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을 읽고
1. 글의 목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제목을 처음 읽었을 때 이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글은 텅 빈 머리로 살아왔던 3개월 전의 본인에게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최대한 쉬운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젝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라는 표지의 홍보 문장에 낚여 책을 집었는데 이론을 처음 접해서 당황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 무엇을 기대하고 책을 읽는가?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아이러니가 있을까?’ ‘어렸을 때 상상한 내 모습은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는 나름 열심히 사는데 왜 계속 돈을 벌기 위한 노예 같은 느낌만 들까?’ 그 의문을 파헤치다 보면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이 불공평한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이것들이 바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이겠다.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여성주의, 민족주의 등의 것들이 이데올로기의 예시다. 즉 이데올로기는 집단의 가치, 신념체계를 구성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 질문은 일단 머릿속에 놔두고 이후에 답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이런 이데올로기에 질문이 생겼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용감하게 도전해 봐도 좋겠다. 비록 책의 끝에 마주하게 될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해답이 광활하고 텅 빈 공간(여백)이라 할지라도.
3. 책은 어떤 방식으로 쓰였나?
이 책의 작가는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다. 그는 서론에서 이 책은 ‘헤겔을 구출하기’ 위한 책이라고 밝힌다. 헤겔의 사상이 그동안 20세기 이론가들에게 오독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지젝은 라캉이라는 철학자의 주요 개념들을 도구로 사용해(라캉을 경유해) 헤겔 사상을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겠다. ‘헤겔과 라캉을 먼저 공부해야겠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공부하고 이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일단 시작하자. 중요해 보이는 것들을 외워놓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외우고 나면 그 의미가, 이해가 사후적으로 온다(고 지젝이, 라캉이, 서영채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4. 책의 구성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증상’, 2부는 ‘타자 속의 결여’, 3부는 ‘주체’다. 각부마다 세부적으로 두 챕터씩으로 또 나뉜다.
1부- A. 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을 고안해냈는가? B. 증상에서 증환으로.
2부- A. 케 보이? B. 당신은 항상 두 번 죽는다
3부- A. 실재의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B.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책을 처음 읽다 보면 디테일한 내용과 예시들을 파악하는데만도 어렵기 때문에 거리두고 응시하기를 잘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1-3부의 A, B를 큼직하게 요약해본다.
5. 1부 - 증상
A. 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을 고안해냈는가?
지젝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형식 분석으로 글을 시작한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에 나온 ‘꿈-작업’을 예시로 들며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집중할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상품 형식’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는 상품 형식 자체의 발생을 분석하고, 형식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젝은 상품 교환 형식의 구조 속에 어떤 ‘초월론적 주체’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돈이라는 것이 사실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데 그것을 어떤 숭고한 물질인 것처럼 여긴다. 돈이 그저 닳을 뿐인 물질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훼손 불가능한 어떤 실체인 것처럼’ 무의식중에, 돈을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본질에 대한 우리의 무지 덕분에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고, 우리의 현실이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된다.
그러면서 지젝은 이제 시장의 노동력 상품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노동력 상품을 잘 보면 어떤 역설적 교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을 함으로써 상품 이상의 잉여가치가 만들어지는데, 그 잉여가치는 노동을 한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가 전유한다. 놀라운 것은 우리 노동자는 이것을 등가적이고 공정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역설적 교환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는 거라고 지젝은 말한다. 증상은 “그 자신의 보편적인 토대를 뒤집는 어떤 특별한 요소, 자신의 유를 전복시키는 종”이다(증상이 무엇인지,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후에도 계속 반복해서 설명해준다). 증상을 이야기 하면서 지젝은 자본주의 사회 속 상품 물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봉건제에서는 인간(왕-신하의 관계) 물신이 있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 물신은 없지만 상품 물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본주의로 넘어오며 인간 물신(왕-신하의 관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자유로운 주체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그 물신이 상품으로 옮겨갔을 뿐, 우리의 자유, 진리는 여전히 억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가지고 가자.
우리는 우리가 포스트-이데올로기적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나도 사회가 이렇게 부당한거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어쩌겠어?’ 하면서 우리는 냉소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여러 소설과 오페라의 예시를 들면서 냉소적인 거리두기, 웃음, 아이러니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게임의 일부’라고 말한다. 우리 냉소적 주체는 사회 현실과 이데올로기적 가면 사이의 거리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면서 가면을 고집한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기능 양식이 냉소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말한다. 이데올로기적 환영은 지식이 아니라 행위에 있다고. 냉소적 거리두기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구조화하는 힘’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방식이고, 결국 이데올로기는 실상을 은폐하는 환영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 수준에 있는 것이다.
