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애매한 한국 영화, 왜 타락하지도 저항하지도 못하는가
1. 한국영화는 망했다
“한국영화는 망했다"는 말은 오늘날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뿐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 들 사이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현재의 한국영화는 대체로 “재미있는 오락 영화” 혹은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의미있고 메세지가 강한 예술 영화”라는 큰 두 축으로 받아들여진다. 관객들은 영화가 다행히 재미있었으면 만족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만약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신랄한 평가를 시작한다. 오락영화를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하면 이 영화는 대기업의 자본에 타락했다고 비판하고, 예술영화를 보러 갔다가 실망하면 저항에 실패했다고 평가내린다.
그런데 이러한 이분화된 평가 구도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채 흥행도 실패하고, 비평 적 인정을 받는데도 실패한 영화들도 존재한다. 이 영화들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장에 걸 렸다가 빠르게 사라진다. 관객들은 말한다. “이러니까 한국영화가 망하지. 요즘 진짜 볼 영화 가 없어.”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경험했고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는 입장에선 씁쓸함과 함께 의문이 든다. 볼 영화가 없다는 말은 정말로 오늘날의 한국영화는 볼 가치가 없을 정도로 망했다는 뜻일까? 혹시 우리가 영화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식 자체가 어떤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5년 개봉한 영화 <된장이>는 이러한 어중간한 실패의 한 사례다. 이 영화 또한 자본에 타 락했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하고, 저항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무력하다. 이 어 중간함은 단순한 미숙함의 결과일까, 아니면 오늘날 한국영화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평가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한 하나의 증상일까?
본 글은 오늘날 사람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그 환상이 작동하 는 산업적 구조를 탐색하고자 한다. 또 알렌카 주판치치가 말하는 ‘섹슈얼리티의 존재론’ 개념 을 통해 <된장이>를 읽어보고, 타락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실패의 양상을 하나의 공백으로 드러내보고자 한다.
2. 섹슈얼리티의 존재론이란 무엇인가?
섹슈얼리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성 정체성, 성 취향, 또는 성 생활 같은 개념을 떠 올린다. 그러나 주판치치는 <What Is Sex?> 라는 책을 통해 섹슈얼리티는 어떤 내용이나 정 체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섹슈얼리티가 무엇인가? 주판치치는 섹슈얼리티가 무엇인 지 사유하는 방식부터 그동안과는 다르게 접근한다.
우리는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의미는 늘 자기동일성(self-same)을 추구한다. ‘나는 나다’ 라고 유지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개념 안에는 항상 그 개념이 규정하지 못하는 나머지가 있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타자가 존재하는 것이다(그 타자는 내 가 성장하면서 들어온 엄마의 말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 사회의 규범일 수도 있 다. 결국 외부의 흔적이 내 안에 자리 잡은 타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개념이 포섭할 수 없 는 나머지, 잉여, 그것은 의미화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 주판치치는 섹슈얼리티를 거기서 찾아낸다. 내 안의 ‘나를 나이도록 하지 못하게 하는‘ 타자의 존재, 질서가 자기 자신과 일치 하지 못하는 지점, 개념의 자기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공백. 그것이 바로 섹슈얼리티라는 것이다. 즉 주판치치는 의미론적으로 보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보면서 섹슈얼리티를 새롭게 정 의내린다. 아니 ’정의내린 것‘이라는 표현도 주판치치적 의미로는 맞지 않겠다. 주판치치는 섹 슈얼리티의 존재론적 위치를 발견하고 열어주었다.
