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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Nov 15. 2024

커피 유니버스

-커피도시 강릉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왜 하필 강릉이란 말인가.

 설마 예전부터 들었던 그 이유 때문이라고? 그게 맞다고?


 아무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 봐도 다들 그럴 거라는 거다. 극소수의 달인이 웅숭깊은 향기와 맛을 구현해 붐을 일으킨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빅뱅의 단초는 이 녀석들이 맞다는 거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의 대선배란 얘기다.

 

 전설의 자판기가 위용을 뽐내고 있던 정확한 장소는 사진의 위치와는 달랐으나 아무튼, 초거대 강릉 커피 유니버스의 출발점이 안목해변의 보잘것없던 커피자판기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사실은 그게 아니라며, 보다 합당해 보이는 근거를 누군가 찾았을 법도 한데 자판기 기원설은 우뚝하다. 찾았다 해도 저작권 문제로 책에 싣기 번거로웠겠지만 1990년대 안목의 커피자판기 사진은 좀체 찾을 수가 없다. 포털에 이미지로 검색되는 사진들도 2000년대를 훌쩍 뛰어넘는 것들 뿐이다. 분명한 기억 속의 기계는 투박한 버튼이 돌출되어 있는 베이지색, 전형적인 자판기계의 시조새. 그 모양새였다는 것. 추억의 안목 자판기 사진 갖고 계신 분 어디 안 계시는지. 제보해 주시면 커피 사겠습니다.  


 20대의 끝자락이었다. 소문이 돌았다. 안목 바닷가에 커피자판기가 있는데 맛이 끝내준다는. 자판기 커피가 끝내줘봤자지. 영양가 없는 소문 따위나 끝내주고 싶었다. 가성비 좋은 고깃집 소문이나 들려줄 것이지, 설탕 프림 적당히 뒤섞인 자판기 커피 마시러 거기까지 갈 사람이 있나. 무시하자.

 묘한 효과가 있다. 코끼리 생각 말라면 더 난다는 바로 그 효과. 소문의 출처가 택시 기사님들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자 전설의 코끼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러다 나만 못 마시는 거 아닌가. 차를 몰아 안목으로 갔다. 25년 전 안목해변은 듬성듬성한 횟집과 모텔의 거리. 사람들이 제법 몰려있어 자판기의 위치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동전을 넣으니 드디어 실물영접. 그냥 자판기 커피색. 잠시 식힌 뒤 입술 영접. 겨울이었던 탓에 기분 좋은 온기. 뽀뽀와 비슷하군. 혀와 구강의 영접. 당연히 달면서 살짝 쓰고도 신 맛이 입 안을 한 바퀴 돌아 녹진하게 흘러 식도로 넘어간다. 사반세기 전의 커피 맛을 반추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감각의 기억이란 무서운 것. 놀랄 만큼 맛있지는 않았던 게 확실하게 떠오른다. 천상의 맛이어야만 잊히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실컷 기대했는데 그게 아닐 때도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전설의 안목 자판기 커피에 대한 총평은, 이제 와서 얘기하자면 '베트남 연유커피의 달콤 쌉싸름이 소량 가미되어 있는 적당히 진한 풍미' 정도다. 물론 입맛은 천차만별이니까.           

 

커피축제 기간 강릉 안목해변


 강릉시민들이 삼삼오오 자판기 앞에 모여있던 안목해변은 그야말로 상전벽해. 외양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전국 최고의 커피 성지로 우러름을 받으며 한 커피 한다는 애호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 내용이 있는 상전벽해다. 안목 커피거리의 수많은 카페들은 강릉시 자체를 커피도시로 거듭나게 하면서 직계조상인 자판기 할아버지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커피의 고장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간 강릉시는 커피축제의 메카가 되었고, 2024년 커피축제는 16회째를 맞았다. 축제는 코로나19 공습 기간 실내와 실외를 오가며 치러졌지만, <커피, 바다와 다시 만나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커피의 향기는 다시 해풍의 낭만과 합일이 되었다.    

 강릉 안목 커피거리의 안내는 더 이상 필요 없지 않을까. 로스팅하우스를 따로 두고 있을 정도로 맛에 진심인 카페들이 통쾌한 통창 바다뷰까지 장착하고 있다. 테이크아웃을 했다면 송정해변 솔밭으로 걸어가며 음미해 보자. 중강볶음된 원두의 진하고 약간은 쓴 맛에 코로 들어온 솔향이 조화롭다. 그러고 보니 강릉 하면 소나무의 고장인데, 신박한 메뉴 하나 추가해야겠다. '송정 파인트리 리저브 콜드 브루'. 

 안될까?        