이제 지젝은 라캉의 환상 공식을 가져온다. 라캉이 세미나에서 한 ‘불 타는 아이’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 하면서 꿈이 우리가 현실로 돌아오지 않도록 잠을 연장시켜주는 것인 것처럼 이데올로기도 ‘현실’이 우리의 욕망의 실재를 은폐할 수 있게 하는 ‘환상-구성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와 라캉의 차이를 비교 분석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말한다. “자본의 한계는 바로 자본 자신”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썩어있었음을 말한다. 그런데 아이러닉한 것은 이 한계가 또 발달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내재적 모순이 가중되면 될수록 생존을 위해 자신을 혁명화 한다는 것이다. 이 역설 안에 잉여향유라는 것도 존재한다. 향유는 오직 잉여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고 항상 ‘초과분’이다. 잉여분을 빼버리면 향유도 잃게 된다. 그러면서 지젝은 마르크스와 라캉의 개념들을 흥미롭게 비교, 정리한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와 라캉의 욕망의 대상-원인인 ‘잉여향유’ 사이에 상동관계가 있고, 마르크스의 ‘역설적인 자본 운동의 위상학’이, 라캉이 말하는 ‘대상a의 위상학’이 된다는 것이다.
B. 증상에서 증환으로.
이 챕터에서 지젝은 증상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일단 증상은 처음엔 하나의 흔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흔적이 언제 의미를 갖게 되는가. 바로 이후에 있을 분석을 통해서다. 증상은 충분한 분석을 통해 상징계로 통합된다. 정신분석으로 예를 들어 보면 환자는 분석가가 이미 내 증상의 의미를 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면서 분석가에게 지식의 자리를 부여한다. 분석가를 믿어버린다. 그 믿음이 전이의 자리이다. 증상 분석은 전이를 통해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면 그 전이가 바로 최종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환영이기 때문이다(환자가 의사를 믿지 않고 전이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결국 환영이 있어야지만 지식을 만들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려면 직선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과잉(잉여)의 우회를 통해 계속 돌아갔다 와야 하는 것이다. 이 우회가 진리를 만드는 객관적 필연성이다. 그리고 이 우회를 통해서 우리의 증상은 사후적으로(소급적으로) 의미를 갖게 되고,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진리는 오인(실수, 환영의 매개를 통해서만) 진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젝은 이 분석을 역사 속 혁명에도 접목시킨다. 혁명은 늘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다. 정확한 혁명의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깥에서 거리를 두고 혁명을 안전하게 계획하고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관찰자는 없다. 혁명은 그 혁명의 과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만들고 진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지젝은 문학에서도 (진리는 오인을 통해서만 발견된다는)이 사실을 보여준다. 문학사의 헤겔은 제인 오스틴이라고 말하며 <오만과 편견>을 통해 이중 오인(주인공들의 상호 오인) 덕분에 주인공들이 진리로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 외에도 헤겔식 농담, SF 고전 소설인 <여름으로 가는 문> 등 다양한 소설, 영화의 예시들을 들어서 설명해준다. 또 타이타닉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바다속에서 발견된 타이타닉의 잔해가 라캉적 의미에서의 사물(thing), 불가능한 향유의 물질화라고 표현한다. 그 잔해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드러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하는 공간이었는데 분명히 바닷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무섭게도 매력적이다. 지젝은 이 타이타닉호의 잔해가 바로 향유가 스며들어 있는 의미, 라캉의 주이상스고 ‘숭고한 대상’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이제 지젝은 증상에서 증환이라는 단어로 넘어오는 과정을 설명한다. 라캉의 마지막 가르침 시기에 증상에 대한 보편화가 발견됐다(증상의 보편화, 배제의 보편화는 조금 더 공부가 필요하다). 라캉은 세계, 언어, 주체가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타자(완결된 총체)도 존재하지 않고,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빗금친 S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현상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가? 그것이 바로 증상이라고 라캉은 말한다. ‘성관계는 없다’라는 유명한 라캉의 명제도 여기서 나온다. 성에 대한 상징적 구조화는 성관계의 기표가 부재함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상징계로부터 배제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재로서의 증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기표는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고, 그래서 남자의 증상으로 되돌아온다. 또 라캉은 증상이 해석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것은 ‘향유’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석이 완전히 이루어졌음에도 주체가 증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주체가 자신의 향유를 조직하는 한 가지 방법이 증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을 넘어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환상을 넘어서까지 잔존하는 병리적 형성물이 바로 ‘증환’이다. 증환은 ‘의미 속에 향유를 간직하고 있는 기표’라고 지젝은 정리한다. 그래서 증환은 ‘정신 신체적’이다. 네트워크의 사슬 속에 매여 있지 않으면서 향유가 직접 스며들어있는 특이한 기표이기 때문이다.
