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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폴리 Oct 25. 2020

공간 꾸미기에 까다로운 꼬맹이

가 지금까지 살아온 공간들

  되돌아보면 나는 승숙(엄마)의 날갯죽지 밑에 있을 시절부터 공간을 꾸미는 거에 집착하는 꼬맹이었다. 캐나다로 이민 가기 전에 살던 안산의 아파트도 내 방의 벽지나 바닥 장판을 내가 골랐었던 것 같고, 캐나다의 그 2층 집에 입주할 때도, 유일하게 인테리어를 새로 한 건 내 방이었다. 다른 곳은 모두 캐나다의 컨트리풍 그대로 승숙이 맘에 들어해서 내버려 두었었다. 바깥의 초록지붕과 잘 어울리는 잔잔하고 짜잘짜잘한 꽃무늬가 띠엄띠엄 수 놓인 웜톤의 벽지, 그 벽지와 찰떡으로 어울리는 따뜻하고 동글동글한 호박? 꽃? 모양 유리로 된 식탁 위 조명, 1층의 나무 바닥과 2층의 어두운 베이지색 카펫. 내가 쓸 예정인 방은 큼직한 노란 튤립이 애매하게 30센티 간격으로 박힌 벽지였는데, 내가 '꽥! 싫어!' 했던 것 같다. 기억이 생길 때쯤부터 핑크 계열을 좋아했던 나는 벽지도 카펫도 다 인디언 핑크의 톤 온 톤 (옅은 색 벽지에 짙은색 카펫)으로 골라서 바꿨다. 


    캐나다를 뛰쳐나가서는 일본 유학 준비를 위해, 한국에서 1년 정도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구체관절 인형과 한국과 일본의 인디밴드 덕질을 하면서 웅규(아빠)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나는 그 짧은 기간 조차 내가 있을 공간에 누런 색깔은 용납 못한다며 작은 방의 노란 장판을 다 뜯어내고 하얀색 검은색 바둑판무늬로 바닥재를 붙이고 (그 사이에 펑크 취향으로 바뀌어있었다) 벽은 하얗게 칠하고, 천장은 미친 쇼킹 핑크색 페인트를 칠했었다. 습기와 더위에 쪄 죽는 한국의 한 여름에 페인트칠을 한다고, 거실의 에어컨 바람이 안 세어나가게 내 방은 문을 꼭꼭 닫고, 페인트 냄새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고 신문지를 깐 책상 위에 올라가서 미켈란젤로처럼 모가지를 90도로 뒤로 꺾고 천장에 눈이 아플 정도로 찐한 핑크색을 칠하는 나를 보고 승숙이 쯧쯧쯧 하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그 집은 후에 판매되었는데,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 그렇게 특이 취향으로 꾸며놓은 방을 보고 어떤 얼굴이었을지 궁금하다. 사실 그 방의 구석에 있던 큰 장식장을 혼자 못 옮기고, 웅규에게 도와달라고 하기는 이미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 자체가 눈치가 보여서, 거기만 빼고 셀프 시공을 했었다. 이사하면서 그걸 옮겼을 때 거기만 노란 장판 & 실크벽지가 드러났을 것이다!


    처음으로 완연히 돈의 무서움을 느끼며 살게 된 건 웅규와 승숙의 날개쭉지를 벗어나서 자취를 하게 된 일본 유학시절이다. 도쿄에서 월세로 들어간 원룸은 당연히 벽이나 천장을 페인트칠하는 것 따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가성비 좋고 눈에 거슬리지 않는 하얀 계열 아이키아 가구를 들이고, 가끔 바깥에서 누가 버린 가구를 주워 오고, 원단과 실과 마네킹과 패턴용 종이와 교과서들과 물감과 기타등등 벼래별 잡동사니가 쌓여있어서 꾸밀 틈이 없었다. 그저 사진이나 그림을 벽에 조신하게 200장 정도 실핀으로 꼽는 정도만 하고 살았다. 그때는 학교가 너무 재미있고 너무 바빠서 정말로 집은 먹고 자고 과제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다만 중간에 엔화가 두배로 치솟고 생활비 송금은 반토막이 나서, 원래부터 좁던 원룸에 룸메이트가 들어올 공간 마련을 위해서 침대를 팔아야 했다. 이불을 깔 자리도 없어서 무지루시에서 샀던 빈백에 척추를 접어 넣고 자는 패기를 부렸다. 디스크가 안 나간 게 다행이다. 그 집은 졸업과 함께 동일본 지진+쓰나미+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터져서 탈출했다. 집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방사능을 피해야 했다.


