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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Jul 01. 2022

그리스 로마 속 심리학(3): 헤파이토스

어쩌면 꽤나 오래전에 상영된 디즈니 만화영화인 < 모아나>를 보신 분들도 계실 텐데 저도 그 만화영화를 오래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한 부족의 족장의 딸이 넘실대는 바다로 나가려 하지만 아버지인 족장이 위험하다면서 극구 말리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모아나는 작은 배 한 척으로 바다로 나가게 되고 그 목적지는 마음대로 변신이 가능했던 마우이가 갈고리와 테 피티의 심장을 잃고 홀로 살고 있는 섬이었습니다. 바다로 나가가 전 모아나의 할머니는 테 피티의 심장이 든 목걸이를 주면서 마우이를 찾아가서 이것을 돌려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저는 모아나가 찾아 나선 마오이가 인간의 오성, 즉 도구적 이성을 상징한다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모아나의 할머니는 다름 아닌 욕구와 감정의 집합소인 이드를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과이 발하고 기술이 혁신되더라도 제멋대로 작하거나 맘대로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선천적인 욕망과 감정을 아우르는 실체로서의 이드 말이지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마오이가 테 피티로부터 뺏은 심장이 어째서 모아나의 할머니, 즉 이드가 가지고 있었던 걸까?라는 의문 말이지요. 이런 의문이 들자 순간 섬광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쳤는데 심장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이고 이 마음은 당연히 이드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지요.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간이 지능을 바탕으로 아무 마음을 마치 무선 장난감 자동차를 다루듯이 제멋대로 다루려 들어도 마음은 그 성질상 소유해서 물건처럼 다룰 수 없는 성질을 가졌기에 그 시도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풀어 말씀드리자면 "나는 내 마음을 어떻게 만들고(조작하고) 싶다"라는 의도적인 마음을 가지면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어쩌면 심한 불쾌감을 동반한 두려운 마음이 들 수 있고 그 자연스러운 마음의 변화를 느끼면서도 고집을 꺽지 않는다면 어쩌면 두려운 마음은 다시 그 색깔과 결을 바꿔서 두려움을 넘어 초조함과 심한 긴장을 불러일으켜서 노이로제 상태로 빠질지도 모릅니다. 이게 정직하게 반응하는 마음(이드)을 도대체 무슨 수로 소유하고 제멋대로 조작할 수 있을까요? 마도 그건 신화 속 나르시시스가 물속에 투영된 자기 모습을 가지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소유할 수도 제멋대로 조작할 수도 없는 선천적인 자기 자신의 마음을 소유하고 조작하려는 헛될 뿐만 아니라 몹시 위험한 사도일 것입니다.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자기거 자기를 소유해서 제멋대로 조작하고자 한다면 그 소유의 대상인 자기 자신은 소유라는 표현에 걸맞게 대상으로 존재해야 할 텐데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은 소유하려는 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 헛된 시도에 대해 계속 그 결을 달리 하며 경고음을 발하면서 반응할 틴데 그 마음의 반응을 느끼는 것은 마음을 조작하려는 자기여서 혐오감과 함께 공포감을 느끼게 되고 이 헛되고 위험한 시도를 멈추자 않는다면 인간의 내면은 마지막 수단으로 그 시도를 미친 짓으로 여겨서 그를 광기에 사로잡히 할 것입니다.


저는 마음을 제멋대로 조작하려는 시도는 헛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는데 동의하지 않는 분이 계실진 모르지만 이를 풀어서 예를 들자면 우울한 마음을 억지로 바꿔 보려고 일부러 긍정적인 척한다면 그 행동에 마음이 반발해서 아무리 긍정적으로 마음을 바꿔 보려고 해도 마음은 그에 동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론 더 마음이 어두워지거나 몸뿐 아니라 정신도 녹초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울감에 빠져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울한 마음의 결을 정직하게 인정하고서 우울해서 힘든 마음이 좀 잦아들고 다시 기분이 좀 나아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마음속에서 "지금은 이렇게 또는 이런 방법으로 마음을 달래고 싶어"라는 속삼임을 듣고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물론 이때 처한 현실 속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마음은 이미 주어진 현실을 고려할 줄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할 것이고 그 제시된 방향으로 향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곰곰이 생각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작동방식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데 그 아유는 그 마음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 즉 자신의 감정과 욕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만화영화 모아나의 끝 장면은 마오이가 아무리 아러저리 변산을 하며 시도해도 광분하는 테 카를 진정시키지 못하는데 이를 본 모아나가 바다에게 "내가 테 카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줘"라고 말하자 바다는 양쪽으로 갈라서 모아나에게 테 카에게 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모아나는 여전히 광분하고 있는 테 카의 얼굴에 손을 대며 "나 너 알아"라고 말하자 그때까지 광분하던 테 카는 입을 쩍 벌리고 자신의 몸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사라지더니 아주 잠깐 화석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이윽고 테 카는 테 피티로 변하는데 테 티의 얼굴은 모아나의 얼굴과 똑같지만 초록색 풀잎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이 끝 장면을 보고 인간, 특히 자연에서 비롯된 인간을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정자와 난자가 엄마 몸속에서 결합해서 태아로 발전한 뒤 때가 차면 엄마 몸속에서 나와 인간의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자연이 선물로 준 인간성, 그것도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에 기대어 살도록 선물로 준 동물성, 즉 본능에 바탕을 둔 인간성을 씨의 형태로 선천적으로 갖추고 태어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천적인 마음의 활동과 반응은 "도구적"으로, 즉 제멋대로 바꿔보려고 하는 것은 헛될 뿐만 아니라 몹시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가능한 것은 모아나의 마지막 장면처럼 자신의 마음의 활동이나 반응을, 설사 그것이 힘들고 속상하고 우울하고 화가 나는 반응이더라도 우선은 그 마음의 반응을 자신의 마음의 상태로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나 너 알아"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그렇다면 내가 그에 대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내면과 함께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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