여전히 의문이 들 수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왜냐면 우리는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확실한 의미를 원한다. “그래서 섹슈얼리티가 뭐라는 거야? 이거라는 거야? 저거라는 거야?” 그 질문들에 대해 주판치치는 말한다. “이거이기도 하고 저거이기도 하다는 거야(both and). 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neither nor) 거야.” 질문을 던진 사람은 더 미치 고 환장할 수 있겠다. “아니 그래서 도대체 섹슈얼리티가 뭐냐고!” 주판치치의 섹슈얼리티는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하나의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립으로는 사유할 수 없는 공백이다. 남성과 여성을 각각의 원으로 대립적으로 보자면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원 안에, 그리고 여성 의 원 안에 ‘있으면서 있지 않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비-존 재’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남성의 원과 여성의 원을 대립적으로 상상하지 말 고 겹쳐보면 된다. 남성의 원과 여성의 원이 겹쳐지는 교집합의 지점, 그곳이 바로 섹슈얼리 티가 비-존재하는 위치다. 남성이기도 한데 남성이지만은 않은 위치. 여성이기도 한데 여성이 지만은 않은 위치. 이 겹쳐진 틈은 어떤 정체성으로도 포섭되지 않고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자리다. 그렇게 개념으로 완결되지 않는 구조적 틈이 바로 섹슈얼리 티의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주판치치는 섹슈얼리티는 그 겹쳐진 틈이기 때문에(자기동일성을 깨버리는 공백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대상 같은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존 재하는 구조적 균열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 ‘의식의 반대’라는 대립항으 로서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의 반대는 ‘의식적이지 않다’이다. 따라서 주판치치가 말 하는 무의식은 긍정과 부정이 같아지는 위치다. ‘의식적이다(긍정)’과 ‘의식적이지 않다(부정)’ 는 원의 교집합(겹침) 부분에 바로 무의식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긍정과 부정이 같아지는 것 을 헤겔은 ‘부정성(negativity)’라고 불렀다. 이 무의식의 이중성 때문에 우리는 이 개념이 쉽 사리 와닿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중성을 없애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면 깔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이 이중성을 잘 살펴봐야한다. 이 이중성은 우리가 지배할수도, 제거해버릴 수도 없는 부분이다. 좀 더 쉬운 예로 2=2 라는 공식과 2+0=2 라는 공식을 생각해 보자. 이 공식은 결국 2라는 똑같은 결과값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공 식 2+0=2에는 0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 0이 바로 (왼쪽항의) 2를 2이게 하지 않는 나머지이자 잉여, 공백이고 무의식이자 섹슈얼리티다. 우리는 이 0과 용감하게 대면해야 한다.
3. 한국영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환상
그렇다면 이제 한국영화로 시선을 돌려보자. 한국영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무엇인지 탐구해보기 전에 먼저 환상에 대한 개념을 정의내려보아야 한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 한 대상>에 의하면 라캉/지젝의 환상은 “속임”, “거짓말”이 아니다. 환상은 우리가 세계를 견 딜수 있게 해 주는 구조다. 이 세계가(사회가, 나라는 존재가) 사실은 불완전한데 그 사실(실 재의 사막)과 직면하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알면서도 환상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환상 은 호모사피엔스들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한 산물이고 집단적 자기기만이다. 그런 이유로 환상의 위치는 지식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다. 우리는 환상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지식적으 로는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행위를 한다. 그 행위를 통해 환상이 계속 유지되 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사실은 온전한, 위대하기만 한 그런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같은 말이 즐겨 사용되고, 심지어 나르시시스트 엄마와 인연 끊는 과정을 그린 영화(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같은 것도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부모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행위를 한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유교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남아 있는 국가에서는 더욱 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모가 실제로 존경할만한 존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부모라는 위치가 존경의 행위를 요구하는 구조다. 유 교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이런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환상이 지식이 아니라 행위에 위치한다는 말은, 환상이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 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느냐’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영화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넘어가 보자. 