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차별인 듯 아닌 듯 불편함에 대처하는 법
사백여 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은 짧은 하굣길. 정신없이 폴짝 거리는 남자아이 둘과 다니다 보면 집으로 돌아오는 이 짧은 길도 이벤트 가득한 모험의 여정이 된다. 큰 공원을 끼고 있는 길 위에서 봄에는 엄마 아빠를 따라 걷는 아기 오리들도 만나고, 가을이면 알이 굵은 도토리를 주머니 가득 줍기도 한다. 더운 날에는 학교 앞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나무 그늘에서 쉬고, 추운 겨울에는 살짝 얼어붙은 연못에 돌을 던져 얼음을 깨고. 우리의 하굣길은 꽤 재미나고 신나는 일로 가득했다.
모험을 하다 보면 원래 뜻하지 않은 곤경에 처하는 법. 종종 즐거운 하굣길 어드벤처를 망치는 역경에 부닥치곤 했다. "으악! 엄마 아아아아" 외마디와 함께 급습하기도 하고, 때로는 쥐도 새도 모르게 붙어 집까지 잠입하는 악당은 바로 개똥! 한창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나쁘고, 위험한 것이 똥이라고 생각할 나이인 아이들이 처음으로 개똥을 밟았을 때,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똥을 싸는 강아지는 지구 상에서 모두 없애 버려야 악을 쓰고, 개똥을 치우지 않는 주인들은 백십천만 유로의 벌금을 내게 해야 한다고 독설을 날렸다. 그까짓 개똥을 밟은 게 억울하고 분해 길길이 날뛰는 아이들에게 늘 말해줬다.
‘‘똥이 더럽고 냄새도 나서 기분이 나쁜 건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세상의 모든 강아지들은 똥을 싸고, 그 어떤 법을 만든다 해도 개똥을 치우지 않는 주인은 늘 있어. 그렇다고 우리가 지구 상의 모든 강아지를 없애버릴 수도, 모든 주인들이 항상 약속을 지키게 만들 수도 없잖아. 아무리 화를 내 봤자 우리 기분만 망치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리고 이건 그냥 똥일 뿐이야. 똥! 더럽긴 해도 우리를 다치게 하는 것도, 목숨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에잇! 똥 밟았잖아! 딱 이만큼만 화내고, 신발이나 닦자. 괜히 기분 망치지 말고.‘‘
몇 번의 경험 끝에 아이들은 이제 개똥을 밟아도 길길이 날뛰지 않는다. "아이 씨! 샤이세!"(Scheisse! - 제기랄 정도 되는 독일어 비속어로 본래 뜻은 ‘똥‘이다. 평소에는 쓰지 못하게 하는 말이지만, 똥을 밟았을 때는 예외적으로 쓸 수 있게 허락해 준 욕이다.) 찰지게 한마디 내뱉고는 풀밭에 신발 바닥을 딱 붙여 비벼 닦고 제 갈길을 간다. 이제는 하찮고 별것도 아닌 개똥 따위가 우리의 즐거운 하굣길을 망쳐 버리는 일은 없다.
아이들에 비해 조신하고 참한(?) 나는 공원에서 개똥을 밟는 일은 없지만 똥 밟은 아이들에게 해주던 말을 나 스스로에게 건네며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바로 '가만, 이거 인종 차별이야 뭐야?‘라는 의심이 들었을 때! 난민 사태로 네오 나치가 득세를 하고, 코로나로 아시아 혐오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봉변당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20년 가까이 외국에 오래 살면서 대놓고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받은 적도 없고. 그렇지만 인종 차별인 듯 인종 차별이 아닌 듯 불편하고 찜찜한 대우와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똥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똥을 밟은 것 같이 기분이 꾸리꾸리 하고 뒤가 깔끔하지 않달까.
내 앞 손님에게는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하던 마트 점원. 나에게는 인사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스름 돈을 계산대 위에 툭 던져 놓쳐 놓는다. 신경 쓰지 않는 척, 의연한 척하며 동전을 한 잎 한 잎 줍지만, 심장이 괜히 쪼그라들었다. 적선받는 각설이가 이런 심정일까 싶은 생각에 서글퍼져서. 기분 좋게 나갔던 쇼핑 나들이도 짜증으로 범벅이 된 마음만 안고 서둘러 마무리할 때도 있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청소년들이 키득거리면서 내 뒤통수에 ‘니하오, 곤니찌와‘라고 내뱉었을 때, 치솟는 울화에 혼자 씩씩 거렸다. '이 무식한 것들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니? 나는 한국인이거든! 모르면 물어보든가! 나한테 말 걸을 용기도 없는 것들이 뭐 재미있다고 낄낄거려!‘ 속으로 훈계를 하고, 삿대질을 하느라 예쁜 옷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고, 맛있는 맥주는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아직 한마디 말도 안 했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미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우체국 직원은 또 어떤가. 그러면 괜히 긴장이 돼서 단번에 굳는 혀와 입술. 역시나 그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평소에는 잘하던 말도 어버버 어버버 거리게 된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이 어찌도 아리던지.
처음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는 억울해했고, 분해서 가슴을 쳤다가, 자책하기도 했다. '내가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으면 당하지 않을 억울함이었을까? 독일어로 똑 부러지게 맞받아쳤으면 속이 시원했으려나… 아냐, 그래도 외국인인 내가 먼저 생글생글 웃고 친절하게 다가가는 게 맞지 않나? 그렇다고 너무 알아서 슬슬 길 필요는 없는 거잖아. 얕잡아 보이고 싶진 않다고! 그런데 이런 것도 인종 차별이라고 할 수 있나? 그 직원이 원래 이상하거나 무뚝뚝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 별것도 아닌 것 갖고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잠 못 드는 밤 이불 킥은 기본이고, 괜히 그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기분이 우울했다.
자기 최면의 힘이었을까 아님 세뇌 교육의 효과였을까? 어쨌든 등하굣길에 개똥 밟은 아이들을 몇 차례 설득하면서 내 마음속에서도 서서히 변화가 생겼다. 혐오 범죄나 인종 차별적인 행동은 반드시 사라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 국가와 개인은 모든 수단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긴가민가해서 찝찝함을 남기고 기분을 살짝 더럽히는 정도의 시선과 대우! 이까짓 건 이제 개똥 취급하기로 했다. 똥을 싸는 강아지가 세상 도처에 있듯, 타인종 타문화를 가진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할 것이다. 그 어떤 법으로도 길거리의 개똥을 막지 못한 것처럼, 이 개똥 같은 상황들도 100%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애매한 인종차별을 그저 찜찜한 개똥으로 취급 하기 시작하면서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많이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길바닥에 있던 개똥, 그냥 재수 없이 밟은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나한테 왜 그랬을까? 내가 뭘 달리 했어야 하나? 내가 여기서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라며 억울하거나 잘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으니 큰 정신적 타격 없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분이 잠시 더러울지언정, 그 누가 오랫동안 속앓이를 하며 마음속에 똥을 담아두겠는가. 비겁하고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심신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방어전략. 그게 바로 내가 ‘개똥‘을 취급하는 방법이다.
아이들은 즐거운 하굣길 모험을, 나는 독일 생활이라는 모험을 하다 보면 앞으로도 개똥을 밟을 일이 수두룩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똥에 분개하거나, 개똥 따위가 우리의 행복한 나날을 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개똥을 밟으면 ‘에이, 씨!‘ 한번 탁 내뱉고, 쓱쓱 닦아내면 된다. 닦은 신발을 고쳐 신고 우리는 다시 제 갈 길을 즐겁게 나아가면 그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