   

강릉커피축제의 대표 프로그램 100인 100미 바리스타 퍼포먼스 


 생각해 보니 억울해죽겠다. 커피를 도대체 몇 잔을 마신 건가. 새벽의 '모닝콜 커피', 점심을 먹은 뒤의 '소화제 커피'까지는 나만 즐기는 것이 아니므로 패스. 수년 전부터 글을 쓰기 위해 메뚜기처럼 돌아다닌 카페만 해도 백여 군데는 족히 넘을 것이고(단골 포함), 500일로 계산하면 들이켠 커피만 500잔 이상이란 얘기다. 어쩌다 달달한 과일주스가 당기는 날도 있는 것이어서 500일 내내 커피를 주문한 건 아니겠지만, 유난히 글쓰기가 탄력이라도 받는 날엔 하루 두 잔을 시킨 적도 있으니 어림잡아 500잔이라면 결코 과장된 숫자가 아니다. 잔당 오천 원으로 계산해 보자. 이백오십만 원. 유명 작가도 아닌데 인세가 얼마나 되려나. 그래서 절실해지는 두 가지 생각.

 첫째. 억울하면 글을 잘 써야 한다. 너도나도 찾는 작가가 돼 봐라, 스페셜티 커피도 매일 마실 수 있다.

 둘째. 남는 게 없는 글쓰기니(물론 발행 순간의 엑스터시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남는 게 없도록 만든 바로 너, 커피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자. 즉 글의 주제로서 역할을 부여하자. 커피콩을 갈듯이 널 글로 갈아버리겠어.    

 두 가지 생각 뒤의 뻘쭘함.

 이런 글이라도 나온 게 누구 덕분이지? 그래 너 없으면 안 됐어, 커피야. 잘못했어.

 참회를 하며 다시 겸손해져야겠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봉봉방앗간, 오월커피, 명주배롱


 강릉 안목 커피거리와 테라로사가 루브르라면 명주동 골목의 정감 있는 카페들은 오르세 미술관의 복도다. 당연하게도 명주동 역시 강릉 커피인들에게는 친숙함이 정도를 넘어선 지 오래인 커피의 공간이다. 쇠락해 가는 구시가지를 커피와 공연의 명소로 탈바꿈시킨 시민들의 노력이 단단하다. 그래서인지, 드립으로 모인 명주 커피의 질감도 치밀하다고 해야 할까.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오가는 명주동의 가을은 가볍지 않은 영동의 낭만 한 잔이다. 

   

강릉 중앙시장 부근 카페들


 강릉이 커피의 도시라는 증거는 안목에서보다 중앙시장으로부터 뻗어 나온 줄기에 서 있는 시장 커피집들에서 명백하다. 닭강정 가게의 주인아주머니도, 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할머니도 다방커피는 사절이다. 2천 원이라는 충격적인 가격으로 바리스타의 자존심이 담긴 로컬 아메리카노를 맛볼 수 있다. 모든 시민이 테이스터나 마찬가지. 누군가 말했다, 강릉시민의 피에는 커피가 흐르고 있다고. 역사란 만들어 가는 것. 커피장인들의 제조 실력이 아니라 시민들의 음미력이 커피도시 강릉의 품격을 높이는 원천이 아닐까. 강릉의 커피사(史)는 오늘도 방울져 축적된다.    

 

아르튀르 랭보(1854~1891)


 뜬금없다.

 염소를 통해 커피 열매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목동 칼디도, 커피 칸타타를 작곡한 바흐도, 에스프레소 머신을 최초로 발명한 모리온도도, 스타벅스 제국을 일궈낸 하워드 슐츠도 아닌 시인 랭보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압생트가 연상되는 그의 일생에도 불구하고 '커피'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연상작용의 결과라는 걸 인정한다. 천재 시인, 혁명가, 그리고 베를렌과의 동성애 파트너라는 압도적인 이미지의 아르튀르 랭보를 떠올리면 음울한 커피의 색이 연결되서만은 아니다. 베를렌과의 결별 이후 그가 시작(詩作)에서 은퇴한 나이는 불과 20세. 시인으로의 데뷔조차 이른 시기에 그는 무수한 천재들이 그러했듯이 필모그래피를 완성해 버린다. 절필 직후 행보는 칭송의 무대였던 프랑스를 떠났다. 구름에서 세속으로 내려간 것이다. 방황하던 그는 1876년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향한다. 천재 시인에서 군대 용병으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낯선 공간에 대한 호기심은 그를 지구 반대편으로 이끌기 충분했다. 이 시기 자바섬은 네덜란드의 커피나무 재배지였다. 품질이 뛰어나지만 병충해에 약한 아라비카 품종이 이름부터 강건한 로부스타로 대체된 시기와 일치하므로, 인도네시아에서 랭보는 자바 커피의 다양한 매력을 음미하지 않았을까. 압생트의 초록은 커피의 암흑으로! 자바섬에서의 2년을 뒤로하고 랭보는 예멘과 에티오피아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하게 되는데 꽤 유능한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시인으로서의 경건함이 오염되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셈에도 재주가 있는 걸 어떡할 것인가. 이래서 신은 불공평한 것 아니냐는 불평을 듣는 것이다.   