관객들은 한국영화 에 대해 어떤 것을 기대하고,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에 집중해선 안 된다. 한국영 화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려면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 함으로써, 어떤 행동을 지속하느냐에 있다. 결국 우리는 오늘날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평가하 고 판단하는 방식, 구조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구조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관객의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재미있다와 재미없다. 의미있다와 의미없다. 재미를 찾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오락영 화를 기대한다. 별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팝콘무비를 바라고 극장을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영화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재미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재미없다는 말은 바로 “300억 들여서 이런 쓰레기를 만들었다고? 돈 아까워 진짜” 같은 결론으로 넘어간 다. “CJ 영화는 재미없다.” 같은 리뷰가 그 예시다. 대기업의 큰 돈을 받고 유명 영화감독이 붙고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고, 큰 돈을 들여 어마어마한 세트장도 짓고, CG 범벅을 했는데 결국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는 자본에 의해 타락한 영화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또 다른 입장은 의미를 찾는 관객들의 입장이다. 이런 관객들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 영화를 보고 나오면 할 이야기가 많은 영화, 어떤 사회적 통찰을 준다거나 하면서 자신의 지 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그런 영화를 기대한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본 영화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날이 서있지 않다, 좀 더 뾰족하면 좋았겠다, 어떤 메시지가 안 느껴진다, 그래서 말하려는게 뭐야? 돈 아까워 진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영화들은 자본에 대한 저항에 실패하고 타협해버린 위치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실패한 한국 영화는 두 종류의 위치 에 놓이는 것이다. 타락해서 실패하거나, 저항을 못해 실패하거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재미와 의미라는 이 두 요소가 바로 지젝식으로 말하면 동 일한 환상의 두 얼굴이라는 것이다. 즉 재미가 없어서(자본에 타락해서) 영화가 실패했든, 의 미가 없어서(저항에 못 이겨서) 영화가 실패했든 이 두 판단은 한국 관객들 자신이 만들어 놓 은 환상 속 영화 평가 구조의 틀 안에 있다. 재미를 요구하는 관객과 의미를 요구하는 관객은 좋은 영화를 추구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이미 ‘좋은 영화는 이 렇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기준을 전제한 채 영화를 소비하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성공하는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일테다. 오락적으로 재미를 완전히 충족시켰기에 성 공한 영화와 메시지나 주제의식이 오늘날의 어떤 모습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고 의미가 충분 하기에 성공한 영화. 그에 더해 성공한 영화의 평가 구조에는 하나가 더 들어간다. 재미도 있 고 메시지도 좋은 영화(이것이 아마 최고로 완성도 있고, 소위 말해 ‘작품성 있다’는 영화로 받아들여지겠다).
여기서 한국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어디에 있는가? 환상은 영화의 성공과 실패를 영화 그 자체의 문제로 생각하며 영화에 별점테러를 하는 평가 구조, 그 자체에 있다. 이 구조 안 에서 절대 질문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될 수 있겠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났을 때, 그 영화에 대한 선택이 성공적이었다면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재미있었 다.” “의미가 큰 영화다”, “재미도 의미도 둘 다 있어서 좋다”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영화가 실패한다면 우리는 별점테러를 한다. “돈 아깝다” “연출을 못했다” “연 기가 구리다”는 평을 덧붙이면서. 그러나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왜 우리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재미있느냐, 의미있느냐 두 가지뿐인 것인가?” 또는 “이 영화의 실패가 구조의 문제일 가능성은 있을까?” 즉, 우리는 어떤 영화가 실패했을 때 그 실 패를 자본의 구조, 산업의 조건, 관객 자신이 이미 내면화한 어떤 틀의 문제인가에 대한 고민 은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한국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영화의 성패를 언제나 ‘재미’와 ‘의미’라는 기준으로 평가함으로써 그 영화를 둘러싼 산업적, 사회적 구조와 관객 자신의 위치 를 질문하지 않게 만드는 판단의 틀에 있다. 관객은 별점을 달면서, 리뷰를 쓰면서 자신이 영 화를 비판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만 판단하고, 그 판단 후 재미있 어 보이거나 의미있어 보이는 영화가 아니면 아예 소비를 하지 않는 그 행동에 환상이 위치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한국 영화의 생산 구조는 계속 그대로 유지되기만 한다. 비극적 이게도 관객들은 자신들의 환상이 한국영화가 망하는데 일부분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관객들은 그저 끝없이 비판한다. “왜 갈수록 한국영화는 재미가 없지? 이제 한국영화 안 봐!”