6. 2부 - 타자 속의 결여
A. 케 보이?
2부의 제목은 ‘타자 속의 결여’다. 이 장은 이데올로기의 ‘누빔점’이 ‘고정적 지시자’로 기능하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이데올로기 장을 총체화 하는데 잔여물이 남는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지젝은 그 해답을 라캉의 욕망 그래프에서 찾을 수 있다면서 욕망 그래프의 원리를 디테일하게 설명한다. 가장 어려운 내용이라 더욱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한다.
일단 이데올로기의 누빔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젝은 설명한다. 이 누빔점은 라캉의 용어인데 떠도는 기표들을 묶어주는, 이데올로기 장 안의 내용들이 변해도 언제나 동일한 장을 유지시켜주는 그런 것이 바로 누빔점이다. 예를 들면 떠도는 (자유, 평등 같은) 기표들은 ‘민주주의’라는 누빔점을 통해 민주주의적 자유, 민주주의적 평등 같은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이 예시에서는 민주주의라는 투쟁이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고, 그래서 이 사회 전체가 하나의 방향과 의미가 생겼다. 그렇기에 지젝은 주장한다. 이 중심 투쟁을 분리해내는 것이 이데올로기 비판을 하는데 있어 첫 번째 임무라고. 이 특정한 중심 투쟁을 설정은 하되, 이것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본질로 만들지는 말자고 이야기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사울 크립키의 반기술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기술주의와 반기술주의를 비교하고 최초의 명명 행위, 주체의 동일성에 대한 분석을 하는데 이 부분은 공부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이 장에서 지젝이 강조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반기술주의 덕분에 우리가 대상a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대상a는 현실 속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고정적 지시자(순수기표로서의 누빔점) 덕분에 언어체계 안에서 만큼은 동일성이 보장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 장에서 중요하게 짚는 부분이 바로 누빔점의 근본적 역설, 이데올로기적 왜상에 대한 부분이다. 고정적 지시자로 역할을 하는 누빔점은 “기의의 환유적 미끄러짐을 멈추게 함으로써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전체화 한다(167)”고 지젝은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의미가 최상으로 응축되어 있는 그런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허깨비일 뿐이고(기표의 작인을 기의의 영역 안에서 대표하는 요소일 뿐이고) 그저 순수하게 구조적인 기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그저 착시효과일 수 있다. 의미의 장 안의 순수 기표의 작인을 대표하는 것이 텅 비어 있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데올로기적 의미의 장을 총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고로 충만한 척 하면서 동일성, 동질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젝은 이런 착시를 “이데올로기적 왜상”이라고 부른다.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후 지젝은 이제 ‘동일시’에 대한 개념으로 넘어간다. 이때 라캉의 욕망 그래프가 등장한다. 욕망 그래프의 하단을 먼저 설명하고 상단으로 넘어가는데 그 이유는 이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차원이 아니라 3차원 공간의 그래프로 보아야 한다). 그래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기본 개념들부터 정리해 본다.
*주체(S) = 한 집단의 상징체계에 포획되고 길들여진 존재. 그러나 이 ‘나’는 라캉에겐 실체가 아니다. 라캉에게 주체란 “기표에 의해 대표되는 자리”다. 주체라는 존재는 내가 사회 속에서 나로서,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누군가의 누구로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도, 기표도 S로 같은 기호를 쓴다.
*기표(S) =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말, 이름, 표지로서 의미가 아니라 ‘자리’다.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분열된 주체(/S) = 주체가 기표로 대표되는 순간, 항상 뭔가를 잃는다. 포획되지 않는 무언가(잔여, 찌꺼기)가 항상 떠돌 것이기에 주체는 결핍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 균열이 바로 무의식의 자리다(그래서 주체는 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욕망(△) = 욕망은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대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은 욕망이다. 나는 타자에게 어떤 존재인가? 타자는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욕망은 항상 타자의 욕망을 경유한다.
*대타자(A) = 신이나 권력자 같은 것이 아니고 그 사회의 언어, 규칙, 질서, 상징계 전체, 질서 그 자체(아버지의 이름)를 말한다. 그러나 라캉의 최종 핵심 명제는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라캉은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애쓴다. 완결된 의미의 총체, 모든 것을 보증해주는 최종 파워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a(대상a) =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이다. 현실에선 절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를 계속 움직이게, 욕망하게 만든다. 미끄러짐의 원인이기도 하다.
