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달살이 - 17 그리고 마지막
꿈만 같았던 제주살이가 끝을 맺었다. 여행이라기엔 일상에 가까웠고, 삶이라기엔 너무나 찰나 같았던 30일의 시간. 내가 처음 제주에 한달살이를 하러 간다고 했을 때 누군가는 만류했고, 누군가는 부러워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 만은 않을 거라는 조언을 받기도 했고, 이곳에 있는 동안 놀러 오겠다는 아주 가벼운 인사말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 나의 안부를 묻는 이들은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 "와~ 제주도 간다고 한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시간이 너무 빠르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일할 때도 하루는 빠르게 갔는데 역시 놀 때는 더 빠르다. 직장 상사가 제주에서의 계획을 물었을 때 나는 딱 세 가지만 할 거라고 말했다. 책 읽고, 운동하고, 글 쓰고. 돌아보면 그 세 개를 다 했긴 하지만, 만족한 만큼의 밀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제주는 큰 의미를 남겼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매일 아침 씻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내겐 사춘기 때 친구가 던진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대충 옷은 언제 갈아입냐는 말이었는데 그 말이 내겐 "너 되게 냄새나서 너랑 다니고 싶지 않아"로 들렸나 보다. 그 후 나는 매일 옷을 갈아입고 매일 샤워를 해야만 집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달랐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제주의 바다에는 폭풍우 치는 날에도 빨간 패들보트를 타고 서핑을 즐기는 이가 있었다. 제주의 식당들은 하나같이 뭐 그리 바쁜지 빠르면 점심장사 후에, 늦으면 8시면 문을 닫았다. 제각기 다르게 생긴 집처럼 사람들도 '같아지려' 애쓰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간 곳에 나 또한 잠시 지나갈 사람이었다.
만날 사람도 없었다. 제주도에 있다고 하면 올라와서 만나자는 말로 끝을 맺었고, 그 어떤 의무감도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였을까. 특별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야말로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시간.
다른 변화도 있었다. 그간 그토록 재미없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이젠 좀 재밌어졌다는 것이다. 일할 땐 부담감에 억눌려 있던 마음이 이젠 바깥일들이 궁금하다고 아우성을 쳤다. 해야 돼서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어서 하는 신문 읽기는 생각보다도 더 재밌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호기심이 생겼다는 건 분명 큰 변화다. 역시 퇴사가 답이라는 말은 너무나 진부하지만 그동안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인걸.
물론 제주에서의 생활이 내 인생을 180도 다르게 만들었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고 답할 것 같다. 하지만 하루 안에서의 여유가 이렇게 행복하다는 걸, 나는 정말로 안온한 삶을 원한다는 걸 알게 됐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이제 나는 꿈의 제주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상황에 민감하고 잘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렇게 잘 어우러지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상황에 나를 끼워 맞춰야 하는 사람. 그래서 네모난 부분, 세모난 부분을 기어코 깎아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대쪽같이 내 모양을 유지하길 바라면서도 깎여 나가고 있는 사람.
그래서 서울에서의 삶은 다시 흔들릴지도 모른다. 서울은 빠르고, 사람들은 바쁘고, 계속 무언가를 해야만, 앞으로 나아가야만 된다고 믿는 흐름 속에서 나는 또 어느샌가 불안해하며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나만의 속도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동안 회사가, 상사가, 동료들과 함께 발을 맞췄다면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풍경도 보고, 밥도 먹고 반대로 남들이 쉴 때 빠르게 달려보기도 하면서.
이제 서울살이를 하러 간다. 퇴사 후 만나는 서울은 또 어떤 모습일까. 기대와 설렘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