그렇다면 이제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영화감독이나 작가, PD는 이야 기를 쓸 때 무엇을 신경쓰는가? 그들은 글을 쓰기 전 무슨 고민을 할까?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가?’ 그 고민은 순진한 고민이고 그런 고민을 한다고 하면 업계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고민을 한다고? 너 아직 프로가 되지 못했구나.” 아이러닉 하게도 ‘프로’들이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은 투자가능성이다. 내가 쓰려 하는 이 이야기 가 예술적인가 아닌가, 작품성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투자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산업에 대한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창작자의 행위 속에서는 어떻게 재생산되는가이다. 창작자 역시 자기 작품의 첫 관객이다. 따라서 창작자 역시 이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관객 의 판단 구조를 이미 내면화한 상태에서, 창작자는 무엇이 쓰고 싶은지보다 무엇이 투자 가능 한가를 먼저 계산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관객의 평가 속에서 만이 아니라 창작자의 선택과 행위 속에서도 계속 재생산되는 것이다.
4. 상업도 예술도 아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어중간한 영화들이다. 2025년 7월 개봉한 <된장이>는 4억 예산의 초저예산 영화였음에도 극장 관객 3,284명으로 대략의 손익분기점(BEP) 8만을 달성하지 못했 다. 관객이 많이 들지 않았고 제작비 회수가 안됐다는 말은 상업적 성공을 하지 못했다는 뜻 이다. 그렇다면 예술적으로는 성공했을까? <된장이>는 영화제 한 군데에서 초청을 받기는 했 지만 그 초청은 비경쟁 부문이었다. 결국 영화제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뜻이고 이 영화는 상업도 예술도 아닌 애매한 영화라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씨네21의 별점과 평점은 이 영화의 애매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박평식(별 두 개): 구수한 듯 퀴퀴한 놀이”, “이용철(별 두 개반) 하이고, 순진인지 순수인지 모르겠으나”, “최현수(별 두 개 반) 구수하지도 깊지도 않은 싱거 운 무해함.”
이런 애매한 영화는 상업영화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예술영화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사 람들은 이런 영화들을 위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독립영화, 다양성영화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상업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양성영화라는 카테고리는 사실 잘 따지고 보면 의 미가 불분명하다. 다양한 영화제작을 지원해주는 국가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 게시판에는 이런 질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다양성영화와 예술영화의 다른점과 그 정의가 알고 싶네요. 독립영 화와 다른점은 무엇이고요.” 그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답을 옮겨본다.
다양성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계량적인 갸념이 아니라 비평적으로 소통되어 온 약간은 모호하고 질적인 개념이기 때문 입니다. 다만, 영진위에서 지원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위와 같은 개념을 사용할 경우 필요에 따라 설정한 기준들은 있습니다. 즉 아래의 설명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정의라기보 다 진흥사업의 필요에 따른 기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양성영화는 극장에서 쉽게 관람하기 어려운, 주류 장르영화가 아닌 다양한 국적, 장르, 저예산 등의 소수성을 표방하는 범주를 담 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국가별 점유율 1% 미만 국가의 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의 비극(drama)영화, 단편영화, 실험영화 등의 형식을 가진 영화를 포함합니다. 예술영화는, <1. 작품 가치가 뛰어난 국내외 작가 영화, 2. 소재, 주제, 표현방법 등에 있어 새로운 특색을 보 이는 작품으로서 창의적, 실험적인 작품, 3. 한국 내에서 거의 상영된 바 없는 개인, 집단, 사 회, 국가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문화 간 지속적 교류, 생각의 자유로운 유통, 문화다양 성의 확대에 기여하는 작품, 4. 예술적 관점,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가치가 있는 재개봉 작품> 등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독립영화는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일명 ‘인디영화’라고도 한 다. 이윤 확보를 1차 목표로 하는 일반 상업영화와는 달리 창작자의 의도가 우선시되는 영화 로, 주제와 형식, 제작방식 면에서 차별화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독립’이란 자본과 배급망으 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답변이 흥미로운 것은 일단 사전적 정의는 분명하지 않다는 답을 먼저 하고 있다는 것이 다. 그러나 그 후 영진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흥사업의 필요에 따른 기준이 있다며 답을 내린다. 의미는 없지만 행위는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특히 상업영화라는 것은 이윤 확보를 1차 목표로 하는(그래서 큰 돈을 투자 받는) 영화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거장 감독이 큰 자본을 투자 받아 만든 (그러나 재미 보다는 의미를 더 추구하고, 창작자의 의도가 우선시되는 비상업적인) 영화를 만든다면 그것 은 과연 상업영화인가 예술영화인가? 상업적인 예술영화인가? 독립영화는 자본으로부터 독립 되어 이윤보다는 창작자의 의도가 중시되면서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말인데 만약 독 립영화를 만든 창작자의 의도가 상업적 재미를 띈 이야기 구조를 추구하며 이윤을 목표로 해 서 만들어진다면 그 영화는 상업적인 독립영화인가?
