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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pr 02. 2024

보고 싶다 정선아

-정선군 아우라지, 덕우리 대촌마을






  삐딱해진다. 오늘도.

 도무지 스트레스받을 이유가 없는 인사말인데 또 못마땅한 듯 왼쪽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모난 곳 없이 둥글게 둥글게, 고개를 가로젓기보다는 상하운동에 천착하며 곱게 나이 먹어야겠다는 다짐이 오래가질 못한다. 글로 적어보니 더 꼴불견이다. 호의를 담은 인사에... 꼭 그렇게 시비를 걸어야 속이 시원했냐?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이게 뭐가 어때서? 아무리 쿨한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손님이 와도 무심한 곳이 얼마나 많은데. 나름 이유는 있다. 공교롭게도 연이어 간 두 곳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환영의 말을 들었다. 제법 큰 규모의 옷 매장 그리고 미용실이었다. 직원교육이 돼 있었겠지. 불만인 것은 그들이 안녕하냐고 묻는 대상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어쩜 그리 판박이였을까. 직원들이 내는 환영의 음성은 벽을 향하고 있었고, 내 눈과 교차하는 시선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안녕하느냐는 질문을 받아야 할 대상은 고객은 어디에도 없었다. 약간의 경추 회전만 해 주어도 좋았을 것을. 미소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사람 대 사람으로 눈길 정도는 마주하며 건네야 인사말이 되는 것 아니냐는 소리다. 알고 있다. 내 기준과 내 취향대로 세상이 맞출 수는 없는 일. 그래도 어쩌나, 켜켜이 쌓인 야속함은 어쩔 수 없다.   


 고갯길을 타고 올라갈 때가 된 것이다. 메트로폴리스도 아닌 인구 20만의 도시에 살면서도 삶에 찌드는 순간이 반복해 찾아온다면, 그래서 불만의 녹이 슬어 우수수 찌꺼기가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면. 가야 할 그곳은 마땅히 이름부터 아름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깔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이 경치의 격을 높여줘야 하며 경치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정선군 '여량(餘糧)'이다. '어'량이 아니라 '여'량이라서 섬세하고, 여'랑'이 아니라 여'량'이라서 산뜻하다. 합격이다. 남한강을 이루는 두 물줄기가 합쳐진다는 아우라지는 '여량'이라는 곳에 있을 법하다. 반짝이는 강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명이지만 왠지 윤슬이 눈에 그려지는 이름이다. 그럼 됐다. 나라는 하나의 티끌은 섬세하고 산뜻한 풍경 속으로 감히 뛰어들면 되는 것이다.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 아우라지


본인이 매력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또는 그녀가 진정 멋있는 건 그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풍경이 기가 막힐 테니 어서 와 확인해 보라고 야단스레 손짓을 하는 곳이 아니다. 이곳이 더 끌리는 이유다.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 남한강을 만들어내는 자연합일의 현장이다. 삶의 현장에 토라져 벌어진 마음 한 구석이 봉합되는 느낌이다. 강원이 품고 있는 것은 억세고 엄격한 능선뿐이 아니다. 360도를 부드럽게 둘러 젖줄과도 같은 물줄기를 보호하고 있는 인자한 산줄기 역시 강원도의 이미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름을 꺼내기 부담스러운 인물들이 있다. 가령 한때는 영광의 아이콘으로 추앙되다가 추락한 사람이라든지, 지금 시대와는 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과거 속의 인물이라든지, 결이 맞지 않는 걸 넘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사람들 말이다. 


 김지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세 글자다. 워낙 큰 인물이었어서 그렇기도 하고, 위에 나열한 부르기 부담스러워지는 이유 중 무엇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인물이어서도 그렇다. 그의 사상의 변천과 철학의 흐름은 각자가 알아서 평가하면 될 일. 괜스레 장광설을 펼쳐 밑천이 드러나는 짓은 거절해야겠다. 단지 난데없이 김지하라는 이름을 소환한 까닭은 정선, 그것도 여량의 아우라지를 향한 그의 집착에 가까운 믿음 때문이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자라 강원도 원주에서 살았다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다. 대 소설가 박경리의 딸과 결혼해 파란만장한 삶을 거친 그는 정선 '여량'의 명칭에 대해 '지하'(그의 최초 필명인 바로 그 地下)까지 파고 들어간다. '남은 양식', 혹은 '남는 양식', '여량(餘糧)'의 직관적 뜻풀이다. 무언가 유려하고 청량한 발음이지만 원 뜻은 그렇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먹고 남은 잉여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선의를 베풀 수 있으려면 체제 안에서 소비를 마친 후 남는 게 있어야 한다. 즉 현대의 한 소비사회가 지나가고 뒤에 운이 좋아 남는 건 '잉여'다. 

