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편집
주간 편집회의.
(홍, 수첩 들고 계단을 오른다.)
원수들 집결.
대표: 막판뒤집기의 명수, 일구이언의 달인. (부침개 뒤집개 들고 있음)
영업부장: 딴지걸기 9단, 뒤통수치기 백단. (갈고리 들고 있음)
디자인팀장 장 디잔. (납량물 귀신처럼 처연한 표정. 사계절 주무르는 핫팩)
[홍 생각] '니 손꾸락이 그렇게 소중해?'
2팀 팀장: 콩쥐. (두꺼비가 일을 해줌)
3팀 팀장: 팥쥐. (일을 하지 않음)
그리고 4차원 영혼 1팀 막내 장미까지.
회의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대표 호출.
(홍, 시안 들고 계단을 오른다.)
표정관리 하자. 여러 말 말자. 쿨하자. 쿨하자.
정신일도 하사불성.
[대표] “어쩐지 쫌 그래.”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잖아, 응?”
또 도졌다. 저놈의 아닐 병. 지랄스런 아닐 병. 너 죽고 나 죽을 병.
[홍] “아까 오케이 하셔놓고...”
[대표]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그래. 또 보니 또 달라서 그래. 어떡하지?”
생각하지 마! 자꾸 보지 마!
[홍] “어디가 맘에 안 드시는지 말씀 좀...”
[대표] “몰라. 이상해. 쫌 그래. 싫어.”
[홍 생각] '그렇게 이상한 걸 입때 끼고 있었니?'
[홍] “디자인팀이랑 의논해서 다시 잡아볼게요.”
비굴 비굴.
대표님 나빠요.
대표님 쓰레기예요.
(홍,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머리에서 김나는 홍)
이걸 어디다 갚지?
이걸 어디다 풀지?
(홍의 핸드폰 진동)
[친구 백] 대뜸. “뭐해?”
[홍] “일하지 뭐해? 넌 뭐해?”
[백] “왜 뾰족해?”
[홍] “내가 도라이버냐 뾰족하게?”
[백] “편집자라는 게 말하는 거 봐라. 도라이버가 뭐냐? 왜 또 빠꾸 먹었어?"
[홍] “빠꾸가 뭐냐. 무식하게. 우리말 두고. 그래, 뺀찌 맞았다.”
[백] “뺀찌는 우리말이냐?”
[홍] “왜 전화 했어?”
[백] “나 프로젝트 끝났어.”
[홍] “어쩌라고?”
[백] “놀자.”
[홍] “바빠.”
[백] “웃기지마.”
(홍, 머리에서 김이 더 난다.)
이런 된~장.
[홍] “장미씨, 보도자료 다 됐어?”
[장미] “이제 쓰려고요.”
[홍] “언제 쓸 건데? 책 출고 되고 쓸 거야?”
[장미] “일이 많아서.”
(장미, 자기 책상에 있는 거울 보며 미모 체크)
해맑~ 해맑~
(장미를 흘겨보는 홍)
바쁜 게 없는 것. 나쁜 것. 못된 것.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천불이 나는가.
(홍 편집과 장 디잔 회의실에 마주 앉아 서로 노려봄)
[장 디잔 생각] ‘편집장씩이나 돼가지고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내려와?’
[홍 생각] ‘그냥 내려오지 그럼 널뛰며 내려오냐?’
(장 디잔 마침내 내뱉는다.)
[장] “한두 번도 아니고.”
[홍] “내 탓이에요? 대표님 몰라요?”
[장] “마벨, 마벨*, 장사 원데이 투데이 해? 자기가 설득을 해야지. 매번 다된 밥에 코 빠뜨려 오면 어떡해?”
*마벨(Ma Belle). ‘우리 이쁜이’란 뜻의 프랑스어. 욕 보다 더 기분 나쁨.
(홍의 상상. 장 디쟌이 악귀 같은 얼굴로 홍을 올라타고 입에서 독가스를 뿜어내며 가슴에 못을 쾅쾅 박음.)
[홍 생각] ‘다된 밥은 대표가 처먹어야 다된 밥이지.’
[홍] “매번 편집만 중간에서. 나는 그냥 메신저예요.”
[장] “자랑이야? 편집장씩이나― 그만합시다. 알았어요.”
(홍, 열불 난 얼굴로 책상으로 돌아와 앉음.)
참자.
참을 忍이 세 번이면
나는 장 디잔을 죽이지 않을 수 있다.
(홍, 커피메이커 쪽을 쳐다보며)
내 피는 카페인 주입을 원한다.
(비어 있는 커피메이커)
누구얏! 마지막 먹은 인간!
(저편에서 역시 커피메이커를 흘깃대는 3팀장과 눈이 마주침. 두 시선이 만나 불꽃)
파다닥! 파다닥!
(둘의 눈싸움 이어짐)
[홍 생각] ‘니가 발딱 일어난다, 일어난다, 커피 내린다, 내린다...’
의미 없는 신경전.
치사한 눈치 싸움.
졸렬한 자존심 대결.
[장미] “팀장님, 똥마려우세요?”
[화들짝 놀라며 홍] “아니, 눈 운동이 노안 예방에 좋다고 해서...”
[장미] “그래도 그건 좀 흉하다. 하하하하하하!”
(홍, 어이가 없다)
[장미] “흠! 난 또 커피나 마셔야지!”
(장미, 일어나서 커피메이커로 간다.)
그래, 네가 낫다.
장미야, 1일 까방권 준다.
(책상에서 핸드폰 진동)
[친구 백의 카톡] “친구야~ 하트, 하트. 밥 사줄겡. 칼퇴하고 나왕.”
(고개 드는 홍. 어느새 와서 책상 모서리에 앉아 있는 장 디쟌.)
[홍] “헉!”
[장 디잔] “수정 시안 나왔어요, 보러와.”
[홍] “전화로 말씀하시지...”
[장 디잔] “화장실 가다 들렀지. 보러와~”
(장 디잔, 손을 흔들며 유유히 사라짐.)
(홍, 그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내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실내인데도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분다.
오늘도 내가 진 하루였다. 언제나처럼.
나는 오늘도 권력 앞에 배짱 없고,
원수 앞에 나약하고,
동료에게 쪼잔하고,
친구에게 치사한 인간이었다.
언제쯤 이기는 날을 맞이하려나.
또 한 번 애잔한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