    뉴욕에 와서 처음 들어간 곳은 브루클린 부시위크에 있는 100년 넘은 집의 지하실이었다. 혁오의 노래에 나오는 그 부시위크Bushwick 말이다. 처음에는 힙hip 한 동네의 넓고 싼 방에서 살게 되어서 좋다고 들어갔다. 역시 또 가난한 유학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얀 아이키아 가구들로 채우고 망사 커튼에 바닐라향 초를 켜놓고 나름 애정을 붙였지만, 10 개월 후에는 나와 루카스(고양이)의 정신과 신체의 건강을 위해 탈출해야 했다. 인생에서 살아본 곳 중에 아마도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똥과 해충에 시달렸다. 1층에는 콘크리트로 발린 1평 남짓한 뒷마당이 있었는데, 룸메이트 중 한 명이 큰 개를 키우면서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빠서 산책을 못 시키고 대신 그 마당에서 똥을 싸게 하고 치우질 않았다. 지하실의 어둠 속에 살던 내가 1층으로 올라오면 주방인데, 주방도 창문이 하나도 없어서 햇볕을 쬐려고 뒷 문을 열면 개똥밭이 나를 반겼다. 벽과 천장과 바닥 사이에는 쥐들이 한 두 마리도 아니고 영화 <300>의 전쟁 장면을 찍는 것 마냥 우르르 쾅쾅찍찍캑캑캑 하며 몰려다녔다. 내 방에는 정말 농담이 아니고 어릴적 <톰과 제리>에서만 봤던 레알 쥐구멍이 발견되어서 비닐 껍데기를 쑤셔 넣고 박스 테이프를 이중 삼중 발랐지만 한동안 계속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는 심지어 어디선가 쥐를 한 마리 잡아와서 내 방바닥에 자랑스럽게 널어놓았었다. 여름이 되자 보이지 않는 곳곳의 쥐똥과 마당에 널린 개똥들로부터 생성된 파리들이 우글대기 시작했고, 지하실에 살던 나는 성경에 나오는 재앙 같은 파리떼를 겪었다. 70년대에 생산이 중단된 줄 알았던, 필름통 안에 돌돌 말려있는 끈적거리는 누런 파리 테이프를 방 안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매달아놓아야 했다. 어떤 테이프는 살아있는 파리가 하도 많이 달라붙어서 테이프 전체가 붕붕 좌우로 움직였다. 한 번은 과제로 옷을 만드느라 밤새고 기절하듯이 침대에 누웠는데 정확히 내 귀가 안착한 지점의 베갯잇 속에 엄지발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들어가서 부시럭 거리고 있었다. 수면부족으로 몽롱한 정신상태를 혐오와 짜증이 이겼다. 곧바로 베개를 털어서 방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죽였는데 무슨 무기로 죽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망치였나. 그때 쥐를 잡는다고 쥐구멍 앞에 망치를 갔다 놓았던 것 같기도 하다. 윤이콘(남푠)씨는 내가 벌레를 잘 잡아서 결혼한 거라고 나중에 실토했다. 


    그러하였던 악명 높은 브루클린 지하 던전을 탈옥해서, 처음 퀸즈의 이 투베드룸2-bedroom 아파트로 이사 온 첫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큰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성실한 관리인 아저씨가 집안을 깨끗이 갈고닦아놔서 마룻바닥이 번쩍거렸다. 하지만 월세가 2300불이었다. 대략 260만원. 이 집을 소개해준 한국인 부동산 에이전트가, 거실에 가벽을 치면 방이 3개가 되니, 나는 큰 방에서 지내고 나머지 두 방에 룸메이트를 들이면 내가 책정하는 금액에 따라 혼자서 내는 금액은 1000불 이하로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혼자 살려고 원룸을 렌트하면 한 달에 1500불은 내야 했는데, 그것보다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약했다. 다른 뉴욕의 아파트들에 비해 거실도 넓어서, 가벽을 쳐도 거실 공간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가벽을 치던 날은 역시 좀 우울했다. 거실에는 발코니가 달려있었고, 남쪽을 향한 큰 유리 슬라이딩 도어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눈부셨는데, 딱 공간을 반으로 쪼개서 가벽을 설치하고 나니 주방과 남은 거실에 어둠이 드리웠다. <애니매트릭스>*에서 인간과 인공지능로봇들이 전쟁을 하다가, 태양광 충전을 하는 로봇들의 에너지 공급을 끊어서 죽이려고 인간들이 하늘을 시커먼 연기로 가득 메워버렸던 장면이 떠올랐다. 난 한 달에 600불을 벌기 위해 거실과 주방의 햇빛을 포기했다. 내 방에는 햇빛이 잘 비치니까 괜찮을 거라고 셀프로 마음을 다독였다. 

(*영화 <매트릭스>의 찐팬들만 봤을 것 같은, 시리즈의 1.5편으로, 매트릭스 세계를 배경으로 여러 나라에서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모아놓았다.)


    그때는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이 생기면 더 좋은데로 이사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맨해튼의 천장 높은 콘도라던가, 그런대로 갈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한 여름에 브루클린 지하실에서 이 집으로 짐을 나르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그때가 되면 부자가 돼서 포장이사를 맡길 것이라 다짐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난 아직도 이 집에 살고 있다-!) 