 고대 이래의 역사와 문헌을 고찰한 뒤 그가 밝혀낸 우리의 '여량'은 쓸 거 다 쓰고, 먹을 거 다 먹고 난 뒤의 찌꺼기나 개평이 아니다. 쯧쯧... 하고 적선하듯 던져주는 자투리일 수 없다. 무엇을 생산하기 전 단계부터 고려해 놓은, 정성스럽게 계획적으로 '남겨둬야' 할 부분이다. 그 옛날부터 무엇을 생산했다면 그것은 농작물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사람만 정성을 들인다고 해서 자라는 게 아닐 터, 하늘이 돕고 땅이 돕고 바람이 도와야 수확할 수 있는 게 농작물이다. 신심을 다해 수확한 농작물, 그 귀하디 귀한 아름다운 결실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신에게 바친 뒤에는 곤궁한 누군가에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미리' 배려해 두는 것이 '여량'인 것이다. 찌꺼기와는 차원이 다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거룩한 산물이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이자 상서로움이다. 인류에 대한 사랑의 근원지로서의 공간인 여량 아우라지를 김지하는 미학의 중심이자 세계정신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 역시 해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출렁다리 위에서, 둘레길 위에서 조심스레 합쳐지고 있는 강물'들'을 바라본다. 잘못했구나. 오버했구나. 쓸데없었구나. 일상에서 배어 나오는 각종 속좁음들이 모두 합쳐져 남한강에 쓸려가 버리기를. 합강의 감동과 넉넉한 배려의 정신이 교차하는 이곳 아우라지에선 속세의 야속함을 벗어던질 이유가 그야말로 '여량'만큼이나 충분하다.    

   


 아우라지를 지나 남쪽 방향으로 30여분 더 달리면 '덕우리 대촌마을'이 나온다. 그냥 나온다기보다 국도에 접해있는 진입로를 정확하게 찾아 급한 내리막을 꾸불꾸불 따라가야 '찾을 수'있다. SNS를 봐도 '덕우리 마을'이 1/3, '대촌마을'이 1/3, '덕우리 대촌마을'이 또 1/3이다. 그래서 더 헷갈린다. 덕촌리? 대우마을? 언어기능 담당 뇌세포의 노화도 헷갈림에 한몫을 보탠다. 경사가 평탄해지면서 멋스러운 마을의 분위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 집이 이 근처일 텐데?...  찾았다. 응 맞네. TV에서 본 그대로야.   

       예능프로그램의 무대가 되었던 정선군 덕우리 민박집 '하늘색 꿈'


 삼시에 세끼를 해 먹는 프로그램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민박집이다. 강원도 산골 특유의 정취를 기대하고 갔는데 대성공이다. 방송이나 사진을 보고 찾아간 곳에 실망하기 일쑤여서 그간 쌓였던 실망이 쾌재로 역전되는 순간이다. 숨을 죽이는 흰색 투명함으로 빛나는 겨울이 있다면, 지나치게 초록과 파랑이어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초여름의 투명함이다. 건강한 빛이란 이런 것. 참기름을 입힌 듯 여름의 초록은 윤기가 가득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늘의 파랑은 우주 끝까지 관통할 듯싶다. 우주는 파란색이 아니던가. 수확을 위해 심은 작물, 그냥 알아서 자라는 식물. 모두가 건강하고 풍성하다. 정선이라는 넉넉한 산골에 살고 있는 그들이니 부족함이 없다. 사람이었다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태어난 운 좋은 녀석들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었어도 청정 강원도에서 태어나 얼마나 다행이냐고 해야 하는 걸까. 


 봄이 되면 채소 모종을 사 마당 한편에 심는다. 먹을 만큼만 심자고 다짐하지만 언제나 성장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수확량이다. 제주도에 살 때부터 줄곧 농부 흉내를 냈으나 늘 심는 것은 실패하기가 더 어려운 작물들이다. 청상추, 꽃상추, 로메인 등의 상추류와 깻잎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루꼴라, 바질, 로즈메리 등의 허브는 기분전환이다. 대파와 부추 등 길쭉한 녀석들의 일렬횡대는 뿌듯하기 그지없고, 모종이었을 때는 상상조차 힘든 수확물을 선사하는 옥수수와 가지, 딸기는 맛을 떠나 신기해 미칠 따름이다. 텃밭이 넓었으면 수박 모종을 꼭 심어보고 싶었는데 나중의 기쁨을 위해서 남겨두는 걸로 한다. 종묘사에서의 봄 쇼핑은 두근거릴 정도다.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성큼 자랄 테니 바비큐 약속도 슬슬 잡아야 한다. 얼마나 고마운지. 실패하기 어려운 작물엔 '기른다'는 말이 가당찮다. 이들은 그저 스스로 자라줬고, 나는 바라보고 수확의 기쁨을 누렸을 뿐이다. 강원도의 속살, 정선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오죽할까. 그들의 한없는 건강함을 깊은숨으로 들이마시고 있다.  