*타자의 결여의 기표(S(/A)) = 대타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떠맡는 기표. 그래프 상단부 핵심 기표.
*충동(D) = 욕망이 조직된 이후에도 제거되지 않고 반복으로 돌아오는 향유의 회로. 생물학적 요구에서 출발하지만,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고 기표에 의해 비틀린 운동.
*기의(s(A)) = 타자의 기능이라 할 의미, 대타자로부터 발생한 의미 효과(그러나 항상 불완전하다).
*자아(m) = 거울단계에서 형성된 상상적 자아. 내가 나라고 믿는 이미지. 일관되고 통일된 나(실제 주체/S와는 다른 층위다).
*상상적 동일시(i(a)) = 관념적 자아. 대상a의 상상적 이미지. 대상a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이미지(예-성공한 나. 이상적 삶 등). 동일시의 재료.
*상징적 동일시(I(a)) = 자아이상. 대타자의 이상적 이미지. 사회가 원하는 이상형. 그래프에서 주체의 동일시를 지탱한다.
*요구(d) = 욕구(need)가 언어를 통과한 것.
*목소리(voice) = 기표화되지 않은 향유의 잔여.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톤, 울림, 잔향. 대상a의 일종의 변형. 실재의 침입.
*향유(Jouissance) = 쾌락원칙을 넘어선 과도한 만족. 즐겁지만 괴롭다. 괴롭지만 놓을 수 없다. 그래프에서는 증상, 환상, 충동을 지속시키는 에너지. 그래프 전체를 교란하는 잔여. 의미에 포획되면서, 동시에 의미를 파괴하는 것. 향유는 거세를 통과함으로써만 주체의 구조 안에 대상a, 증상, 충동, 반복되는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
*거세(Castration) = 대타자 역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의 수용. 완전한 만족은 없다. 이 수용이 있어야 주체가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의 균열 지점.
*◇ = 주체와 대상 사이 구조적 관계를 나타내는 연산자. 충동공식, 환상공식에서 쓰인다.
*환상공식(/S◇a) = 주체가 대상a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조직하는 공식. 분열된 주체는 대상a를 통해서만 자신을 견딜 수 있다. 주체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대상a를 욕망의 원인으로 설정한다. 그걸 통해 자기 욕망을 조직하는 것. 그래서 환상은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
*충동공식(/S◇D) = 환상공식을 통해 욕망이 조직되는데 그럼에도 향유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그 잔여가 충동공식을 통해 반복으로 돌아온다. 충동은 향유의 위상학적 운동인셈. 결국 충동은 환상이 제공하는 의미의 장을 우회하면서, 동일한 회로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향유를 지속시킨다.
지젝은 욕망 그래프의 하단부터 설명을 시작한다. 왜냐면 주체는 처음부터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요구하고, 의미를 찾고, 동일시하는 과정 속에서 뒤늦게 욕망하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주체는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하고(상상적 동일시, i(a)) 사회 질서(대타자, A)를 만나고, 의미를 얻고(기의, s(A)), 자아(상상적 자아, m)를 만들며 ‘내가 누구인가’라는 이미지를 구성한다. 그러나 주체는 아직 자기 욕망을 모른다. 타자의 언어 안에서 자기를 설명할 뿐이다. 그래서 아직 주체는 상상적, 상징적 동일시(i(a), I(A))의 영역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말하고 의미를 찾고, 동일시해 봐도 주체에게는 항상 설명되지 않는 찌꺼기가 남게 된다.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다.
그래서 주체는 질문한다. “케 보이?(너는 도대체 나에게서 뭘 원하는 거야?)” 이제 그래프는 상단으로 접힌다. 욕망이 생긴다. 욕망은 주체 내부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대타자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한다. 대타자가 주체의 케 보이? 질문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가 바로 대타자의 결여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주체는 알게 된다. 대타자는 완전하지 않고(/A), 의미는 항상 구멍이 나 있구나. 이제 주체는 이런 대타자의 결여를 직접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주체는 욕망의 대상(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욕망의 원인인) 대상a가 필요하다. 대상a라는 구체적 형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환상이다(환상공식(/S◇a)). 아이러닉하게도 환상은 이제 거짓말이 아니라 욕망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장치가 된다. 우리는 환상 때문에 속는 것이 아니라, 환상 때문에 욕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환상이 욕망을 조직해주기는 하는데, 거기에도 또 남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향유다. 향유는 의미를 우회하고, 동일한 회로에서 반복되면서 충동(D)의 형태로 돌아온다(이게 바로 충동 공식(/S◇D)이다). 향유는 완전한 만족이 불가능하고, 항상 결여를(거세를) 통과한 흔적으로만 주체 안에 남는다. 향유는 주체를 파괴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교란한다.
