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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준 May 18. 2023

개츠비와 함께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스콧 피츠제럴드_<위대한 개츠비>에 관한 단상

1.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저 사람은 이렇고, 이 사람은 그렇고, 그 사람은 저렇다고 하더라’라는 식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 피상적인 의견을 펼치고 그 사람에 대해 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일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당사자가 그런 평가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이런 류의 이야기는 쉽게 나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은근히 재미있기까지 하다.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 판단, 평가, 판단은 평소에 잘 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자신을 되돌아볼 만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 한, 웬만해서는 자신을 돌아볼 일이 없다. 그 상황이란 대개 불편한 것이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 또한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애써 자신을 돌아본다고 하더라도 대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기대어 돌아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나를 아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한꺼번에 모은다고 하더라도 그 총합이 나 자신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게 진짜 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 

<위대한 개츠비>를 펼치고 읽다보면 (다들 이야기하듯) 뿌연 안개 속을 허우적대는 느낌이다. 개츠비에 대한 별의별 소문만 무성할 뿐,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온갖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닉 캐러웨이와 함께 ‘도대체 개츠비가 누구인지’ 묻게 된다. 닉은 개츠비의 파티에 초대를 받고 흥청망청하는 샴페인과 재즈 속에서 무심결에 개츠비를 만난다. 작품의 첫 문장이 시작한 뒤 1/4이 지나서야 비로소 개츠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개츠비야!” 그 뒤 몇 번 더 개츠비를 만나고 이런저런 속 빈 이야기를 나누다가 개츠비는 문득 닉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봐 친구, …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개츠비는 적어도 타인에 시선에 기대어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도 떠도는 소문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그 소문들에 가려 실제 자신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닉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그는 오히려 1차 대전 중 몬테네그로 인민들의 투쟁에 함께 했던 그 자신을, 인민들이 개츠비에게 보낸 명예로운 찬사(“제이 개츠비 소령, 놀라운 용기를 기리며”) 속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그게 닉에게 처음 적극적으로 내세운 개츠비 자신의 정체다. 


그러나 개츠비의 정체는 곧 다시 흐려진다. 곧이어 울프심과 만나는 장면에서 개츠비는 닉에게 다시금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닉에게 울프심과 함께 있는 개츠비는 더 이상 ‘몬테네그로의 영웅’이 아니라 한낱 ‘밀수업자’로 보였던 것이다. 도대체 개츠비는 누구인가? 그렇게 소설은 개츠비의 정체에 대해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이후부터 개츠비의 정체에 대한 물음은 개츠비 자신이 밀어붙인다. 바로 데이지를 향한 사랑 속에서 말이다. 아래의 글을 함께 읽어보자. 


“그는 과거에 대해 떠들어댔고, 나는 그가 어떤 것,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생각, 즉 데이지를 사랑하도록 만든 바로 그것을 되찾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이후로 그의 인생은 혼란스러웠고 무질서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찬찬히 다시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있다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6장 마지막 부분, 140쪽)


 개츠비가 지난 5년간 데이지를 찾아 헤매는 사이에 데이지는 톰과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개츠비는 이 “모든 걸 되돌려” 놓으려 한다. 5년 전 그때처럼 다시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앞서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데이지가 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변했다. 다시 시작할 그녀와의 사랑 소속에서 개츠비는 자신이 데이지를 사랑하도록 만든 ‘그것’, 즉 데이지를 사랑하던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데이지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은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돌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된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철저히 비극적이다! 흘러가는 시간, 변하는 사랑 속에서 변치않는 참된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헛되다. 소설 속 개츠비의 죽음은 우연한 오해 속에서 일어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헛된 몸부림의 필연적인 파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살아있긴 해도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 이후는 쓸쓸하다. 파티와는 달리 장례식장은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더 쓸쓸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존재이다. 우리는 소설 마지막에 등장한 아버지를 통해 개츠비의 어떤 새로운 모습을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가지지만, 소설 속 아버지는 순수했던 어릴 적 개츠를 보여주기 보다는 개츠비가 일궈놓은 부에 매료되어 그를 포장하기에 급급했기 떄문이다. 결국 죽고 나서도 우리는 그가 진정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어릴 적, 댄 코디를 만나기 전에는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지 알 길이 없어졌다. 하긴 그런 이야기를 안다고 해도 그것이 개츠비, 아니 개츠의 진짜 정체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도 없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우리는 개츠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도 씁쓸한 이유다. 


3.

이렇게 볼 때,  <위대한 개츠비>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하나의 문학적 답변이다. ‘이게 바로 나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진짜 나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개츠비처럼 ‘진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좇아봤자 돌아오는 것은 헛된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우리는, 그렇다면 ‘늘 변하는 나를 만나는 것뿐’이라고, ‘사람들이 왈가왈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나의 한 부분’이라고 ‘쿨’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흔들리고 걷잡을 수 없는 나’를 나는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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