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닝 Sep 07. 2022

EP 02. 7개월간 4번의 이사가 내게 남긴 것

in 아일랜드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어학연수로 떠난 아일랜드에 7개월 머물면서 집을 4번 옮겼다. 누군가는 겨우 이 정도로 호들갑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겐 정말 힘든 시간이었고 잊지 못할 순간들이 많았다. 집을 옮길 때마다 ‘집’이란 공간은 무엇인지, 내게 맞는 환경은 어떤 것인지 등 집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기에 글로 남겨본다.


어학연수로 아일랜드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영어를 쓰는 유럽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 국가를 가보지 않아 궁금했고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하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유학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처럼 음주가무를 좋아하고 정이 많고 분단국가이고 등등. 그것보다 단돈 2,3만원에 영국과 프랑스를 갈 수 있다는 점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무튼 낯선 국가에 정을 붙이는데 공통점이 있다는 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나의 첫 주거지는 유학원에서 배정한 홈스테이였다. 직장을 다니며 모아둔 돈으로 나도 조금은 편하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사실 홈스테이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같은 회사 동료가 캐나다에서 2년 동안 있었는데, 처음 인연을 맺은 홈스테이 가족들과 같이 살면서 함께 여행도 다니고 거의 제2의 가족이 되어 나중에는 집세도 받지 않더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내게 너무 꿈만 같은 이야기라는 걸 알았지만 혹시 모를 기대는 했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게도 외향적 자아가 있다는 걸 깨닫던 때였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내향적이라고 말하면 믿지 못하기도 했으니까. 나도 다른 나라에 가족같이 느껴질 만큼 친한 누군가가 생긴다면 좋을 것 같았다. 첫날 홈스테이 주인 부부와 함께 인근 산을 같이 등산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 함께한 활동이었다는 걸 떠올리고 느꼈다. 역시 나한테 이런 관계가 쉽지 않다는 걸. 공적으로 일할 때와 사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차이가 있다는 걸. 그보다 내게 집이란 휴식, 재충전의 공간인데 서툰 영어실력 때문에 집에 와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버거웠고 어학원까지 가는 데만 한 시간 넘는 것도,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어 가까운 마트도 걸어서 한참이라는 이유로 한 달 만에 깔끔하게 정리했다.


내가 지낸 홈스테이 방



홈스테이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집을 보러 다녔다. 아일랜드는 집세가 비싸 집과 방을 나눠 쓰는 형태가 일반적인데, 나도 그 집이 마음에 들어야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도 날 마음에 들어 해야 거래가 성사된다. 처음에는 집 컨디션에 집중하여 꼼꼼히 살펴봤다. 온수는 바로 나오는지, 방 크기는 어떤지, 공용공간은 깨끗한지 등. 집이 괜찮다고 하면 이제 역으로 나에 대한 검증이 들어온다. 아일랜드에 얼마나 머무를 예정인지, 학생인지 아니면 일하는 사람인지, 영어는 잘하는지. 당연하게도 대부분 오래 머물 예정이며 일하고 있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학생은 집에 오래 머문다는 이유로 선호하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약 7개월간 어학원 과정만 밟고 돌아갈 예정이었고 영어에 콤플렉스가 잔뜩 있던 상태로 왔으므로 누가 봐도 얼굴에 ‘나 영어 못하는 사람’이라고 쓰여있었다.


한국에서는 월세와 집 컨디션의 문제였지 내가 머물 곳이 없을까 두려워한 적은 없었는데, 계속되는 거절로 이대로 집을 구하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홈스테이를 연장할 수도 있고 다른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어찌나 지쳤는지 다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고 집을 몇 군데 보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잠깐 쉬고자 편의점에 들어갔다. 커피 한잔을 사곤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는 어두운 밤거리를 하염없이 내다봤다. 외로웠다. 외로움이란 단어는 내 생애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현실을 그때 제대로 직시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렇게 바닥을 치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돌아갈 땐 가더라도 하는데 까지 해보고 가자.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살려 자주 받았던 질문과 내 소개를 대본으로 써가며 연습했다. 이제는 집 컨디션이 아니라 당장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고 회사 면접 보듯 준비를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이었다.


정말 힘들었던 그 밤의 편의점 커피 한 잔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건지 내가 홈스테이를 떠날 시기에 맞춰 3주짜리 단기방을 구했다. 간혹 이렇게 장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자기 방을 빌려주고 가는 경우가 있는데, 우연하게도 시기가 맞아 앞뒤 재지 않고 바로 약속을 잡았다. 어학원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고 지척에 도서관과 마트가 있어 좋았다. 단지 이 건물 안에 내가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사실과 샤워, 빨래 전쟁이 매일같이 이루어진다는 점만 빼면. 내가 지낸 방은 싱글 침대 3개가 여유롭게 놓여 있었는데 나머지 방들은 모두 2층 침대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대부분 브라질계 사람들이었다. 매일 밤 12시면 시작되는 파티와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빨래, 하필이면 또 내가 지내는 동안 한쪽 화장실은 쓰지도 못해 샤워하기 위해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고충이 있었지만, 기숙사 생활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막연히 짐작하며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여겼다. 


