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시
검정
-원초의 감정 / 두려움 / 죽음 / 유혹 / 세련 / 우아 / 금욕 혹은 관능의 색
그러나 검정은 색(色)이 아니다. 모든 색이 반사된 빛으로 감각된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17세기로 돌아가 위대한 뉴턴에게 물어보라. 유리 프리즘에 백색광을 통과시켜 얻어낸 색 중 검정이란 없다. 모든 빛을 먹어버려 빛이 없는 '상태'가 곧 검정이다. 그렇다. 상태는 빛이나 색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검정은 색이 될 수 없다. 색은 곧 빛이므로.
적어도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도심부만 놓고 보자면 태백은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의 형상이다. 그 분지 자체도 해발 700미터 가까이 솟아있으니 천연 요새와도 같다. 게다가 둘러친 태백산세의 호위는 더 이상 든든할 수 없다. 이곳은 들뜬 순례자에게는 아늑한 둥지가 되어 주지만 침잠한 구도자에게는 육지의 절해고도가 되어버린다. 고원의 질박함에 아무것도 기여한 게 없다 보니 나는 구도자가 될 일도 없다. 이 작은 도시의 청량함을 흥얼거리며 만끽할 뿐이다. 검은 채굴의 역사는 '광업'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되는 거고, 사라진 일자리와 주저앉고 있는 지역경기는 국가에서 챙겨주면 될 일이다. 어느 지역, 어떤 산업이 흥망성쇠가 없었으랴. 힘들다면 다시 힘을 내면 되겠지. 자, 태백시여 보기 좋게 일어서자!
얼마나 한가하고 무지한 녀석인가. 큰 틀이 아닌 '사람'을 봐야 할 일이었다.
각별하게 지냈던 후배가 있었다. 태백 토박이. 서너 살 터울이라 적당한 형, 동생 간격에 먹고 마시고 즐기는 취향도 엇비슷해 매일같이 붙어 다녔다. 사회 초년생들의 신나는 의기투합 정도였다고 보면 되겠다. 간간이 집으로도 초대받아 밥도 얻어먹었으니 일터에서 만난 사회친구치고는 각별했다. 다투어 끼니를 챙겨주시는 후배의 누님과 형수는 마흔이 넘으셨고, 푸근한 미소의 어머님은 일흔이 다 되셨다. 자기가 늦둥이라 귀하게 자랐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한때 탄광에서 날아다니셨다는 후배의 형님은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 계시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드디어 형님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밥 한 끼 염치불고하고 얻어먹던 저녁, 그동안 한 번도 속을 보이지 않던 구석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대고 눈인사를 건네는 후배의 형님을 보았다. 그랬었구나.
폐부를 채운 검댕이 지옥처럼 호흡을 옭아매는 저주, 극심한 진폐의 피해자가 거기 누워 있었다. 진폐전문병원과 집을 오가며 숨 가쁜 막장 속 삶을 막장 밖에서도 여전히 이어가고 있는 검정의 볼모, 검댕의 피해자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병원에 계셨거나, 집에 있었어도 닫힌 방 안에 누워 가는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으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때는 웃음으로 배웅받으며 씩씩하게 탄광으로 출근했을 적지 않은 식구의 가장이, 이젠 한 움큼의 숨이라도 간절하게 넘기려 하는 아이가 되어 그 자리에 하릴없이 누워 있다.
궁한 사람이 싸워야 한다. 결코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의 재해자 권익 보호장치조차 진폐재해자들 스스로가 투쟁해서 얻어낸 결과이다. 석탄채굴 황금기에 KF94등급의 마스크 따위는 사치였다. '막장에 들어갈 본인이 알아서 방진 철저히 해야지' 하는 지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수밖에. 어떤 사업장보다도 구호를 외치기 힘든 곳이 광산 아니었을까. 절절 끓는 목소리로 피해 구제를 호소하던 광부들이 없었다면 <진폐법>과 그에 따른 보상, 요양책도 나올 리 만무했다. 붕괴사고로 유명을 달리 한 수많은 광부들은, 물론 이런 호소의 기회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의 별명은 다채로웠다. 두더지, 생쥐, 검은 노예, 흑인... 굴진 작업으로 녹초가 되어버린 오후, 당연히 밤낮 구분은 되지 않는 막장이다. 허리도 세우지 못하는 어둠에서 뚝뚝 떨어지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허겁지겁 도시락을 꺼낸다. 검은 김가루 마냥 탄가루가 흰 밥 위로 내려앉는다. 궁색하나마 반찬을 털어 넣어 몇 차례 쓱싹 비빈 뒤 목구멍으로 넘긴다. 씹는 건 사치다. 기도를 따라 흡입되던 검댕이 이번엔 식도를 따라 농축되어 넘어간다. 광부의 몸속은 온통 검정이다.
