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브런치까지 왔는가
(이전 이야기: 개인 홈페이지 > 싸이월드/이글루스 > 미시 > 구글 블로거 > 네이버 블로그까지 정처없이 돌아다닌 한 디지털 유목민이 있었는데...)
푸드코트처럼 정신 사나워진 네이버 블로그를 스르륵 뒤로하고 디지털 거처를 또 옮겼다. 이번에는 글쓰는 공간이 아니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웹툰을 그리기 시작했다! 구체관절인형이나 롹밴드는 진작에 졸업했지만, 웹툰만큼은 꾸준히 보고 있었다. 볼 수 있었다. 세계 어디에 살든 인터넷만 있으면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대부분 무료라서 나(빚쟁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네이버와 다음의 웹툰 서비스가 생기기 전, 웹툰 1세대라고 불리는 <스노우캣> 권윤주 작가와 <마린블루스>, <마조앤새디> 정철연 작가가 그들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릴 시절부터 봐왔다. 나는 업이 디자이너고, 그림도 잘 그리니까(?) 한번 해보자! 하고 싶어! 잘 할거 같아!! 했었다. 블로그에서 다루던 패션 디자이너의 현실적인 이야기로 10컷의 일상툰을 일주일에 한 번 올리는걸 열심히 유지했다. 그러나 다니던 회사가 내부적으로 점점 개판이 되면서 일이 바빠지자 병행할 수가 없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밤을 새우고 자시고 하는 열정과 체력은 패션디자인 학교를 두 곳이나 다니면서 다 써버린 듯했다. 밤 10시면 침대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이쯤부터 난 정신력과 체력이 할머니가 된 듯하다.)
회사에서 디자인 스케치 맨날 그리니까 난 내가 그림 그리는 손이 빠른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다. 맨날 똑바로 서있는 디자인 스케치만 해서 그런지, 한국의 혹독한 입시미술(?) 훈련을 못 받아서 그런지, 아무리 단순한 2등신 캐릭터라 해도 여러 포즈를 그리는데 한심할 정도로 오래 걸렸다. 눈은 높은데 손이 느리면, 눈의 맘에 들 때까지 손이 계속 고쳐야 한다. 완성까지 억 겹의 시간이 흐른다. 아예 그림을 그린적도 없던 사람이 '이제부터 연습해서 만화가가 되겠어!' 하면 꾸준히 노력하겠지만, 평소에 휙휙 그림 그리던 사람이 갑자기 느려진 손과 마주하니 당황스럽기만 하고 노력할 마음이 안 들었다.
옷을 그리는 손과 만화를 그리는 손은 맥 OS과 윈도우Windows만큼 완전히 달랐다. 옷 그리는 손은 20년간 쓴 맥 OS처럼 편안하고 빨랐지만, 만화 그리는 손은 20년 만에 써보는 윈도우 마냥 버벅거렸다. 또 회사 꺼를 그리다가, 만화 그리기로 모드로 휙 넘어가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윈도우, 맥OS 둘 다 깔아놓은 맥북에서 OS를 넘나들 때 재부팅해야 하는 것 같았다. 맥북 재부팅은 기껏해야 5분 걸리겠지만 나는 하룻밤이 걸렸다! 점심시간에 짬 내서 그림을 그리고 노는 건 절대 불가능하고 주말밖에 못했다. 나는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건가?? (근데 다시 지금의 글쓰기로 넘어오고 나니 휙휙 모드 전환이 잘된다. 난 그냥 취미로 그림 그리는 게 안 되는 거였다.)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어려운 점은 웹툰 그림체에 힘을 빼는 일이었다. 손이 느리다면 막 완벽하게 그리려고 하지 않고 가볍게 그리면 될 일이었다. 아름답고 정교한 하이퍼 리얼리티 인물화 작품을 올리는 계정이 아니라 일상툰이니까, 겨드랑이 털로 그려도 내용이 재미있으면 상관이 없었는데, 처음에는 힘 빼고 하얀 바탕에 졸라맨 그리듯이 대충 그리다가도, 한 두 달이 지나면 겁나게 힘이 들어가서 최대한 현실적인 배경을 넣는다고 3D 프로그램을 받아서 아무도 고증해줄 수 없는 당시의 내 방을 재구성하고 그걸 수채화 필터로 맘에 들 때까지 돌리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러다가 회사 일이 바빠지면 체력과 시간 한계에 부딪혀서 정말 애플 팬슬을 들고 있을 손가락 힘조차 없어서 다시 그림이 흐물흐물 가벼워지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탠션이 올라갔다가, 또 빠지고. 그림체가 춤추는 신장개업 풍선인형처럼 들쭉날쭉하게 되었다.