 예멘의 아덴에서 주로 생활하던 그는 무역 거래국이었던 에티오피아의 하라르에 거처를 꾸린다. 지금은 '랭보하우스'가 수많은 그의 팬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데 자연스럽다. 그가 진정 사랑하던 곳이었으니까. 능력 있는 오퍼상이었던 랭보는 무기 거래를 비롯해 다양한 품목을 중개했지만 에티오피아 하라르 커피의 상품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 자신이 하라르 커피의 신봉자였고, 낙타 대상을 통해 수출에 주력하게 된다. 앓고 있던 종양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37세의 나이에 프랑스로 돌아와 숨을 거두게 되지만, 커피는 랭보의 생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근본 물질이었다. 시인인 그가 압생트였다면 인간으로서의 그는 커피가 아니었을까.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의 잊을 수 없는 커피의 향미는 에티오피아 하라르의 윤기 가득한 풍미로 연결되었다. 

 강릉에서의 랭보를 상상하고 싶다. 안목해변에서 낚아챌 날카로운 시상(詩想)과 더불어,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하라르 커피 이상의 맛을. 강릉이니까. 시간과 공간이 뭉쳐지면 좋겠다.

 그래서 칼디도 아니고, 바흐도 아니고, 모리온도도 아니고 하워드 슐츠도 아닌 것이다.

 뜬금없어도 랭보다.      

강릉시 구정면 테라로사 커피공장의 겨울
강릉 구도심의 테라로사 지점에서 마시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페 게뎁 첼베사


 강릉 커피의 에펠탑 같은 존재, 테라로사에서 맛볼 수 있었던 에티오피아 커피는 하라르가 아닌 예가체프 계열의 게뎁 첼베사였다. 세련된 꽃향기가 난다고 하는데 그런 것도 같다. 원두에 박혀있던 고급스러운 산미가 혀 아랫부분에서 톡 터지며 온몸으로 흡수되는 느낌이다. 내 핏속에는 아직 커피가 흐르지 않지만 음미의 평가는 나름일 테니 부담은 없다. 이미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테라로사 커피는 방송국 근처 강릉의 구도심에도 아담한 지점이 있어 식후 땡 커피 한잔의 호사는 일상이다. 스타벅스 등의 거인들 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지역 카페의 숙명이라지만, 적어도 강릉에서는 강소 카페들의 군웅할거에 대기업 프랜차이즈 카페가 슬쩍 발을 들여놓은 모양새다. 곤란할 거다, 그들의 입장에선. 타 도시에 비해 충성 고객의 비율은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커피의 메카, 강릉에서 지점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겠다. 실제 매출액의 차이는 따져봐야 알겠지만, 점심식사 후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뭉쳐 들어가는 곳은 맛이 우선인 동네 카페일 확률이 높다. 강릉이니까. 

왼쪽부터 옥수수라떼, 흑임자라떼, 더덕라떼


 커피도시라는 단순 수식을 넘어 강릉이 이제는 각종 라떼의 천국이 된 듯하다. '초옥이 커피'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갤러리밥스>의 옥수수라떼, 인지도 최강 <툇마루>의 시그니처 흑임자라떼, 그리고 자칫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카페 남문동>의 더덕라떼의 자태다. 모두 차가운 음료다. 고급 생두의 풍미를 섬세하게 이끌어낸 프리미엄, 스페셜티 커피들이 한쪽에서 참맛을 겨루고 있다면, MZ들이 깔아 둔 다른 한 편의 무대에선 라떼의 대회전이 벌어지고 있다. 강원도 찰옥수수의 달큰함이 비강을 타고 전두엽을 때리는 옥수수라떼는 호불호가 없다. 기본 대기시간 한 시간이라는 카페 툇마루의 명작 흑임자라떼는 기름진 극강의 고소함이 충격이다. 연역법이고 두괄식이다. 명치를 찌르는 풍미를 주고 나서는 급격히 씻겨나가 객관적이 되는 맛이다. 느끼함을 못 참는 사람들에게는 권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제의 그것. 강릉의 라떼는 더덕에서 방점을 찍는다. 더덕으로 라떼를 만들 수 있다면 인삼은 또 어떻고, 황기나 영지버섯은 안될 게 뭐 있을까. 왜 곤드레나물로도 라떼 만들지 그래. 불신의 조소가 들리는 듯하다. 맛을 보면 될 일이다. 빨대 없이 마셔야 한다. 갈린 더덕의 질감이 구강을 마음껏 돌아다녀야 하니까. 편견은 사라진다. 분명 더덕의 알싸함이 살아있는데 우유의 자비로움이 쏘는 맛을 포용해 중화시킨다. 혀를 툭 치는 감칠맛이 먼저고 향기가 되어버린 흙의 향기가 따라오는 형국이다. 섬세하게 찢긴 더덕의 텍스쳐는 알맞게 물큰해 어금니를 춤추게 한다. 신기하기 그지없어 카페 주인장을 귀찮게 하고 말았다. 재료는 5년 이상된 암더덕, 횡성산만을 고집한다고 한다. 더덕을 받아 바로 라떼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장시간 냉동보관으로 숨을 죽여줘야 아린 맛이 사라진다. 그래서 기분 좋은 알싸함 뿐이었구나. 라떼는 받자마자 빨리 마시는 편이 낫다고 한다. 산소에 노출되자마자 발효가 시작된다는 이유. 흡수를 서둘러야 횡성 더덕의 기운과 향미가 온전히 몸속으로 흡수된다는 것이다. 그걸 게으름 가득 느릿느릿 다 마시고 난 뒤에 물어보다니. 