간단히 다시 정리해 본다. 라캉의 욕망 그래프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주체는 의미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지만 그걸로는 충족 되지 않고 결국 대타자를 통해 욕망이 발생한다. 그러나 주체는 대타자의 결여를 발견하고 그것을 참지 못해 환상을 만들어내면서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데 거기서도 해소되지 않는 향유는 계속 떠돌면서 거세를 통과해 반복적으로 주체에게 돌아온다.” 이렇게 욕망 그래프를 설명하고 나자 지젝은 이제 이 욕망 그래프의 원리를 이데올로기와 연관 짓는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잘못된 것을 믿고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깨부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향유하는가를 보는 것이 포인트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속아서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향유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머무는 것이고, 이게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작동 방식이다.
이제 지젝은 ‘사회적 환상 횡단하기’와 ‘증상과의 동일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일단 사회적 환상은 우리가 사회는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사회 전체의 환상 공식 같은 것이다. 사회는 잘 작동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불평등, 모순, 억압 같은 것들은 어딘가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 원인을 제거하면 온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 자체가 사회적 환상이다. 왜냐면 대타자는 결여되어 있다(S(/A))는 것을 이 환상이 자꾸 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젝은 말한다. 사회적 환상을 횡단해야 한다고. 그러나 여기서 횡단은 환상을 깨고, 진실을 본다거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지젝의 횡단은 우리의 욕망이 이 환상에 의해 조직되어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타자의 결여를 더 이상 다른 대상에게 떠넘기거나 결여가 없는 대타자를 찾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가 온전한 전체가 아닌 이유는 누군가(예-유대인) 때문이거나 그런 게 아니라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포인트에서 이제 증상과의 동일시 개념이 등장한다. 지젝은 환상을 횡단하면 주체는 자신의 향유가 사회적 증상 속에 이미 얽혀 있었음을 보고,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증상과 동일시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B. 당신은 항상 두 번 죽는다
지젝은 이제 라캉의 죽음충동으로 넘어간다. 죽음충동은 라캉 가르침의 시기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는데 1950년대 후반부터 상징계가 쾌락원칙과 동일시되면서, 쾌락원직 너머에 있는 것은 트라우마적 실재의 중핵이라고 말한다. 라캉은 이것을 지시하기 위해 das Ding이라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사용했다. 불가능한 향유의 육화로서의 사물(타이타닉, 숭고한 대상)이다. 또 라캉이 고안한 단어는 ‘외밀함(extimite)’이라는 것이다. 이 신조어에는 외재적이면서도 내재적이라는 역설적인 의미가 공존한다. 따라서 이 사물(das Ding)은 상징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의 한복판에 외밀하게 자리 잡은 결여의 핵이다. 이때 죽음충동은 상징계가 작동할 수 없게 되는 한계 지점을 가리키며 바로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죽음의 가능성이 열린다. 기표의 네트워크가 무화되게 하는 것이다.
