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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Sep 29. 2016

‘일할 권리’가 아닌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서평]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

나는 자다가도 해야 할 일이나 미처 못 한 일들이 떠올라서 화들짝 놀라며 깨곤 한다. 이러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내 인생이 잡다한 일 더미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까 봐 걱정이다. 언젠가 언니는 사람이 웃으면 뇌에서 화학물질이 나와 긴장을 풀어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웃으려고 노력했다. 새벽 4시에, 침대에 누운 채, 어둠 속에서.                                                              - 브리짓 슐트 <타임 푸어(TIME POOR)> 中      


위 인용문은 깨어있을 때뿐만 아니라 잠을 자면서도 일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로 숙면을 취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웃프게 보여준다. 우리는 왜 항상 시간에 쫓기며 살아갈까? 일을 하느라 늘 바쁜 데도 왜 해야 할 일들은 줄어들지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 <타임 푸어>는 일과 사랑, 놀이를 균형 있게 추구함으로써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삶의 성취가 아닌 만족을 지향한다면 삶의 속도를 늦출 수 있고, 여가와 휴식을 통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우리에게 일하는 시간만큼 충분한 여가와 휴식이 제공되는지, 성취 지향적이고 효율을 강조하는 이 사회에서 짧은 여가마저 일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지는 않는지 말이다.      

충분한 여가는커녕 야근만 안 해도 좋겠다는 직장인들의 볼멘소리를 듣지 않더라도 평일 야근에 주말 근무, 상사 눈치 보느라고 휴가 일정도 잡기 어려운 직장인들의 애환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8월 15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우리나라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이다. 이는 멕시코에 이어 2위에 해당하고, OECD회원국 34개국 기준 평균 노동시간인 1,766시간보다 347시간이 많다. 이를 법정 노동시간인 하루 8시간으로 나누어 보면, 43일 더 일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평균임금은 노동시간에 비례할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OECD 평균이 41,253달러인 데 반해, 우리나라의 연간 평균 실질임금은 33,110달러로 고작 22위에 해당한다.      


여가도 반납하고 일에 몰두해 왔으나 그 대가로 주어지는 건 정당한 임금이 아니라 과로와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삶뿐인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는 걸까, 일하기 위해 사는 걸까?     


지금으로부터 약 130여 년 전, 과도한 노동에 지친 현대인의 모습을 예견한 듯 노동에 대한 열정과 숭배를 비판하고, ‘일할 권리’가 아닌 ‘게으를 권리’를 선언한 이가 있다. 바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저자 폴 라파르그이다.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마르크스주의를 대중화시킨 사회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저자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프랑스의 공포 시대에 활약한 영웅들의 후손들이, 노동이라는 종교(the religion of work) 때문에 너무나 타락해, 1848년 혁명으로 적지를 정복하고도 공장 노동을 하루 12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수용했음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일할 권리’를 혁명적 원리로 선언했다.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여,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오직 노예들만이 그처럼 비열한 짓을 하려들 것이다. (본문 36쪽)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매우 형이상학적인 법률가들이 꾸며낸 부르주아 혁명기의 인권선언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본문 51쪽)      


노동이라는 종교 때문에 하루 12-14시간씩 노예와 같이 일하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들을 각성시키고자 ‘일할 권리’에 대해 ‘게으를 권리’를 선언한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파격적인 하루 3시간 노동을. 물론 여기서 ‘게으를 권리’란 하루 3시간 일하고 남는 시간에 게으름을 피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에 대해 프레드 톰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 정도 긴장감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라건대,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본문 155쪽)      


결국 ‘게으를 권리’란 우리가 삶 속에서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테다. 헌데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의 노예와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건강과 인생을 저당 잡힌 채 살고 있는 것이다. 학생 때는 공부의 노예로, 졸업 후에는 노동(일)의 노예가 되어서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암묵적인 사회적 강요에 의해 우리는 노예의 삶을 스스로 택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열정 페이’라는 명목으로 다수의 청년들을 혹사시키며 오히려 삶과 일에 대한 열정을 빼앗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가름하며 노동자들의 분열과 소외를 가져온 것도 모자라 더 많이 일하고도 더 가난해 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좌절과 패배감을 안겨주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노동의 노예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이용승 감독의 영화 <10분>에서 6개월 인턴임에도 정규직 일까지 도맡아 성실하게 일하는 호찬(백종환)을 비웃으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정규직은 안 될 거라고 말했던 또 다른 인턴의 얘기를 빌리지 않아도 우리의 노력과 성실함이 반드시 정당한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규직’이라는 보상을 걸고 끊임없이 우리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자본주의의 음흉한 속내가 들여다보일 뿐, 그런 줄을 알면서도 맹목적으로 헌신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부조리는 우리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의 책임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 속에 등장하는 바틀비는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처럼 전산화가 되기 이전, 변호사가 처리할 방대한 서류작업을 대신해 주던 필경사 바틀비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노동하는 기계가 아닌 인간임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지시나 요구, 부탁에도 ‘…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틀비에게 자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맹목적인 거부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바틀비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맹목적인 노동으로 인해 내적 자아마저 상실해가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노동이 강요되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저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노동의 요구는 다른 모든 자연스런 본능을 억누르고, 사회가 요구하는 일의 양은 필연적으로 소비와 원자재 공급에 의해 제한된다. 그런데 왜 1년 동안 할 일을 반년 만에 해치우나?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만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서로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빼앗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 (본문 69쪽)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의 양에 있지, 시간에 있지 않다는 거다. 짧은 시간 집중해서 일하는 것이 몰입도가 높고 훨씬 능률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4일제 근무를 시행하는 국내 기업의 소식이 그래서 더욱 반갑다. 2010년부터 3년간 주4일제를 시범운영해 오던 화장품 제조사 에네스티는 이를 개선해 2013년 전 직원을 대상으로 주4일 근무제(월~목, 1일 9시간, 주 36시간)를 시행했다고 한다. 근무날짜를 하루 줄임으로써 직원들에게 ‘삶’과 ‘행복’을 되돌려준 이 기업은 오히려 생산성과 매출을 늘림으로써 직원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일하는 시간을 줄임으로써 충분한 여가와 휴식을 취하고 정신적인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일은 부담이 아니라 우리의 창조성을 발휘할 기회가 될 것이다. 부족한 일자리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덤이다. 우리 사회에도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길 고대해 본다.      


모든 일을 게을리하세

사랑하고 한잔 하는 일만 빼고 

그리고 한껏  게으름 피우는 일만 빼고        

- 레싱(Lessing)  


* 책 정보 - <게으를 수 있는 권리)>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삼호미디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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