진흥사업의 필요에 따른 기준이 이렇게 모호하다는 것은 참 아이러닉한데 그 아이러닉한 겹침 의 지점이 바로 이 애매한 영화들의 위치다. 상업과 예술로는 포섭되지 않는 잔여 영화들의 위치인 것이다. 이 애매한 영화들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들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의 원인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실패로도, 예술영화의 실 패로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그 어떤 실패의 지점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주판치 치가 말하는 섹슈얼리티의 존재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라캉/지젝이 말하는 증상을 발견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애매한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상업이냐 예술이냐라는 환상을 가진 이데 올로기적 분류 체계가 더 이상 실재를 포섭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흔적이다. 따라서 이 영화들의 실패는 개별 작품의 문제라던가 오락이냐 예술이냐를 명확히 선택하지 못한 실패가 아니라 영화에 부여된 선택지 자체가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증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의문이 또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된장이>같은 영화가 망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라는 말인가? 한국영화가 새롭게 나아가야할 방향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이런 애 매한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또 다시 대립 적인 질문이다. 망한 한국영화를 구출하기 위해 외부에 뉴웨이브 한국영화라는 이상, 새로운 원을 만들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젝적, 주판치치적 사고가 아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예술의 자리는 어디인가? 좋은 영화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까?
5. 좋은 예술의 자리는 어디에?
좋은 영화의 존재는 겹침의 지점, 상업영화 같으면서도 상업이 아닌, 예술영화 같으면서도 예 술이 아닌 이 겹침의 지점에 있다. 그 틈(공백)에 존재하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메시지를 완 결하지 않고, 관객의 동일시를 조직하지 않는다. 무엇에도 열려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애매모호 함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는 확실한 해답, 의미, 전체성(공백 이 없는 닫힌 원)을 원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사고를 하기 위해 우리의 시선을 계속 열어야 한다. 쉽사리 정의될 수 없는 영화들, 애매한 영화들이 좋은 영화 다. 타락에도, 저항에도, 성공에도 실패에도, 어떤 것에도 귀속시킬 수 없는 영화가 좋은 영화 의 가능성이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들을 리스트업 해놓은 것이 있었고 그 영화들을 예시로 들려 했지만 적지 않기로 한다. 왜냐면 주관적인 개인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들을 말해 버리면, 그 영화들과 비슷한 결의 영화들이 ‘한국영화가 가야 할 방향에 있는 좋은 영화들’이 라는 새로운 원 안에 들어가면서 또 다시 이 원이 닫히고, 대립구도로 갈 것 같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는 열린 영화다. 모두 생각하는 좋은 영화의 기준이 다 달라도 괜찮을 것이다. 각자 가 생각하는 그 열린 영화들을 떠올리다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들은 서로가 서로에 게 열린채 어떤 겹침의 지점들이 또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된장이>는 좋은 영화의 위치에 있는가? <된장이>는 상업의 공간에도, 예술의 공간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 말은, 겹침(틈, 공백)의 공간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영화란 말인가? 슬프게도, 그 또한 아니다. 된장이는 겹침의 공간 에 진입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남아버린 영화다.
지젝은 말했다. 혁명을 하는데 있어 적절한 때는 없다고. 혁명은 늘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다. 수 많은 혁명들은 실패한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함으로써 성공한다. <된장이> 감독으로서, 이 영화에 어떤 의미를 사후적으로 찾아 본다면, 이 영화가 수 많은 실패한 혁명의 하나로서 작 동하면 좋겠다. 타락하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된장이>같은 애매한 한국영화가 어중간한 실패 의 혁명적 위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