라캉은 그러면서 죽음은 두 개의 죽음으로 구분되어야 하는데 일단 첫 번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자연적 죽음), 상징 안에서의 죽음이다. 하나의 주체가 자연적 순환 속에 사라지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죽었다’고 등록되는 것이다. 즉, 기표(서사, 이야기) 안으로 들어온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은 완전한 끝이 아니다. 두 번째 죽음이 있는데 이게 진짜다. 이것은 절대적 죽음의 차원이다. 더 이상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죽음이고 기존의 역사, 서사, 질서가 중단되는 지점이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또다시 패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소임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알고 진정으로 죽게 된 것이 그 예다. 이 두 개의 죽음 사이 간격에 따라 숭고한 미(예.안티고네)가 나타날 수도 있고, 공포스런 괴물(예.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두 죽은 사이의 공간이 바로 상징계의 중심에 위치한 사물(das Ding)의 자리, 실재-트라우마적 중핵의 자리다. 이 공간은 상징화/역사화에 의해서 소급적으로 열린다고 지젝은 주장하면서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들>을 가져온다. 벤야민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이 ‘외밀한’ 중핵을 건드렸던 순간이 딱 한 번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으로서의 혁명> 챕터는 벤야민의 테제까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지젝 책에서 그동안 나왔던 욕망그래프, 환상, 향유, 두 번의 죽음 같은 개인적일 수 있는 내용들이 좀 더 광범위하게 역사, 정치로도 연결되는 지점이라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들>을 꼭 읽어보고 벤야민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핵심을 알아야 한다. 일단 벤야민의 주장은 역사라는 것이 계속 연속적으로 발전하는(진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억눌려 있던 과거가 현재 속에서 갑자기 폭발하는 ‘단절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등이 공유하고 있는 환상이 ‘역사는 점점 좋아진다, 혁명은 자연스러운 단계다, 지금의 고통은 미래를 위한 희생이다.’ 같은 것이라며 이것을 비판한다. 벤야민에게 역사는 과거의 패배자들을 구출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그에게 혁명은 기관차가 아니라 비상 브레이크인 것이고 연속성을 파괴하고 끊어버리는 것이다. 지젝은 이 벤야민의 개념들을 라캉적으로 읽는다. 벤야민이 말한 단절의 순간이 바로 두 번째 죽음의 순간이고 사회적 환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점이라고 지젝은 주장한다. 벤야민이 말하는 억압된 과거는 라캉이 말하는 실재, 트라우마, 사물(das Ding)이다. 그래서 지젝은 벤야민이 마르크스주의 역사 전체에서 유일하게 실재의 외밀한 중핵을 건드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반복으로서의 혁명>인가? 라캉적으로 생각해보면 반복은 기억이 아니고 실재가 다시 돌아오는 방식, 충동의 운동이다. 벤야민적 혁명도 마찬가지다. 혁명은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게 아니라 실패, 억압, 불가능성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출현하는 것이다. 지젝은 벤야민의 혁명을 사회적 환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실재의 개입, 즉 ‘두 번째 죽음’의 정치적 형식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데올로기와 다시 연결을 지어 보자. 이데올로기는 환상으로 사회를 봉합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결여를 제도화하고, 전체주의는 결여를 없애려 한다. 그 과정에서 전체주의는 죽지 않는 지도자(숭고한 신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제도화나 전체주의의 결여를 없애려는 방식 둘 다 두 번째 죽음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시도다. 결국 둘 다 공백을 직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제 3부로 넘어간다. 바로 ‘주체’다.
7. 3부 - 주체
A. 실재의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이제 3부에 도달했다. 3부의 제목은 ‘주체’다. 여기서 질문이 들 수 있다. 왜 지젝은 마지막에 주체를 이야기할까? 지젝은 사실 처음부터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일 수 있다. 1,2부에서 증상, 타자속의 결여를 이야기 하면서 사실은 우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이렇게나 강력한데, 우리(주체)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지젝은 메타언어에 대한 이야기로 3부를 시작한다. 메타언어란 언어를 바깥에서 설명할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다. 왜, 싸움도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려면 당사자의 입장만 있어 해결이 어렵지 않은가. 그런 때 제 3자가 싸움 바깥에서 보고 중재를 해줘야 하는 것처럼 지젝도 메타언어라는 것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찾은 메타언어는 없댄다. 이 ‘메타언어는 없다’라는 것은 라캉의 명제인데 지젝은 이를 가져와서 이데올로기를 거리를 두고, 제3자의 입장에서 비판하려는 자들에게 “메타-이데올로기는 없다”고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지젝은 책에서 포스트-구조주의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이야기한다.
이후 지젝은 남근기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메타언어(메타이데올로기 같은 중립적 위치)라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위치의 점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간극을 구현하는 역설적인 것을 만들어버리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 역설적인 비-메타언어가 오히려 메타언어를 존재하게 해준다는 것. 그러면서 지젝은 ‘바르샤바에 있는 레닌’ 농담을 통해 프로이트의 ‘표상의 대상자’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기표가 실패한 표상의 빈 구멍(레닌은 바르샤바 엤다는 사실)을 메꿈으로서, 그 결여를 대표함으로서 역설적으로 기표가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지젝은 군대에 가기 싫은 군인에 대한 예시를 들면서 대상의 논리를 펼친다. 기표의 역설저첨 대상에도 역설이 있다. 대상의 역설은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결국 대상을 만들어낸다는 역설이다.
그 후 지젝은 라캉의 실재가 지닌 역설로 넘어간다. 지젝은 라캉의 실재는 사후에 나타나는 실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 역시 역설이다. 실재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는데 ‘사후에’ 어떤 속성을 가진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히치콕의 맥거핀 같은 것이다. 맥거핀은 사실 별것도 아닌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다들 그것을 믿고 움직이고 사건이 발생한다. 그게 바로 라캉의 대상a이자 실재 대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향유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는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향유로 인해 수많은 트라우마적 효과들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정리를 한다. “역설의 해법은 그러한 불가능성이 존재의 차원과 관련되어 있고, 금지는 그것이 서술되는 속성들과 관련되어 있다(216)”고.