단기방에 사는 동안에도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은 계속 이어졌다. 3주라는 시간을 벌어 여유가 생겼고 이제 막 입이 트이기 시작했으며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는 질문도 거기서 거기였고 그 질문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유연한 대처로 함께 살기에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중국인, 인도인, 브라질인이 모여 사는 집들까지 돌고 돌아 말레이시아인 여자와 아일랜드 남자 부부가 집주인으로 있는 2층짜리 주택에 들어갔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아일랜드에서 한국인에 대한 평이 꽤 괜찮았다. 그동안 깔끔하고 부지런하고 사교적인 친구들이 많았는지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다들 호의적이었다. 내가 처음에 그렇게 버벅대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면 이토록 힘들게 집을 구하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무튼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연습의 결과가 빛을 보았다.


세 번째 집은 어학원에서 조금 멀다는 것 빼고 다 괜찮았다. 대만인 룸메이트는 일하느라 늘 늦게 들어왔고 들어와서도 서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해주며 조용하게 보냈다. 한 집에 다섯 명이 살았지만 부엌을 쓰는 것도, 화장실을 쓰는 것도 불편함이 거의 없었다. 홈스테이도 어학원에서 멀다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이번엔 그때보다 월세가 적고, 멀지만 그래도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초반 일주일은 버스 타러 가는 10분도 행복했다. 공원에 아침 산책을 나온 가족들이 보기 좋았고 보라색이었다가 푸른색으로 변하는 하늘도 낭만적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집집마다 해놓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제 막 영어가 늘고 친구들도 하나둘씩 사귀자 역시 집이 먼 것이 발목을 잡았다. 펍에서 한잔이라도 하는 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부터 걱정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 길은 사람 하나 다니지 않고 아침에 평화로웠던 공원은 불량 청소년들의 소굴로 변해있었다. 혹시 몰라 이곳에서 친해진 친구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띄워둔 채 걸었다. 여차하면 바로 전화할 수 있게. 이제 막 여기 생활에 재미를 들일 때라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소중했고 결국 1개월 반 만에 또다시 이사를 결정했다.



등굣길 보라색 하늘과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이웃집



마지막 집은 더 바랄 것 없는 완벽한 곳이었다. 집 위치와 컨디션, 같이 사는 사람들도 다 만족스러웠다. 루마니아인 룸메이트는 쓰리잡을 뛰고 있어 자주 보지 못했지만 큰 문제없이 지냈고, 옆방의 한국인 언니 덕에 아일랜드에서 먹기 힘든 짬뽕이나 김치를 먹으며 즐겁게 보냈다. 가져온 돈을 모두 쓰고 어학원에서 수업도 마무리되어 예정보다 한 달 앞서 귀국하기로 했다. 그러자 내 자리를 두고 플랫 메이트들 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 일은 내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어진 것으로 서로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집에서 마주치기만 하면 신경전을 벌이고 집주인에게 전화해서 따지고 중간에서 난감했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유감이라며 집주인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남기고 그 집을 떠났다.



내게 아일랜드에서의 날들은 좋았던 기억과 힘들었던 기억이 한데 엉켜 애증의 시간이었다. 특히 날 제일 괴롭혔던 집 문제는 오히려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의 나는 차가 잘 지나다니지 않는 외딴 시골집에 살아도 잘 살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혼자 집에 있어도 심심해하지 않고 할 게 많아 바쁜 집순이였으니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한적하고 공기 좋은 곳에 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막상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에 살아보니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을 느꼈다.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것과 갈 수 없는 것은 달랐다. 나는 살 것이 없어도 마트에 들어가 요즘 어떤 과일, 채소가 나왔는지, 세일하는 것은 없는지 둘러보는 걸 좋아하는데 집이 멀면 이 모든 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자주 올 수 없으니 들렀을 때 하나도 빠짐없이 사야 한다는 강박에 무거운 짐을 들고 집까지 가는 길이 고되기만 하다. 자주 오지 않는 버스 때문에 등교를 하든 친구를 만나 한 잔을 하든 내내 시계만 보는 것도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학교와 회사가 항상 도보 30분 언저리에 있었던 나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집 컨디션이 어떻고 플랫 메이트 성격이 어떻고는 집의 위치 다음 문제라는 걸 그렇게 깨달았다.


누구랑 사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사는 동안 서로 배려하고 불편함 없이 지냈지만 나에겐 딱 거기까지였다. 룸메이트와 친하게 지내며 함께 여행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괴로워한 적도 있었는데, 어디서든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게 더 편한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하기로 했다. 


이사와 여행을 반복하면서 내가 가진 짐들이 업보처럼 느껴졌다. 수화물용 캐리어 1개, 기내용 캐리어 1개, 백팩 1개, 에코백 하나 가득. 언젠가 쓸 것 같아 챙긴 것들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짧은 2박 3일 여행에도 수화물용 캐리어를 챙겨가던 나였는데 이곳에서 지내면서 기내용 캐리어 하나로 일주일간 여행하는 법을 배웠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분별하고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느낌이 뭔지 이젠 안다. 이 감각은 내가 집을 채울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내가 집 때문에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걱정해보지 않았다면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만족도가 그렇게 높지 않을 것 같다. 집을 구하고 꾸미는 과정에서 무수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거침없고 순조롭게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때의 경험 덕분이다. 세상에 정말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는 걸 이렇게 또 느낀다.



가는 길에 찍은 이름 모를 예쁜 성과 아일랜드 유명 관광명소인 모허 절벽


매거진의 이전글 EP 01. '내 집'이 있다는 안도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