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지혜학교 철학교육 이야기 13] 지혜학교 본과정 교육의 의의
1. 16~17세 지혜학교 학생들이 주체성을 기르는 과정
기초과정 2년을 수료하고 나면, ‘본과정’으로 진입한다. 지혜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기초를 다진 뒤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공부를 세워 나가는 것이다. 시간표를 살펴보자. 국어, 독서-토론-글쓰기, 철학, 지혜, 과학, 사회, 체육, 연극(3학년)/영화(4학년)로 채워져 있다. 이와 더불어 각종 프로젝트 및 학생자치 활동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런 공부를 통해 ‘몸과 마음의 관계로서 자신을 탐색’하고,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자율성’ 및 ‘동료 학생과 함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자치력’을 기른다.
지혜학교 본과정의 여러 교육 활동들을 아우르는 표어가 있으니, 바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다. 다시 말해 본과정에서의 배움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펼쳐내어 뜻한 바에 다다르는’ 경험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이러한 불광불급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교육의 장이 있으니 바로 학년 프로젝트로서 ‘연극’(3학년)과 ‘영화’(4학년)이다. (지혜학교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면, 역대 학생들의 연극 및 영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연극 프로젝트에 관해 생각해보려 한다.
갓 16세가 된 학생들이 3학년 교실에 모인다. 좋든 싫든 1년 동안 틈틈이 연극 공연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려야 한다. 처음에는 연극이라는 예술활동에 대해 공부하고, 함께 기존 극단의 연극을 감상하면서 자신들이 준비할 연극을 머릿속에 그린다. 본격적으로 모둠 지어 공연할 대본을 고르고, 작품을 각색하는 동시에 배우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연기 연습에 들어간다. 무대와 음향, 소품을 담당하는 학생들도 바쁘게 움직인다. 이 모든 활동을 좌충우돌하며 1년 동안 연극 선생님의 지도 아래 하나 하나씩 해낸다.
이렇게 나열하니, 일이 척척 진행될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사실상 지겹디 지겨운 갈등의 연속이다. 1년 내내 이루어지는 학년 프로젝트라 하여 모두가 똑같은 마음과 열정으로 연극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상황과 역할에 따라, 또 각자의 기질 및 성향에 따라 연극 프로젝트를 대하는 생각과 태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연출을 맡은 학생은 무대에 올리기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연습에 또 연습을 부르짖지만, 다른 이들은 다른 동아리 활동, 숙제, 연애 등 연극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쌓여 있다. 이런 상태에서 끝없는 연습을 외치는 연출자에게 공공연히 항의를 하기도 한다.
많은 학생들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서로 생각과 감정, 욕구가 어긋나는 경험을 한다. 이들은, 겉으로는 새순이 올라오는 봄부터 연극을 준비해서, 흰 눈이 날리는 겨울에 극을 무대에 올리고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일을 경험하지만, 안으로는 하나의 큰 일을 치르는 과정에서 각각의 모든 학생들이 빠짐없이 자신의 역할을 배정받는 경험을 한다. 자신의 역할이 전체의 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아무리 비중이 작아 보여도자신의 역할로 인해 전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경험을 한다. 큰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모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이루어졌을 때, 따로 또 같이 해냈다는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학생의 행위주체성’(student agency)이 자라나는 지점을 본다.
2. OECD 2030에서 학생의 행위주체성
지금으로부터 대략 25년 전에 OECD는 교육과 관련해서 이런 물음을 던졌다. ‘성공적인 삶과 좋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량이 필요한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핵심 역량의 정의 및 선정 작업”(Definition and Selection of Key Competences), 줄여서 ‘데세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정보화, 세계화 시대를 살면서 개인적인 성공과 좋은 사회를 꿈꾸던 시절의 이야기다.
20년 후, 2018년의 OECD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대로 살다가는 다 죽는다. 지구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으며, 국내적으로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고, 국제적으로 국가 간 불평등은 심각해지고 있다. 지역적 분쟁은 급증하며 폭력적 극단주의와 테러리즘이 활개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는커녕 지구 생태계의 지속마저 어려워지고 있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교육이 이러한 현실을 바꾸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 가운데에 학생의 행위주체성이자리 잡고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교육과 삶 속에서 주체적인 행위자로서 훈련받아야 한다. 행위주체성은 세계에 참여하고, 참여를 통해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해 사람들과 사건,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책임감을 스스로 의식하는 것이다.”