이후 지젝은 칸트의 악에 대한 발견, 셀링의 ‘자유는 악의 원인이다’을 이야기하며 “자유나 자유로운 선택은 실재, 즉 불가능한 것이다(262)”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실재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실재는 상징계에 선행하고(이미 존재했는데), 이후 실재가 상징계의 네트워크에 걸려들었을 때 그것에 의해서 구조화된다는 것이다. 결국 실재의 대상은 라캉적 의미의 숭고한 대상이고 칸트의 물 자체, 공백이고, 구멍이라고, 기표가 아니지만 흔적의 자리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체에 대해서는 주체란 ‘구조 내의 결여’이고, ‘실패로 열려진 구멍이 바로 기표의 주체’라고 말한다. 표상의 실패야말로 주체를 표상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절대적 불일치가 바로 절대적 부정성으로서의 주체라는 것). 이 아이러닉한 모순들을 지젝은 소련에 대한 농담과 함께 설명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계속 주체를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들을 한다.
지젝은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질문의 주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라캉의 입장은 ‘주체는 타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 지닌 불가능성의 공백(283)’이라는 것이다. 질문은 답하는 주체의 무능력, 결여를 겨냥하고 무능력이 드러난다(이 무능력함의 지점이 라캉의 das Ding이다). 질문의 대상은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아닌, 상징화될 수 없는 실재의 지점이고 찌꺼기, 잔여분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중요해보이는 말을 한다. “죄의식이 없는 주체는 없다. 주체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대상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는 한에서만 존재한다(286)”는 것이다. 결국 주체는 자신 안의 공백을 인지하고, 수치심을 느낄 때 진정한 주체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주체는 분열되어 있다. 지젝은 카프카의 소설들이 주체화 이전 주체의 이런 역설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주체 내의 대상’을 라캉식으로 세 종류(S(/A), a, Φ)로 구분하는 시도를 하는데 이 부분은 헤겔, 라클라우와 무페, 히치콕의 새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일단 이후의 공부로 미뤄놓겠다. 지젝은 이후 대상이 세 종류였듯이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를 기준으로 세 가지 주체를 또 이야기 한다. ‘믿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즐긴다고 가정된 주체’, ‘욕망한다고 가정된 주체’다. 각자의 주체 개념들이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는데 유용하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 후 지젝은 파격적인 정리를 한다. “진리는 결국 빈자리일 뿐이며 진리의 효과는 (상징적으로 구조화된 지식의) ‘허구’의 어떤 조각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을 아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발생한다(302).” 결국 어떤 진리를 현상이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은 그저 ‘환영의 가능성’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결국 숭고한 대상 속에 숭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 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안 숭고하고 평범한데 우연히 그 자리를 맡게 된 일상적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후 지젝은 여러 영화와 그림, 플라톤 등의 예시를 통해 ‘주체’는 타자 내의 구멍, 공백이고 ‘대상’은 이런 공백을 메우는 관성적 내용이라고 말한다. 결국 ‘주체의 존재’ 전체는 이런 공백을 채우는 환상-대상에 있다는 것이다.
B.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안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책인데 이 마지막의 마지막 챕터는 어려움의 절정이다. 그래서 내 언어로 다시 정리해보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시작할 엄두가 안 난다(사실 데드라인이 와버렸다). 따라서 전체를 한번 다시 훑는데 미흡함이 있다는 씁쓸한 마음과 함께 마지막 챕터에 나오는 핵심 내용들은 이후에 필사를 하며 다시 공부하기로 하고, 그 와중에도 알 것만 같은, 파편적으로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들만 적어보기로 한다.