  

 

 물소리가 들린다. 옥순봉 밑동을 따라 어천이 나아가는 소리다. 상시 공간애정결핍 상태로 살아가는 나에겐 강원도 산골을 휘감아도는 강물의 아련함은 또 다른 중독의 대상이다. 바로 강 건너편은 원빈, 이나영의 결혼식 현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꽁꽁 숨겨진 정선의 작은 마을이 알고 보면 공간계의 셀럽이었던 거다. 그나마 대도시에서 단시간에 수월하게 다녀갈 곳은 아니어서 웅성거림은 찾아볼 수 없다. 수월하지 않아야 셀럽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대개 한창때 그렇듯, 아침이 힘들고 깊은 밤의 피곤함은 좀체 느끼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때부턴가 아침잠이 점점 없어지더니 남들에 비해 일찍 출근을 해야 하는 시차제 근무가 갈수록 편해지는 게 아닌가. 5시 반에 일어나도 출근 준비에 충분하건만 새벽 3시, 혹은 4시에 눈이 떠지는 날이 잦다. 악몽에 놀라 갑자기 깨는 것도 아니다. 해빙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살얼음이 물가 쪽부터 스스로의 뭉침을 포기하듯이 수면의 욕구가 닥쳐올 일상에 대한 사소한 걱정에 항복을 하며 자취를 슬며시 감춘다. 그러고 보니 지나치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는 이유로 놀림 아닌 놀림을 받는 일이 잦아진다,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한다는.

 이른 기상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이 있다. 일상의 루틴에 이상할 만큼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 무언가 재미있는 일 없을까? 매일 똑같은 날들 지겨워 죽겠어. 오늘은 어떤 약속을 만들어 볼까나... 정해진 시간에 시작해 정확히 끝내야 하는 방송을 천직으로 삼았으니 어쩌면 파격과 일탈을 바랐던 과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적어도 방송국을 벗어나면 철 만난 메뚜기처럼 이리로 튀고 또 저리로 튀어야 하는 게 정신건강 상 도움이 되는 법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오늘 하루도 바쁘게 일을 하다 퇴근해서 진돗개를 산책시키겠지.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겠지. 포만감으로 늘어진 육체지만 그래도 책은 좀 읽고 자야 해. 서쪽으로 급격히 이동하는 햇살 때문에 블라인드를 차례로 내리느라 번잡하긴 하겠어. 독서를 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굳이 저항 안 할 거야. 어차피 일찍 깰 텐데 뭐.' 복붙인 매일의 루틴을 매일 아침 예상하면서 설레기까지 한다면 변태일까. 사실이다. 타임루프 영화와도 같은, 그러나 반전은 없는 건조한 날들이 지극히 편안하다. 이 쳇바퀴 같은 평화를 깨는 누군가나 무언가가 있다면 토라지고 만다. 천체의 운행에 맞추어 하루를 살고자 하는 노자의 평정심을 감히 깨려는 자 누구인가 말이다.  

 가식일 뿐이다. 돌아보니 그곳엔 세상의 변화에 주저하는 내가 있었다. 달라지고 변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마치 도깨비인 듯 무섭다고 징징대며 거부하는 어린아이가. 이 나이가 되면 그런 거야 하는 변명의 일색. 적당한 파격과 신선한 도전에도 이물감을 갖는 고집덩어리가 내뿜는 해로운 기운일 따름이었다.   

 고갯길을 타고 올라갈 때가 된 것이다. 이로운 자괴감이 찾아온다면, 그래서 곰팡이가 낀 마음의 필터를 교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정선 1교에서 평창 방향 둔치에 조성된 '보고 싶다 정선아' 화단   


  왠지 그런 정선 씨가 살고 있을 듯하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올라온 누군가에게 고생 많으셨다고, 무서울 거 하나도 없으니 무거운 것들 있으면 내가 사는 여기에 다 놓고 가시라고,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건네는. 여량의 지혜를 품은 아우라가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아우라지에서, 녹이 슨 영혼 속으로 강원도만의 초록과 파랑이 온통 엄습해 오는 덕우리에서 정선 씨는 살고 있다. 그녀가 있을 곳은 정선이다.

 

 다시 그녀를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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