“사회를 변혁하고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역량 학생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 한다면, 불확실성 속에서 광대하고 다양한 맥락들을 가로질러 헤쳐 나가야 한다.”
<OECD 2030 입장문>
여기서 학생의 행위주체성이란, “세계에 참여하고, 참여를 통해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해 사람들과 사건,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책임감을 스스로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학생들이 마주하는 세계란,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 아니다. 온갖 문제들이 들끓고 있는 모순덩어리이며, 학생들이 이 세계에서 주체로 선다는 것은 여러 문제들이 뒤섞인 “불확실성 속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광대하고 다양한 맥락들을 가로질러 헤쳐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개별적인 자율성’이나 학교 공부에 있어서 ‘학생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학생의 선택권’이 보장되는 것을 넘어서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주변 동료와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 시야를 넓히는 것을 전제한다. 충분히 배우고 익힌 뒤에 미성숙 상태를 벗어나서 비로소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으로서 바로 ‘지금 여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마주할 때 ‘스스로’ 생각을 하고 동료와 ‘더불어’ 행동을 하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학생 행위주체성 개념은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주변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는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학생 행위주체성은 목표를 설정하고, 변화에 영향을 주기 위해 책임감 있게 반영하고 행동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OECD 2030 입장문>
3. 행위주체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그렇다면, 이런 주체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어떻게 하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며, 그 문제의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적절한 방법들을 구상하며, 그 방법을 현실에 펼쳐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감정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머릿속의 이상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할 때 겪는 온갖 시행착오를 기꺼이 책임지고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중에서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마지막 질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견디며 이를 어떻게든 좁히려는 ‘책임감’을 지닐 수 있는가?
대안학교현장에서 교사로서 종종 마주하는 막막함이다. 정작 배운 적이 없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을 만나서 대안적인 것을 고민하지만 정작 나 자신을 포함한 지혜학교의 교사들은 학창 시절에 그런 주체성을 보고 들은 적이 없거니와 지금도 이런 주체성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자신 있게말할 수 없다. 심지어 책임감을, 현실을 바꾸는 과정에서 겪는 온갖 갈등을 견디며 마주한 문제로부터 눈 돌리지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그 마음 상태를 도대체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막막한 마음으로 다시 3학년 학생들의 연극 프로젝트를 본다. 학생들은 연극이라는 큰 활동을 함께 꾸려 나간다. 한 명도 빠짐없이 연출, 각본부터 배우, 무대 장치, 소품, 음향, 조명 등 각자 역할을 맡아 자기 활동을 채워 나간다. 자기 자신의 역할이 그 자체로는 아무리 소소해 보여도 연극을 무대에 올려 공연을 하는 과정에서는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모두가 ‘따로 또 같이’ 이 연극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이 한 편의 연극을 만들어서 무대에 올린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때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각각의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어떤 기하학적 질서 속의 균형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올리는 예술적 표현 과정에서의 ‘공통 감각’이다.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환히 자신들을 비출 때 무대 위로 쏟아지는 박수와 갈채를 받으며 학생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떤 감동에 휩싸일 것이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서로 함께 부딪히며 꾸역꾸역 밀어 올렸던 예술활동이 새삼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곰곰이 곱씹어 볼 것이다.
연극과 영화는 지혜학교에서 수년째 3, 4학년의 프로젝트로 굳건히자리 잡고있다. 학생과 교사들은 온몸으로 이미 알고 있다. 이 시기의 청소년들이 연극과 영화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에 관해,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예술적 활동 속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고 서로 함께 ‘고양되는 감정’을 겪는 것. 나는 이것이 학생의 행위주체성이 자라나는 데에, 특히 문제를 견디는 책임감을 배우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짐작을 해본다. 따로 또 함께 성장하는 예술적 경험 속에서 어떻게 각자의 마음에 책임감이 싹틀까? 올해에는 이런 물음을 가지고 연극, 영화 프로젝트를 눈 여겨 봐야겠다.
▲ 22년 3학년 학생들의 연극 <방황하는 별>의 한 장면 지혜학교 본과정 학생들이 1년 동안 준비한 연극을 무대 위에서 펼치고 있다. ⓒ 지혜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