이 마지막 챕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헤겔이다. 헤겔의 <종교철학 강의>, 라캉의 <정신분석 윤리>에 대한 세미나, 칸트의 숭고에 대한 개념도 이후에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어쨌든 지젝은 숭고한 것은 “불가능성 자체를, 표상이 사물을 탐색하는 데서 마주치는 항구적인 실패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대상(318)”이라고 말한다. 숭고한 것은 절대 부정성, 순수한 무, 공백으로서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백으로서 채워지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의 변증법 정-반-합, 지양이 아니라 A -> NON-A -> A’ (새로운 A)가 계속 순환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구조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후 지젝은 희생하는 어머니 예시 등을 들면서 어머니의 비능동성이 사실은 어떤 전환을 통해 그렇게 구성된 사회 시스템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안티고네의 예시도 드는데 지젝은 인간 본성 그 자체는 무고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이 ‘문화’와 관계를 맺는 순간, 순수악이 되어 버리고 서로 적대항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젝은 칸트-피히테적 ‘유한’주체와 헤겔의 ‘절대적’ 주체를 비교하는데 헤겔적 주체는 주체가 공허한 제스처(라캉의 ‘기표’)를 통해 자신의 잔여물을 떠맡을 때, 실체가 주체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본질의 자기 균열’ 덕분에 우리가 ‘실체’일 뿐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체는 자신을 자기 안에 존재하는, 어떤 이질적인, 외적이고 실정적인 실체로서 경험하는 한에서만 실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는 실체가 자신에 대해 내적인 거리를 가질 때, 그럼으로써 실체가 자신을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지각하며 텅 비게 될 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제 지젝은 결말에 다다른다. 지젝의 결말은 라캉의 정신분석종결 지점과 같다. 그것은 ‘주체의 폐기’다. 결국 주체가 더 이상 자신을 주체로 전제하지 않는 것. 타자의 비존재를 떠맡고 주체로서의 자신 또한 폐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8. 정리하며.
전체를 훑은 이 시점에 다시 한번 전체를 그려본다. 지젝이 이 책을 쓰며 내내 “전체란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체를 그리고자하는 이 충동 자체가 어쩌면 인간 주체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이론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렵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이 사회속 일원으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보여준다. 아니, 해결책을 보여준다는 것은 지젝적 사고에 맞지 않는 것 같다. 해결책을 바라는 우리들의 사고를 중단시키고 어떤 새로운 틈을 소개한다.
법, 한민족, 여성성/남성성, 진정한 민주주의 등 이 세상의 이데올로기들은 본질적으로 결여된 우리 사회를 봉합하기 위해 작동한다. 이 결여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 주체는 그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숭고한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 결여를 덮어버리기 위해서다. 그 덕분에, 우리 세계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사실 숭고한 대상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믿은 것은 숭고한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위치의 효과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된다. 진리가 있을 거라는 것 역시 우리의 착각일 뿐이었고 진리는 어떤 실체가 아닌 그저 빈 자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러면 이런 상황에 우리, 주체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완성된 자아도 아니고, 선택할 수 있는 주인의 위치에 있지도 않다. 우리는 그 결여를 대신 떠 맡는 자리, 그 실패의 책임을 전유하는 위치에 있다. 가엾은 우리는 숭고한 대상이 결여를 완전히 막는 것에 실패해도, 이데올로기가 흔들려도, 그래서 사회가 망하고 있어도 그 실패를 다 자기 탓으로 돌린다. 우리는 모든 책임을 떠맡는다. 그래서 지젝은 주장한다. 주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 말은 주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그래서 인간이 무력해져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지젝의 뜻은 우리가 ‘결여를 책임지는 중심’으로 우리 스스로를 전제해왔던 그 환상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잘 하면 될거야.’ 같은 믿음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 환상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오고 있는가, 특히 온갖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한국사회를 살아가고 있는(그래서 자살률이 1위인 나라의) 사람으로서 지젝의 이 주장은 반갑게 느껴진다.
이 주체의 폐기는 라캉의 정신분석 종결과 연결이 된다. 결국 타자(이상적인 나, 온전한 어른, 사회,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숭고한 대상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 역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주체일 필요가 없다는 인식. 지젝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주체로서 필연적으로 떠맡을 수밖에 없었던 환상적 구조를 드러내보인다. 그리고 지젝은 말한다. 숭고한 대상을 “발견했으니 폐기하자”가 아니라, 애초에 숭고한 대상은 없고, 최종적 진리도 없고, 그저 빈 공백밖에 없다는 것과 “정면으로 대면하자”고. 이제 그 무서운 공백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체는 무엇을 해야할까? 그것까지는 지젝이 말해주지 않는다(치사하게도).
이 책을 다 읽고 정리를 하고 나니 묘하게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정-반-합 진화 뿅! 해야 속이 시원하고 성장한 것 같고, 뭔가 배운 것 같을텐데 기분이 이상하다. 그러나 지금 이 이상한 위치의 자리. 다시 순환해서 돌아온 이 자리가 바로 지젝이 말하는 A-> Non A-> A’에서 새로운 A’의 위치이지 않을까. 이 위치에서 이제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방학동안 이 책을 다시 읽으며(외우며) 순환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