일제의 강압이 종식된 뒤에는 그들 스스로가 원한 직업이다. 분명하다. 그러나 이건 알아야 한다. 나라가 등을 떠밀었다. 그 이유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잘 살아야 했으니까. 연료가 필요했고 자원이 나와야 했으니까. "산업전사가 되어 투철하게 채탄하시오. 그럼 충분한 보상을 할 테니." 그걸로 끝이라는 게 문제다. 생명을 위협하는 수백, 수천 미터의 갱도에서 담보되지 않은 안전, 광부로서의 삶이 끝난 후 피할 수 없는 진폐의 재해. 그런 사소한 것들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국가가 신경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모든 빛을 흡수한 검정처럼 모든 선대의 에너지를 흡수한 석탄은 찰나의 불꽃으로 산화한다. 시대의 압력을 흡수한 광부의 폐는 덧없는 희생으로 스러져간다. 검정엔 희생이라는 의미를 더해야 마땅하다.
빌리 홀리데이(픽사베이 이미지)
아프리칸-아메리칸 문화까지 언급할 생각은 없다. 노예 제도의 역사까지도. 볼링공처럼 단단했던 차별에 대해 그나마 자기 위로를 할 수 있었던 시절, 감고 난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듯 멜랑콜리가 도시의 뒷골목을 적셨다. melan이란 어원이 '검은 무엇'이라는 건 그래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 두려움, 죽음, 유혹, 관능의 검정으로부터 멜랑콜리를 분사해 낸 것은 검은색 피부를 가진 자들의 숙명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를 가진 그녀, 빌리 홀리데이만큼 검정에 충실한 위인이 있었을까. 생전 '레이디'라고 불리던 그녀는, 품위가 느껴지는 호칭과 달리 사실에 더해진 편견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았던 한 사람이다. 창녀 출신, 상습 마약 투약, 남성 편력, 피학적인 성향 등 시절의 모범에서 정 반대에 서 있던 흑인 재즈가수. 그렇게 세상의 마이너라는 마이너 요소들은 빠짐없이 갖고 있었던 그녀이기에 편견의 족쇄를 채워도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레이디는 비하의 시선에 통렬하게 노래로 답을 했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검은 아름다움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모든 이들에게 증명했고, 검은 슬픔은 얼마나 차분하고 묵직하게 바닥에 깔리게 되는지를 미국인들에게 간증했다.
Southern trees bear strage fuit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Black bodies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ular trees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산들바람에 검은 몽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린다
포플러나무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열매
자칫 인종과 사회문제에만 그녀의 재능을 쏟았다고 오해받을까 두렵다.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디만이 부를 수 있는 검은색 감정이 응축된 것이 이 노래라는 것은 명백하다. 'Strange fruit'. 빌리 홀리데이가 1939년 초연한 곡으로 인종차별에 대항해 온 루이스 앨런이 만든 작품이다. 위는 노래 가사의 앞부분이다. 흑인들이 그들의 즉흥음악으로 쌓였던 한을 풀어냈다 하더라도, 실제 나무에 매달렸던 흑인의 머리를 이렇듯 직접적으로 드러내도 되는 건가... 당시 미국 남부지방에서 벌어졌던 흑인 집단 린치 사건을 보란 듯이 읊조린다. 사람의 머리가 '열매'로 비유되었다면 너무도 단순하지 않은가. 조금 더 꼬아서 가사에 담았어야 충격이 덜했을 텐데 그런 자비는 눈곱만큼도 없다.
레이디는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처음 이 노래를 받았을 때는 가사 속 이상한 열매가 도대체 무엇을 나타내는지도 몰랐을 정도였다고 하니까. 그러나 이내 그녀 스스로 이 노래 자체가 되었다. DNA 속에 각인된 검정의 멜랑콜리가 그녀를 사로잡았고, 레이디는 곧 슬픔의 역사가 되어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Strange fruit'을 부를 때면 공연장의 불빛은 그녀만을 비추는 핀 조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꺼져야만 했고, 심지어 웨이터들의 서빙도 모두 중단되었다. 객석은 얼어붙었다. 카페 소사이어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마지막 곡으로 'Strange fruit'를 청했고, 그렇게 얼어붙은 채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 라스트 송은 마지막 불꽃을 연소할 만한 화려한 곡이 아니었던가? 청중이 레이디로부터 피날레로 선물 받고 싶은 감성은 다름 아닌 충격과 무너짐이었다. 스스로가 메조키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음울함.