    졸업 후 직장이 생기고, 바라고 바라던 대로 윤이콘 씨와 같이 살게 되었을 때, 나는 룸메이트들과 이별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벽을 걷어내고 키친과 거실에 햇빛을 되돌려놓고 싶었다. 신혼집이니까 우리 둘(+루카스)이서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윤이콘 씨가 말했다.


"당분간은 룸메분들과 같이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룸메이트분들은 부담스러운 뉴욕 렌트비를 같이 부담해주는 귀한 분들이다. 그분들 덕분에 우리는 앉아서 한 달에 1500불 정도를 벌고 있었다. 땅을 판다고 1500불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 여기서 좀 더 허리띠 매고 살다가, 이사 가자!"


    룸메분들의 방을 제외하면, 우리는 사실상 화장실 딸린 마스터 베드룸이 있는 거실+안방 구조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뉴욕에서 젊은 커플이 사는 아파트라치면 보통 이상이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룸메이트분들은 내가 6장짜리 약관에 서명하게 만들어서인지는 몰라도, 마찰 하나도 없이 깨끗하고 조용하게 잘 지내는 좋은 분들이었다. 


    당장 새로운 집으로 갈 수 없으니, 나는 있는 공간을 어떻게든 요리조리 꾸미고 바꾸게 되었다. 혼자 살던 공간에서 같이 살기 위해 우리는 최적의 가구 배치를 위해서 여러 번 바꾸었고, 지금의 상태에 다다랐다. 이 이상은 뭔가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집에 살면서 렌트 세입자가 할 수 있는 허용범위 안의 셀프 인테리어는 다 해본 것 같다. 뉴욕은 세입자가 벽에 못을 박고 자시고 하는 것에 인심이 후한 편이다. 벽은 대부분 석고보드와 페인트칠로 되어있어서 뚫린 구멍을 막는 게 꽤 쉽다. 페인트 색이랑 똑같은 하얀 지점토로 막고 사포질하고 페인트 칠하면 거의 안 보인다. 사실 이 집에 이사 온 첫날부터 숨겨왔던 나~의 선반 괴물 본능이 깨어났었다. (웹툰 <어쿠스틱 라이프>에서 난다가 집안 여기저기에 너무 많이 선반을 달자, 한군이 '야 이 선반 괴물아'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존에서 가장 저렴한 $25짜리 전동드릴을 사고 아이키아에서 각종 선반과 브래킷과 벽에 달수 있는 소품들과 가구들을 사모아 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조립형 원목 캣타워를 이고 지고 오기 전에는, 루카스를 위한 스탭 바이 스탭 벽 선반식 캣타워도 만들어 붙이고, 옷장도 오픈 형식으로 벽에 붙였었다. 온갖 옷만드는 재료와 책과 도구들도 벽에 걸려서 집에서 하얀 빈 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윤이콘 씨가 이 집에 와서 처음 한 말은 이거였다. 


"와우, 벌집이네."


    책임감 있는 그의 눈에는, 이게 죄다 나중에 이사할 때 원상복구를 위해 메워야 할 구멍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룸메이트들을 유지하며 몇 년 살다가 돈이 모아지면 우리만의 공간으로 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직장이 날아가고, 차곡차곡 모으던 우리 집 마련 자금은 비상금으로 조금 깎아먹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다. 3개월 만에 프리랜서지만 직장을 다시 찾기도 했고, 안정적인 풀타임도 계속 구직 중이다.


    되짚어보면 꼬맹이 시절 졸업 전부터 내 꿈은 이미 내 브랜드를 차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조금 현실을 미리 캐치한 편이었다. 이렇게 돈에 허덕이는데 내 브랜드를 차리긴 개뿔, 빨리 취직해서 비자도 받고, 혼자 먹고 살 돈도 벌어야 했다. 그리고 더 궁극적인 목표는 윤이콘 씨와 루카스와 함께 셋이서 사는 것이었다. 그때는 취직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고, 비자를 받을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모든 게 다 너무 불투명하고 답답하고 막막해서, 그 목표는 저 멀리 구름 위에 있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근데 그 목표를 이룬 지 올해로서 5년째다. 여전히 룸메이트들도 함께 여전히 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우린 셋이 살고 있어서 행복한 편이다. 사실 너무 행복해서 다들 살이 좀 쪘다.


    승숙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촉수론’으로 불린다. 원하는 쪽으로 촉수를 뻗치고 있으면 언젠가 그쪽으로 가게 되어있다는 이론이다. 작고 이쁜 집을 짓고 윤이콘 씨와 데크에서 바베큐를 해 먹고 루카스가 중정에서 뛰노는 그림으로 촉수를 뻗치고 있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루카스가 지금 10살이라 시간이 정해져 있다. 고양이 수명은 길면 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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