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요리사 ep.20-비밀

나는 처음으로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by 춘식


5월 하순, 초여름 더위가 시작되었다.

어버이날 이후 서영과 나는 더 가까워졌다. 부모님들의 축복을 받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짐을 느꼈다.

비밀.

나는 서영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었다.

“억해씨, 오늘 손님 어떤 분이셨어요?”

“아, 할머니셨어요. 돌아가신 남편분 음식을 원하셔서.”

“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이야기 들어보니까요.”

거짓말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기억을 봤다. 60년 전 신혼 시절, 남편이 해주던 미역국을.

매번 이랬다. 서영은 내가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눠서 알아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그들의 기억을 보고 있었다.

“억해씨?”

“응?”

“괜찮아요? 요즘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아니, 괜찮아요.”

“무슨 고민 있으면 말해요. 우린 일반적인 사이가 아니잖아요.”

우리 사이.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비밀.

‘우리 사이’라면 비밀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닐까?

어느 날 오후였다.

손님 한 분이 오셨다. 50대 남성이었다.

“어서 오세요.”

나는 습관적으로 손님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갈비탕. 30년 전, 대학 합격 날 아버지가 사주셨던…

“억해씨.”

나는 손님의 기억에서 나왔다.

서영이 주방 입구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방금… 뭐 하신 거예요?”

“…뭐가요?”

“손님 쳐다보시더니 갑자기 주방으로 들어오셨잖아요. 손님이 뭘 드시고 싶은지도 안 물어보시고.”

“아, 그게…”

나는 당황했다.

“손님 표정 보니까 무거운 음식 원하시는 것 같아서요.”

“표정만 보고요?”

“…네.”

서영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날 밤, 서영이 돌아가고 나는 혼자 가게에 앉아있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언젠가는 들킬 거야. 그럼… 서영씨가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사람들의 기억을 몰래 보고 있었다는 걸 알면…’


다음 날 저녁, 나는 서영에게 말했다.

“서영씨, 오늘 가게 문 닫고 할 얘기가 있어요.”

“무슨 얘기요? 좋은 얘기예요?”

“…잘 모르겠어요. 근데 꼭 해야 할 얘기예요.”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우리 둘만 남았다.

“서영씨, 앉아요.”

“네…”

서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앉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서영씨, 나는… 과잉기억증후군이 있어요.”

“과잉기억증후군이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걸 기억해요.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

“14살 때까지는 그게 다였어요. 그냥… 기억을 잘하는 사람.”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14살 때, 하해가… 하해가 떠나고 나서, 나는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됐어요.”

“무슨 능력이요?”

“…사람들의 기억을 볼 수 있어요.”

서영이 눈이 커졌다.

“기억을… 본다고요?”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과거 기억이 보여요. 원하는 음식, 그 음식에 얽힌 추억, 레시피까지.”

“…”

“그래서 손님들이 원하는 음식을 정확히 만들 수 있었던 거예요. 대화를 많이 나눠서가 아니라… 그냥 기억을 봐서.”

서영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럼… 저도요?”

“아니요. 서영씨는 유일하게 기억이 안 보였어요. 처음이었어요.”

“…그럼 다른 손님들은?”

“…네. 다 봤어요.”

서영이 한 발 물러났다.

“그걸…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어요?”

“서영씨…”

“억해씨,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서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들의 가장 사적인 기억을, 허락도 없이 보신 거잖아요.”

“나도… 처음엔 힘들었어요. 원하지 않았어요. 그냥 눈만 마주쳐도 보이는 거예요.”

“그럼 더 말씀하셨어야죠. 저한테도, 손님들한테도.”

“말하면… 다들 떠날 것 같았어요.”

서영이 알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억해씨는 저를 믿지 않으신 거네요.”

“그게 아니라…”

“전 억해씨한테 다 말씀드렸어요. 부모님 일찍 돌아가신 것, 고아로 자란 것, 남편 잃은 것, 기억 잃어버린 것. 다요.”

“서영씨…”

“근데 억해씨는… 가장 중요한 걸 숨기고 계셨네요.”

“미안해요.”

“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같아요.”

“서영씨!”

“억해씨, 잠깐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서영이 가게를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음 날부터 서영은 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문자만 하나 왔다.

‘억해씨,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생각 정리할게요.’

나는 혼자 가게를 운영했다.

“억해야, 서영이 누나 안 와?”

해한이가 물었다.

“…응.”

“무슨 일 있어?”

“싸웠어.”

“뭐? 너네가 싸워? 무슨 일인데?”

“…내가 잘못했어.”

“뭘?”

“중요한 비밀을 말해 버렸다. 기억을 본다는…”

해한이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억해야, 서영이 누나는 이해해줄 거다. 누나 그런 사람 아니잖아.”

“…모르겠어.”

사흘째, 손님이 왔다.