내재적인 슬픔과 두려움, 불안함, 그러나 숨겨지지 않는 우아함으로써의 검정은 빌리 홀리데이, 그녀 자신이다. 레이디의 세상 가장 슬픈 목소리는 검댕이 되어 그녀를 기리는 모든 사람들의 폐에 침투한다.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목소리라며 세상은 그녀를 추켜세웠지만 동시에 마이너로서의 검정일 뿐이라며 그녀를 폄훼한다. 천대와 차별의 화살을 사후에도 온몸으로 받아내는 그녀는 끝없이 스러진다. 검정엔 사무침이란 의미를 더해야 마땅하다.
철암 탄광역사촌 까치발 건물의 뒤, 멀리 광부인 남편을 배웅하는 부인과 출근하는 남편이 동상으로 서 있다
대한민국 경제의 엔진이었던 품 안의 탄광이 하나둘씩 스러져가면서 태백은 의지할 곳 없는 독거노인이 될 위험에 빠져있다. 그것도 폐에 가득히 쌓인 먼지로 한숨조차 사치스러울 갈 곳 없는 존재. 그렇다 해도 자식과 손주들이 찾아와 흐뭇하게 지혜를 물려줄 반전의 기회가 없지는 않다고 본다. 폐광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자치단체와 주민들의 아이디어로 재활에 성공한 사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공통점은 갱구를 포함한 광산을 막거나 수장시켜 없애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유산 그대로를 보존하되 놔두지만은 않는다. 방문객들로 하여금 광산을 생생하게 탐방하도록 시설을 개선한다. 시대의 minor였던 miner를 밝은 빛 아래로 인도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자손이 되도록 한다. 물론 탄전시설의 탈바꿈으로만은 역부족이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 인식이다. 남아있는 원주민들, 쇠락을 재생으로 바꾸기 위해 들어올 이주민들 모두는 어떤 도시재생 방안을 채택하든 태백이라는 곳의 정체성이 그 속에 녹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반전의 기본이 될 유산들이 곳곳에 남아있다는 사실은 태백의 밝은 빛을 예감하게 한다.
태백시 금천동의 최초석탄발견지탑
(좌) 폐쇄된 장성광업소의 제2수갱(수직 갱도) 시설 (우) 폐광된 함태탄광의 수갱
그럼에도 어둠을 극복하고 커다란 빛으로 거듭나는 것은 죽을 정도로 힘든 일이다. 떨어지는 물체에 역추진 엔진을 가해 거꾸로 솟아올라야 하는 극한 역전의 시도가 필요하다. 흑색의 차별을 메우기 위해서는 단장의 아픔이 뒤따른다. 검은빛의 상쇄에는 흰 빛이 아닌 핏빛의 희생이 동반된다. 중력의 역전이 절실하다. 지구에서 어떤 발사체를 우주로 보내기 위해서는 초속 11킬로미터의 추진이 필요하단다. 지구가 끄집어당기는 인력을 이겨내기 위한 최소한의 속력이다. 만약 우리가 태양에 살고 있다면 초속 617킬로미터로 로켓을 쏘아 보낼 능력이 있어야 거대한 태양의 인력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빛과 에너지를 흡수해 버리는 블랙홀에서라면? 빛보다 빠르면 된다. 불가능하지만 간단하다.
탄광역사촌의 까치발 집이 발을 담근 철암천을 따라 걷는다. 폐광이 된 지금의 철암천도 거무스름하다. 채탄이 활발했을 때 이곳에 흘렀던 물은 얼마나 검었을까. 순수한 검정에 가까웠겠지. 차라리 순수한 검정이 아름다웠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그러고 보니 흐르고 쌓여 온 모든 것이 검다. 검을 뿐이다. 생사갈림의 무대였던 막장도, 광부들의 폐를 가득 채운 검댕도, 비극을 담고 흐르는 노래도, 그 노래를 부르는 슬픈 목소리의 주인공도.
검을 뿐이다.
어느 날 태백에서 재즈 연주를 듣게 된다면 그래서 만감이 교차할 듯하다.
'너희들은 검은 황금을 캐내고 부르고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야. 따뜻하게 만끽하고 흥얼거리는 건 우리가 할 테니.'
그 무섭도록 뻔뻔한 세상의 아이러니를 직관할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일 것인가.
철암탄광역사촌의 까치발 주택들
블랙홀의 검정이 한편으론 위안이 되기도 한다. 모든 걸 흡수한다고 하지 않는가. 모든 빛을 끌어들이는 검정은 모든 것들을 포용한다. 빛이 반사되어 되돌아 나가는 것은 백, 모여들어 풍덩 빠지는 것은 흑. 결국 모태는 검정이다. 크게 밝은 빛의 도시는 태초의 검정을 내재하고 있다. 한강과 낙동강의 근원을 담지하고 있는 하늘아래 첫 동네 태백은 그래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밝은 어두움'의 공간이다. 우리는 근원을 결코 버릴 수 없다.
태백은
검고도 희다.
검정
-포용 / 역전 / 근원 / 본질 혹은 태초의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