 정도가 되면 만족이 아닌 고통이 찾아온다. 이를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 한다. 이때 ‘한계효용’이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일정한 종류의 재화가 잇따라 소비될 때 최후의 한 단위의 재화로부터 얻어지는 심리적 만족도’로 ‘욕망의 정도에 정비례하고 재화의 존재량에 반비례한다.’ 모든 재화가 그렇듯이 빵의 한계효용 역시 양적 차원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존 러스킨은 빵이 ‘맛과 영양이라는 유용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커뮤니케이션 기능이라는 고유가치를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가족이 둘러 앉아 빵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빵 하나로도 가족 간에 웃음꽃이 필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학습을 해야 한다. 대화하는 능력을 학습해야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빵의 고유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 재화에 내재한 고유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향유 능력은 우리 삶의 가치를 높여준다. 고유가치는 향유 능력을 만나 인간의 생명 발달에 공헌할 때 유효가치로 드러난다. 생산물과 재화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고유가치를 유효가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향유 능력이 필요하다. 빵을 먹으며 가족이 대화를 나누거나, 시와 오페라와 그림을 감상하고 작품 속에 내재한 가치를 향유할 수 있어야 고유가치는 유효가치로 전환될 수 있다. - 본문 260쪽      


일견 빵의 고유가치가 ‘커뮤니케이션 기능’이라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빵을 밥으로 치환해 보면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와 닿을 것이다. 우리는 간혹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밥을 먹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과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공유하고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니까. 혼자 먹어 배부른 것보다 누군가와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더 큰 만족과 즐거움을 향유한다는 것은 분명 우리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일 것이다. 위 인용글에서 알 수 있듯이 재화의 고유가치는 비단 빵(밥)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와 오페라, 그림, 토지, 나무 등 모든 재화에는 ‘유용성’이라는 효용가치와 ‘심미성’이라는 ‘고유가치’가 내재해 있다고 존 러스킨은 말한다.   

   

모든 재화에는 고유가치(심미성)가 있다      


재화의 효용가치와 교환가치에 익숙해진 오늘날, 재화에 내재하는 고유가치를 발견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이끄는 존 러스킨의 이야기는 우리의 현재 삶의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물품에 익숙해지고, 합리적 소비(가격 대비 효용가치가 높은 제품을 소비하는 것)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책에 인용된 ‘돈을 맡기고 돈을 빌려가는’ 전당포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보통 집 안에 어른이 돌아가시면 저승 가는 길 편히 가시라고 자손들이 ‘노잣돈’을 준비한다. 그런데 타이완 풍습에는 노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세뱃돈처럼 자손들에게 남겨주는 돈이 있는데 이를 ‘수미전’이라고 한다. 천 선생은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해 모든 친척에게 외면당했지만, 그의 할머니만은 유독 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제대로 된 삶을 살라며 천 선생에게 ‘수미전’을 남겨주셨다. 천 선생은 사업자금을 빌리기 위해 전당포에 이 ‘수미전’을 맡기러 온 것이다. 의아해하는 전당포 주인에게 천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이 돈은 은행에 저축할 수 없어요. 저금을 하면 원래 있던 돈이 아니게 되니까요. 지금 저는 창업할 돈이 없고 빌려주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수미전은 할머니가 저한테 거신 기대이니 절대 쓸 수 없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어서 사장님께 보관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장사 밑천을 좀 빌리려고요. - 본문 286쪽      


천 선생에게 할머니가 남겨주신 돈(수미전)은 그냥 돈이 아니었던 것이다. 교환가치로서 보자면 천 선생이 전당포에서 빌리는 돈이나 할머니가 남겨주신 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할머니가 남겨 주신 돈에는 사랑과 믿음이라는 고유가치가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빵으로 상징되는 생명과 재화의 고유가치를 발견해야 한다는 존 러스킨의 경제 사상은 생명자본주의와 맞닿아 있다.      


최근 등장한 생명자본주의는 파괴와 죽음의 경제에서 살림살이의 경제로 나갈 것을 주장한다.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자본주의에서 탈출해 생명을 생산과 창조의 자본으로 삼아 인간과 자연을 살리는 ‘살림(life)' 자본주의를 내세운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산의 나무를 벌목한 목재를 자본으로 삼았다면, 지금은 존재하는 나무 자체가 훌륭한 자본이 된다.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숲의 아름다운 풍경에 문화⋅예술적 가치를 부여해 새로운 자본으로 만드는 것이다. 생명자본주의는 러스킨의 경제사상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 본문 263쪽      


생명을 파괴하고 수단화하는 게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가치와 목적을 두는 생명자본주의는 오늘날 인간의 생명마저 위협받는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자본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만족’을 얻기 위한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생명 가치에 진정 기여하는가를 중요하게 따지는 ‘역량 있는 소비’가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경제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월간 인물과 사상>에 연재한 글을 책으로 엮은 것이기에 그만큼 다양하고 흥미로운 경제학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그 때문에 하나의 명확한 주제의식으로 묶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아쉬운 마음에 간략하게나마 덧붙이자면,      


이기적인 본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경제적 동기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대비되는 실존적 인간인 <이방인>의 뫼르소와 <햄릿>의 햄릿, ‘시장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었던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기심과 탐욕을 제약하는 ‘정의의 손’이었다는 것, 단순한 모험소설이나 ‘무인도 탈출기’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합리적 개인의 성장 이야기’로 설명하는 <로빈슨 크루소>, ‘사회적 불평등의 근본 원인은 개인의 노력이나 재능보다는 누구의 자녀로 태어났는가 하는 유산상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등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많다. 책을 통해 저마다 유의미한 부분들을 발견하시길 바란다.      


동생에게 별 일이 없다면, 조카는 아마 다음 달쯤 집에 올 것이다. 그때 난 또 조카를 위해 선물을 준비할 것이다. 오로지 조카가 좋아할 만한 게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선물에 담긴 이모의 관심과 사랑을 느끼길 기대하면서. 앞으로 조카가 성장해서도 ‘재화에 내재한 고유가치’를 발견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책 정보 - <빵을 위한 경제학> (원용찬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16) 


매거진의 이전글 익숙하고도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의 가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