30대 여성이었다. 나는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어? 왜 안 보이지?’

기억이 흐릿했다. 평소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손님, 어떤 음식을 원하세요?”

나는 직접 물어봐야 했다.

“아… 어머니 미역국이요.”

“어떤 미역국이세요?”

“그냥… 일반 미역국이요.”

나는 일반적인 레시피로 미역국을 만들었다.

손님은 먹고 갔지만…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나흘째, 또 다른 손님.

이번에는 아예 기억이 보이지 않았다.

‘왜? 왜 안 보이는 거야?’

나는 당황했다.

능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이제 거의 모든 손님의 기억을 볼 수 없었다.

‘능력이 사라지고 있어.’

‘왜?’

‘서영씨 때문일까?’

‘아니면… 하해가 준 능력의 시간이 끝나는 걸까?’

그날 저녁, 가게 문이 열렸다.

서영이었다.

손에는 큰 용기를 들고 있었다.

“억해씨.”

“…서영씨.”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죠.”

서영이 들어와서 용기를 테이블에 놓았다.

“이게 뭐예요?”

“냉면이요. 제가 만들었어요.”

“…서영씨가요?”

“네.”

서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억해씨, 제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어요.”

“정말요?”

“민호가 만들어주던 냉면 맛이 생각났어요.”

“…”

“어떻게 만드는지, 어떤 재료를 쓰는지. 다 기억났어요.”

서영이 냉면을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들어봤어요. 억해씨랑 같이 먹고 싶어서.”

“…고마워요.”

우리는 마주 앉아서 냉면을 먹기 시작했다.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육수. 쫄깃한 면발.

“맛있어요, 서영씨.”

“…감사해요.”

한참을 먹다가 서영이 말했다.

“억해씨.”

“응?”

“저 화났었어요.”

“미미…미안해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나를 믿지 못했냐고.”

“…”

“근데 일주일 동안 생각해봤어요.”

서영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억해씨도 힘들었겠구나. 그 능력… 축복이 아니라 짐이었을 수도 있겠다.”

“서영씨…”

“원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의 아픔을 다 봐야 했잖아요. 얼마나 무거웠을까.”

서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저도 비밀이 있었잖아요. 남편 기억을 잃어버린 것.”

“그건… 서영씨 잘못이 아니에요.”

“억해씨 능력도 억해씨 잘못이 아니에요.”

“…”

“우리 둘 다… 상처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만난 거 아닐까요?”

나는 서영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서영씨.”

“근데 억해씨.”

“응?”

“다음부터는… 비밀 없이 지내요. 약속해요.”

“…약속할게요.”

우리는 계속 냉면을 먹었다.

“억해씨, 그런데 요즘 손님들 기억은 잘 보여요?”

나는 망설였다.

“…사실은, 요즘 보였다 안 보였다 해요.”

“네?”

“서영씨가 안 온 일주일 동안… 점점 흐려졌어요.”

“왜요? 괜찮아요?”

“모르겠어요. 근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아요.”

“…?”

“능력이 없어도… 서영씨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서영이 환하게 웃었다.

“억해씨…”

“그리고 서영씨.”

“네?”

“서영씨 기억이 돌아오는 거… 좋은 일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네. 저도 그래요. 민호를 잊고 싶지 않았거든요.”

“당연하죠. 소중한 사람인데.”

“근데 억해씨도 소중해요. 다르게 소중해요.”

“나도 서영씨 소중해요.”

우리는 냉면을 다 먹었다.

“억해씨, 내일부터 다시 와도 돼요?”

“당연하죠. 기다릴게요.”

“그럼… 내일 봐요.”

“응, 내일 봐요.”

서영이 일어서려다가 말했다.

“아, 그리고 억해씨.”

“응?”

“능력이 사라져도 괜찮아요. 억해씨는 여전히 훌륭한 요리사예요.”

“…고마워요.”

서영이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서 생각했다.

능력이 사라지고 있다.

서영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내 능력이 약해지고 있다.

우연일까?

아니면… 하해가 준 능력이 역할을 다한 걸까?

‘하해야. 이 능력이 너로 부터 왔는지 알수는 없지만, 나는 니가 떠나고 내게 생긴 이 능력이 짐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그리고…서영씨를 만날수 있어서 너무 감사해. 이제는… 능력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서영씨가 있으니까.’


나는 빈 그릇을 치우며 미소를 지었다.

능력이 사라져도 괜찮았다.

나에게는 서영이 있었다.

그리고… 요리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그날 밤, 서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억해씨, 오늘 냉면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비밀 말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우리 진짜로 가까워진 것 같아요. 내일 봐요. 사랑해요.’

나는 답장을 보냈다.

‘나도 사랑해요, 서영씨. 내일 봐요.’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초여름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었다.

능력은 사라지고 있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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