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몽 Feb 02. 2021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마음챙김의 시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 라이너 쿤체 -


나는 읽지도 않을 책을 항상 가방 속 북 파우치에 넣어 다닌다. 그것은 바로 류시화 시인이 직접 고른 시를 엮어 만든 '마음에 건네는 시집' 『마음챙김의 시』이다. 위의 시는 이 시집의 가장 첫 페이지에 실린 글이다. 류시화 시인이 가장 전하고 싶은 말 또한 이 시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꽃 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이 한 줄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나에겐 위로가 되었더랬다.



 


여름의 끝무렵도 아닌 10월을 앞둔 9월의 마지막 주말에 우리 가족은 바다를 찾았다. 더운 공기와 시원한 바람이 서로 기싸움을 하듯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듯한 날이었다. 첫째 아이와 동갑내기 아들을 둔 애들 아빠의 지인 가족과 함께 바다를 가기로 했다. 미리 약속이 되었던 것도 아니고 전날 갑자기 아빠들끼리 통화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급작스러운 약속이었다. 나는 바다를 가기로 한 날 저녁 8시부터 3시간짜리 자격증 강의를 들어야만 한다. 부담스러워하는 내게 바쁜 척하는 내가 평소 못마땅했던 신랑은 혼자 아이 둘을 케어하겠다며 나는 집에서 쉬라고 했다. 좋은 의도로 했을 말이 아니라는 게 뻔하다. 지난 여름에도 그 집과 함께 물놀이를 간 적이 있는데 그땐 둘째도 어려서 첫째와 아이 아빠 둘만 보냈었다. 애들 아빠가 보내온 사진에는 즐거워하는 아이의 모습도 보였지만 엄마의 빈자리도 느껴졌다. 아들을 살뜰히 챙기는 그 집 엄마의 모습이 사진에 보였을 땐 내가 신랑과 아이를 한 순간에 홀아비와 어미 없는 아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엔 3시간 강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도 바다 좀 보여주잔 핑계로 따라나서기로 했다. 나에게는 큰 용기와 결심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 날 자격증 수업에는 나의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준비한 PPT를 핸드폰으로 옮기고 간단히 적은 멘트지를 프린트해서 가방에 넣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바다를 가니 낭만도 좀 즐기겠노라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시집을 챙겨 넣었다. 류시화 시인은 내가 고등학교 때 다른 반 담임이었던 가사 선생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네 반에 놀러 갔는데 학급 뒤편에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라는 시가 적혀 있었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비목이라는 물고기도 처음 알았지만 불완전한 사랑 혹은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고 1 때 느꼈더랬다. 그 뒤로 류시화 시인의 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읽게 되었다. 그런 시인의 참으로 오랜만에 발간되는 시집이었다. 시인 본인의 글이 아님이 아쉬웠지만 그가 택한 글들이 얼마나 울림을 줄지 알기에 무작정 구입하고 바다 나들이에 함께 하기로 했다.




한창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자격증 수업까지 강행하던 시기였기에 마음챙김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 첫 장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 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라는 구절이 얼마나 가슴속을 파고들었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첫 시를 읽은 후 나는 아직까지도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그때의 그 위로와 격려의 말이 너무나 고맙고 힘이 되어 굳이 뒷장으로 넘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몹시 또 마음이 힘든 날 다음 장을 열어보려 한다. 시집의 제목처럼 내 마음을 챙기고 싶은 날 나를 지탱해주는 비타민 마냥 하나씩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다.


꽃 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나 또한 그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들 예찬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