그렇게 돈 받고 하는 디자인 스케치가 아닌 그림을 그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는 내가 이번에는 유튜브 영상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여기까지 보자면 내 디지털 취미생활은 텍스트 > 그림 > 영상으로 차원이 진화(?) 한 것이다. 아무에게도 안 보여 줄 기획안까지 나름 짰는데 목표 중 하나가 내가 나를 잘 알기에 '쉽게 만드는 포맷'이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또 나를 힘들게 하는 탠션 200% 포맷으로 가버렸다. 나는 날 잘 알았지만 나를 막지는 못했다. 내 유튜브 채널은 결론적으로 너무 애니메이션화 되었다. 그리고 애니는 웹툰보다 그림을 100배 더 많이 그려야 한다!! 5분짜리 영상을 만들기 위해 일주일 동안 작업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결국 멈췄다. 괜히 고수들이 '힘을 빼야 된다'는 대사를 날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하수였다. (여기서 내가 고딩 때부터 봐온 일러스트레이터 2da님에게 존경을 표시한다. 그녀는 진정한 고수이며 아티스트다. 20여 년째 가벼운 그림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그림체를 유지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한 건지 그냥 타고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의 그림은 내가 보기에 힘을 적절히 뺀 그림이다. 그녀의 첫 번째 책 <이다의 허접질>이 캐나다 본가 어딘가에 아직도 꼽혀있다.)
유튜브를 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눌수 있다. 크리에이터의 얼굴이 나오냐 마느냐. 기획단계에서 촬영기사(나)가 나를 찍어서 카메라 테스팅을 했는데, 심사위원(나)에게 퇴짜 맞았다.
"웃을 때 턱이 두 겹이네요. 좀 더 살을 빼고 오세요."
그런데 지난 10년간 말로만 다이어트를 한 내가 그렇게 쉽게 살을 빼고 올 수 없었다. 내가 안 나오고 내가 나올 방법은 웹툰으로 이미 등장한 내 캐릭터가 나오는 것이었다. 얼굴이 해결되었으니 목소리가 나올 차례였다. 대본을 써서 목소리를 녹음해보았다. 이번에는 두 번째 후보가 있었는데 네이버 클로바Clova의 인공지능 보이스 다인이었다. 둘이 오디션장(내 방구석)에서 같은 대본을 읽었다. 나는 이번에도 심사위원(윤이콘-남편)에게 퇴짜를 맞았다.
"한국어 딕션이 좀 눌리고 어색하네요."
지난 20년간 여기저기 살다 보니 한국어도 일본어도 영어도 셋 다 발음이 조금씩 어설펐다. 근데 인공지능 보이스 다인이는 당연하지만 정말 찰떡같이 쫀득쫀득 귀엽게 한국말을 잘했다. 결국 다인이가 뽑혔다. 그렇게 내가 그린 웹툰 캐릭터에 다인이의 목소리가 들어간 유튜브 채널 '쇼폴리'가 만들어졌다. 초반에 내 캐릭터는 간간히 리액션을 할 때 등장했다. 이미 그려놓은 웹툰의 장면들을 넣었기 때문에 별로 수공예가 들어가지 않았다. 스토리의 관련 자료-다른 영화나 예능 방송의 클립, 스크린샷이나 이미 누가 만들어놓은 GIF-로 영상을 채웠다. 그런데 이건 또 다른 복병이 있었다. 맘에 드는 자료를 찾을 때까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바에야 내가 그린다!' (병이 또 도졌다.) 그리고 스토리도 점점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른 이미지로 대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점점 더 수공예 비중이 올라갔고, 마지막에 올린 <뉴욕에서 월세방 찾아 삼만리~아이폰을 어떻게 도둑맞았는가~>상중하편은 거의 99% 애니메이션이 되어버렸다. 이 영상들은 유튜브에 기존에 있는 장르 어디에도 끼지 않는 아웃사이더 영상이 되었다. 먹방도 아니고 언박싱도 아니고 영화 리뷰도 아니고 브이로그도 아니어서, 카테고리를 선택하기도, 태그를 하기도 애매했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장르 (일상툰이 아니고 일상애니? 일상툰쇼?)를 만든 거였는데, 장르를 만들었다는 거창한 표현을 쓰려면 꾸준히 해서 알려져야겠지만, 고작 14편 정도 올릴 즘에 코로나 백수에서 프리랜서 직장인으로 넘어가면서, 내 병약한 지구력이 또 한계치 종을 땡땡땡 쳤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영상의 독창성과 퀄리티는 좋을지 몰라도 한 컷 그려서 0.5초 나오는 작업방식은, 너무 오래걸리고 힘들어서 취미영역을 벗어났다.
뭣보다 대본을 쓰는 작가(나)와 영상제작자(나)의 속도차가 너무 심했다.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난 짧게 쓰는 것보다 길게 쓰는 게 편한 사람이다. 구글독의 A4 한 장이 딱 5분 정도의 영상 분량이었는데, 5분 이상으로 가면 영상 만드는 게 너무 오래 걸렸다. 나중에 할 영상 작업이 두려워서 이야기를 짧게 쓰려는 압박이 오는 건 어느 정도 테이크할 수 있었다. 잘라서 다음 편으로 나누면 되니까. 5분 안에 기승전결이 어느 정도 있게 글을 쓰는 것도 뭔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써낸다는 성취감이 있어서 괜찮았다. 문제는 그렇게 휘리릭 여러 편을 나누어서 쓰다 보니 대본을 써내는 속도에 비해 영상을 만드는 속도가 너무 뒤처졌다. 또다시 뇌는 빠른데 손은 느린 장벽에 부딪혔다. 이미 머리로는 3~4편 앞을 생각하고 있는데 일주일 내내 저저저번주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자니 재미가 없었다. (이래서 분업을 하는 것인가!?) 재미없으면 안 하게 된다. 이건 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취미생활이기 때문에 힘들거나 재미없어지는 순간, 더 이상 하는 의미가 없어진다.
