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보다 미안함이 괴로움을 불러오다
없다. 내 첫 반려견이면서 오랜 친구였던 한비는 같은 하늘 아래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생기게 될 일이 왔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게 현실이라는 상황으로 다가오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그보다 더 큰 건 미안함이었다. 미숙함이 만든 상황, 여유가 없어지며 만든 상황 등 어쩌면 내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미안함이 이별의 두려움보다 더 커서 괴로웠다. 두려움보다 미안함이 괴로움을 더 크게 불러온다는 걸 깨달았다.
내게 남은 건 두 가지뿐이었다. 미안함으로 인해 배운 교훈과 모모. 한비를 키우고 보내며 배운 내용을 모모에게 적용해서 반복되는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수는 없었다. 변하지 않은 형편과 내 입장. 여전히 집은 힘들고 난 공부하는 취준생이었다.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평소 즐겨보던 웹툰 중에 죽음에 대해서 다루는 웹툰이 있었다. 잠들기 전 한 에피소드의 마지막화를 보고서는 바로 멈췄다. 바로 반려견의 입장에서 죽음을 앞두고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암시하는 다음 에피소드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던지라 당분간은 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공부에 몰두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미안함으로 인해 더 높여졌던 집중력도 내려가게 되고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 그 웹툰이 떠올랐다. 그 에피소드는 끝이 나있었고 다음 에피소드가 진행 중이었다. 때마침 쉬는 날로 잡았었고 조금은 감정이 무뎌졌었기에 그 에피소드를 봐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고 봤다.
그렇다. 결국에는 눈물로 그 에피소드를 끝까지 보게 됐고 더 굳은 다짐을 했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이 키우는 사람의 걱정과 슬픔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거, 노견을 바라보는 주인 등에 대한 내용은 공감 갔지만 죽음을 몸으로 느낀 노견의 입장이 저렇겠구나라는 게 무척이나 아프게 다가왔다. 당시 내게 가장 와닿았던 그림은 훗날 주인이 늙어서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때 그 모습으로 주인을 맞이해 주는 노견과 이를 반기는 늙은 주인이었다.
지금은 한비를 볼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한비를 마주할 거다. 그때 여유 없고 근심 가득한 모습이 아니라 멋지게 늙어서 사랑으로 한비를 안고서 마주할 수 있어야겠다는 다짐이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한비와 함께 있을 다른 동물들이 한비에게 "멋진 주인과 함께 있다 왔구나?"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게 살다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곳에서는 한비가 내 목소리를 듣고 반갑게 해맑은 얼굴로 뛰어올 테니까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지금 곁에 있는 모모에게도 최선을 다하고 같은 미안함을 마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게 내 어린 시절의 오랜 친구에 대한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