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지혜학교, 철학교육 이야기 15화
1. 형식적인 학생 자치를 넘어서
수년 전 광주 모 고등학교 철학 특강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른들은 이 땅의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다고 생각하며, 이 때문에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시민교육을 하지 않고서 시민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한다. 대한민국 교육이 '대학 입시'라는 굴레에 70년 동안 얽매여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학생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지 않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회 임원으로 보이는 한 학생이 따로 찾아와서 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 생각에 학생의 미성숙은 사실이며, 실제로 학생들은 교내 학생회 임원들의 활동에 별 다른 관심도 없고 자치활동에 관해 아무런 책임도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나는 반문했다.
‘학생회 활동 중에서 크고 중요한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학교 운영위원회에 학생 대표가 참여한다든지, 학교 예산에서 학생회 활동비 지원이나, 교내 학생 자치 공간 마련이나, 교육과정 및 수업 편성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문제 등을 다루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작고 가벼우며 형식적인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면, 어느 누가 자기 시간을 쪼개어 참여하려 들려고 할까요?’ 이 말을 들은 학생은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다는 표정으로 인사하고 교실 밖을 나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학생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를 직접 다룰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보장해 주면, 학생들은 좌충우돌하면서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협력하여 끝끝내 그 문제를 해결할까? 이에 대한 답변 삼아 2024년 1학기에 지혜학교에서 이루어졌던 하나의 실험을 소개하려고 한다.
2. 지혜학교 ‘지존최강’ 이야기
24년 1학기 지혜학교에서는 ‘지존최강’이라는 이름의 공동체 실험이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지혜학교 존립을 위한 최후의 강경책’이라는 긴 이름의 앞글자만 따와서 ‘지존최강’이라 불렀다. 저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지혜학교 존립에 무슨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서 이제는 최후의 강경책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먹거리 문제’였다. 학교 생활관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먹는 문제에 대해 이토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의아하다. 지혜학교의 밥이야 말로 영양사 및 조리사 선생님들의 헌신으로 14년째 유기농 재료 가득 채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밥 맛을 본 외부 손님들은 너나할 것 없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탁월한 맛을 보장하고 있는데 도대체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학생들이 생각하는 문제는 학교의 '외부음식 제한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혜학교에서는 ‘밥모심 철학’을 기준으로 음식과 관계 맺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나는 생명이며, 밥 또한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일은 생명으로서의 나와 또 다른 생명인 밥이 서로를 모시는 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교사와 부모의 입장에서는 단지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음식과 관계 맺는 것이 건강하고 좋은 삶인가를 생각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교육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식품첨가물로 범벅이 된 초가공식품들을 무분별하게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2022 지혜학교 팜(farm)파티 2022년 학교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과 지역의 유기농 채소를 활용하여 여러 메뉴를 만들어 나누어 먹는 축제를 진행했다 ⓒ 지혜학교
학생들은 아무리 좋고 의미 있는 이야기도 당장의 결핍 때문에 들리지 않나 보다. 어떤 학생들은 그래도 배가 고프다고 했다. 배고파서 서럽다고 했다. 또 다른 학생들은 어른들은 스트레스 풀려고 금요일 밤에 ‘치맥’을 즐기지 않냐! 우리도 스트레스받을 때, 맛있는 거 먹으면서 풀고 싶다고 했다.
또 어떤 학생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간식을 먹는 일이 심심치 않게 드러나고 있으니 이렇게 실효성 없는 규칙을 전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들먹이며, ‘논쟁에 부쳐지지 않는 진리는 생명력을 잃게’ 되니, 1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규칙을 다시 논쟁에 부쳐서 그 의미를 생생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기존의 외부음식 제한 규정을 중단하고, 학생들이 컵라면, 빵, 과자, 초콜릿, 젤리, 사탕 등의 간식들을 섭취하면서 자발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니까 간식을 먹느냐 마느냐가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학교의 존립을 뒤흔드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 끝장을 보자고 와글와글 하는 것이다.
이런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해 교사와 학부모는 몸에 좋지도 않은 간식을 왜 그렇게 먹으려고 하냐, 성장기에 건강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교사와 학부모의 역할인데 그 역할을 내려놓으란 말이냐 답답해했다. 초가공식품에 대해 학생들을 교육할 문제이지, 그들의 요구를 받아줄 문제는 아니라는 목소리도 높았다.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결국 학생들이 이렇게 힘을 모아 주장을 하는데 이 목소리를 꺾지 말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몸소 배우고 겪을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합의를 힘겹게 이끌어내고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3. 지존최강의 실험이 시작되다
생활교육부 교사들과 학생회 임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존최강 실험을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교사회 및 학부모회의 우려사항을 확인하며 지존최강의 시행 배경이나 목표를 명확히 하고, 진행 과정에서 지켜야 할 규칙, 정기적인 회의 등을 배치했다. 그 결과 지존최강을 시작할 즈음 합의한 약속은 다음과 같다. ① 생활관 내 화기사용 금지, ② 학교 급식에 빠지지 않기 ③ 배달 음식 금지. 그리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다음의 조건이 추가되었다. ④ 교사회의 2/3 이상이 동의하면 즉시 중단할 수 있음. 그리고 매주 교사, 학생들이 모여 (학부모는 설문조사로) 지존최강 진행 과정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고, 필요하면 의견을 모으는 자리를 가지기로 했다. 이렇게 지혜학교 존립을 위한 최후의 강경책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리게 된다. (16화에서 계속)
▲ 지혜학교 학생자치 학생들이 델포이(강당)에 모여서 학생자치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 지혜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