 커피의 성지 강릉은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내일은 또 어떤 커피가 등장할 것인가.

왼쪽부터 카페 툇마루,갤러리밥스,카페 남문동


 매년 생일 때 카카오톡을 통해 이런저런 선물이 도착한다, 고맙고 과분하게도. 칠팔 년쯤 전부터 올해까지 받은 선물을 더듬어본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세트메뉴와 파리바게뜨 케이크 쿠폰이 주를 이뤘다가 해가 갈수록 디저트 쿠폰은 줄고 건강보조식품이 늘어난다. 그러니까 홍삼정 세트, 아르기닌제, 밀크시슬 등등.  

 아! 늙어가는 게 그들의 눈에도 뻔히 보이나 보다.   

 노년을 향해 줄달음치는 애처로운 육신을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그런데 전 아직도 찐득한 초콜릿케이크가 취향이고 후식으로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답니다. 스페셜티가 아닌 스타벅스 커머셜 커피도 고마울 따름인걸요. 그러니 내년 제 생일에도 쿠폰을 보내주실 용의가 있으시다면, 한 십 년쯤 전처럼 아직 쓸만한 녀석이라 생각하시고 그냥 커피쿠폰 보내주세요. 케이크는 더 환영합니다. 


 찻잎은 덖어야 하고 커피 생두는 볶아야 한다. 덖는다는 것은 물기가 조금 있는 약재, 곡식 따위를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히는 것이고, 볶는 것은 물기가 거의 없는 상태로 열을 가해 익힌다는 뜻이다. 찻잎은 손으로 뒤적여가며 덖는 과정을 흔히 볼 수 있고, 커피는 로스터가 생두를 휘저으며 점점 진한 캐러멜색의 원두를 볶아낸다. 찻잎 자체가 생두보다 수분이 상당 비율 함유돼 있을 테니 덖는다는 사전적 의미가 꼭 들어맞는다. 야생을 사람이 취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과정이 필요한 것인지. 찻잎은 고귀한 향기를 위해 수없이 비벼지고 데워져 숨이 죽는다. 바짝 말려진 생두는 행복의 한 모금을 위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골고루 볶아지고 심지어는 태워져야 한다. 덖음에는 덕(德)이 있고 볶음에는 복(福)이 있다. 안정을 주고 휴식을 주며,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해 줄 인내의 원천인 소중한 커피 원두들이여, 스스로를 태우는 세상 모든 아라비카여, 로부스타여, 복이 있을지어다.     



  터무니없이 독을 꿀꺽 삼켰다.

- 나에게 온 충고여 세 번 축복받으라! - 내장이 불탄다. 독액의 격렬함이 내 사지를 뒤틀고 이그러뜨리고

  나를 넘어뜨린다. 갈증이 나 죽겠어. 목이 탄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이게 지옥의 영원한 고통이다.

  보라, 이 불길이 어떻데 다시 일어나는가를! 나는 멋있게 불탄다, 가라 악마여!


                                                                                   -  랭보 <지옥의 밤(Nuit de l'enfer)> 중에서


 터무니없이 삼킨 독이 압생트라면 해독이 될 것은 커피뿐이다. 

 랭보는 결국 커피를 마셨다.


 성격이 급한 편이다. 그래서 글을 써 나가면서 후두둑 따라오는 오타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이다. 소중한 한 글자씩 꼭꼭 씹어먹는 정성이 필요한데 그게 잘 안된다. 차근차근 자판을 눌렀다면 오히려 시간을 아꼈을 텐데, 타자의 조바심만큼 입력의 시간은 늘어지기만 한다. 

 강릉을 서둘러 치면 '가을'이 된다. 의도하지 않은 오타의 상큼한 반전. 

 강릉의 가을엔 당연히 따라와야 할 그것.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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