이미 그림체와 영상 편집 스타일이 정해져 있으니, 나는 대본만 쓰는 작가를 하고 애니메이터+영상 제작자가 따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0.3초 정도 했지만, 코로나 백수를 몇 개월 하는 동안 저장해둔 돈(내 집 마련 자금! 크흡!)도 많이 썼는데 누군가를 고용할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내 까다로운 취향에 맞게 술술 제작해내는 사람을 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귓속에서 이성 세포가 소곤거리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룹과제 같은 걸 할 때마다 조원들이 한 게 맘에 안 들어서 결국 내가 혼자 밤새서 고쳐버려야 속이 후련한 미련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복병은, 업으로 하는 의류 디자인과 취미로 하는 웹툰 그리기/유튜브 만들기가 겉으로 보기엔 다 같은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기'라는 점이었다. 겉으로 봤을 때 하고 있는 모양생이는 똑같은데, 그리는 내용만 다르다. 뭔가 낮에는 회사를 다니다가 저녁에는 게임을 한다든지, 업과 취미가 좀 달라야 리프레쉬가 될 텐데, 둘이 비슷하면 일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요리사가 퇴근해서 집에 가면 요리를 안 하는 것 같은?? 일상툰 <슬이생활>의 슬이 작가가 초반에 광고회사의 디자이너를 하면서 퇴근 후 무거운 노트북을 싸들고 밤마다 카페에 가서, 낮에 하루 종일 봐서 열기만 해도 토 나올 것 같은 포토샵을 다시 켜고 도전 작가 웹툰을 그리는 생활을 1년 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 보니 그림 그리는 장소가 회사에서 카페로 바뀌었기 때문에 좀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나는 재택근무로 하루 종일 아이패드로 디자인 스케치 업데이트를 하다가, 6시가 돼서 '아 이제 퇴근이다! 취미 생활해야지!' 하고 혼자 말한 다음에 그 자리에서 그대로 똑같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려다 보니, 정신력만으로 '이건 취미생활이다'라고 나 자신을 믿게 만들질 못했다.
그래도 이 두 곳의 디지털 거처와 그 안에 남긴 것들은 폭파시키거나 잠그지 않고 그냥 냅두려고 한다. 얘네들은 적어도 나중에 열어보고 이불킥 할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한 10년 지나면 이불킥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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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의 웃픈 일상 Tragicomic life of Colin - YouTube
유튜브를 쉬고, 2개월이 지나자 다시 뭔가 이야기를 써내고 싶은 욕구 게이지가 꽉 차서 쏟아놓을 곳을 찾았다. 처음에는 유튜브 대본 쓸 때 사용한 구글독Google Doc에다가 일기 쓰듯 했는데, 양이 늘어나다보니 몇 가지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이 만든 서비스라 한국어 맞춤법 검사 기능이 없고, 양쪽 정렬도 이상했다. 영어식으로 단어를 자르지 않고 다음 줄로 넘겨버리는 바람에, 단어 길이에 따라 띄어쓰기가 겁나 늘어날 때가 있어서 눈에 거슬렸다. 아이패드에서 작성하면 문단 중간에 추가로 입력하면 띄어쓰기가 안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서비스하는 글 쓰는 플랫폼을 찾았다. 푸드코트처럼 정신 사나운 곳 말고, 좀 더 독서실처럼 (한국의 독서실에 사실 가본 적 없지만) 조용하고 정갈한 곳을 찾다 보니 브런치에 도달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내 디지털 유목생활은 다시 퓨어한 텍스트 포맷으로 돌아왔다. 내 타자 치는 속도는 내 뇌를 따라갈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동안 나는 여러 방식에 도전해서 자가진단을 할 수 있었다. 난 그림을 그리고 보는 걸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진득하게 앉아서 만화 같은걸 그리는 건 못하는 유형으로 판명되었다. 직접 하려는 게 아니라 보고 즐기는 마음가짐으로 가야 할 듯하다. 사실 업으로 하고 있는 패션 디자인도, 시즌 디벨롭 초반에 며칠간 스케치만 해야 할 때는 점점 지겨워질 때가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글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 재택근무로 날짜 감각이 사라진 지금, 생각과 이야기를 기록해서 남겨놓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나의 멍청한 뇌 속에서 그냥 소멸될 것 같은 서늘함을 느꼈다. 그래서 나의 지금 최대 관심사인 '어딘가에 꼭 우리 집짓기'를 빌미로 미래의 내 (불쌍한) 건축가에게 겁나 긴 TMI를 방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