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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Sep 16. 2020

11 이번에도 꿈이었습니다
-오라 야구장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저는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알고 만났던 사람들로 한정하자면 저보다 근시가 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흔히 말하는 '마이너스'시력을 가진 사람이 부지기수라 어느 정도 위안은 됩니다만, 한동안 제 시력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유전이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 시력이 좋지 않았으니 DNA 속에 여지없이 정보가 전달된 것이죠. 한 분이라도 괜찮았으면 기대할 법도 했는데 그럴 희망이 없었습니다. 시력으로만 따지면 저는 흙수저도 아닌 '뻘'수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저는 두 분을 사랑합니다, 믿어주시길. 다음 세상에 몽골에서 태어나면 될 일입니다.

 어린 나이부터 점차적으로 근시가 심해졌기에 '맑게'보인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리 불편한 것도 없었습니다. 잘 보인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야 잘 안 보여 불편한 것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칠판의 글씨가 안 보이면 그저 선생님께 부탁해 맨 앞자리로 이동하면 될 일이었으니, 보고 싶으면 가까이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안경이란 것을 썼습니다. 안경을 너무 어린 나이에 쓰기 시작하면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질 우려가 있다는 당시 어머니의 지론으로, 시력에 비해서는 보조기구를 꽤 늦게 장착한 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나라의 거의 1세대 렌즈착용자였습니다, 1970년대에 렌즈를 일상적으로 끼고 다닌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동시에 어머니는 렌즈'신봉자'이기도 했습니다. 렌즈는 안경과 다르게 착용 후 시력 저하의 위험이 거의 없고, 같은 도수의 안경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인다고 믿고 계셨습니다.(어머니의 의견이었을 뿐입니다) 자연히 평소에도 렌즈의 장점에 대해 수 없이 역설하셨지만 저는 착용이 권장되지 않을 정도의 어린 꼬맹이였으니 어서 자라기만 기다리셨던 거죠. 5학년이 되니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명동에 있던 안과로 데리고 가시더니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던 '소프트'렌즈를 맞춰주셨습니다. 세상의 만물이 그토록 반짝거린다는 것을, 렌즈를 끼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건물의 모든 간판을 다 읽어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는지요. 

 눈에 부담을 덜기 위해서는 일회용 렌즈가 그나마 낫다고 합니다. 음식에 비유하면 유통기한이 짧은 것이 방부제 함량도 낮기 마련일 테니까요. 하지만 먼 옛날입니다. 그때의 콘택트렌즈는 일회용은 언강생심, 최소 6개월의 유통기한을 가진 제품들 뿐이었고, 저는 1980년대 초반 첨단 광학기술의 산물인 '6개월 장기착용 렌즈'의 혜택을 누리는, 앞서가는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시력교정분야에서는 최연소 얼리어댑터였던 것이죠.  




 어릴 때 살았던 서울 당산동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는, 우리 두려울 것 없는 초딩 무리들에게 야구장이자 축구장이었습니다. 서너 명이 공놀이를 할 때는 동과 동을 마주 보며 공간의 가로를 이용했고요, 제대로 열 명 이상 놀 때는 세로 방향을 택해 홈런이나 골대의 라인을 뒤로 멀찍이 두었습니다. 그날도 야구를 했습니다. 꽤 많은 친구 녀석들이 글러브와 테니스 공, 나무배트를 들고 18동 앞으로 모였습니다. 세로 방향으로 야구장을 배치해야 마땅했습니다. 4학년이라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을 때여서 운동이 불편했지만 세상 최고로 애정하는 종목이니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앞이 잘 보였다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은 여전했지만요. 

 안경다리가 부러진 원인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수비를 할 때 주자와 부딪혔는지, 제 타력을 두려워한 투수의 빈볼로 얼굴에 직접 공을 맞아 그리 됐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심한 충격은 아니었나 봅니다. 아, 심한 충격이어서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었겠군요. 이제 겨우 경기 초반이고 다음 타석은 내가 칠 차례인데... 짜증이 났습니다. 안경이 부러져 엄마에게 혼이 날 걱정보다는 경기에서 빠져야 하나 하는 아쉬움이 몇 갑절 컸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하고 집으로 뛰어들어가 투명 테이프를 가져왔습니다. 안경 렌즈 부분과 다리를 테이프로 얼기설기 돌려 붙여 고정시키고 타석에 섰습니다. 앞이 뱅뱅 돌더군요, 어디 테이프로 땜질해 놓은 안경이 초점이 제대로 맞을리가요. 그래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낫다 생각하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친구가 던진 공을 대충 휘두릅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때 우리의 야구공이었던 테니스공은 멀리 날아가 약속한 홈런 존을 넘어 버립니다. 친구들의 환호를 들으며 벅찬 가슴으로 안경을 붙잡고 베이스를 돕니다. 3루를 돌고 나서 현타가 옵니다. 

 

 '엄마한테 죽었다......'    


1980년대 초 고교야구의 강자 선린상고(좌),  선린상고의 두 에이스였던 박노준과 김건우(우)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 고교야구는 '국민'스포츠였습니다. 봉황대기, 청룡기, 황금사자기 등 주요 대회가 있을 때마다 국민들의 시선은 동대문 야구장으로 모아졌습니다. 1982년에 출범한 프로야구의 연착륙도 당시 고교야구의 인기가 바탕이 된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프로구단의 원시적 형태였던 롯데, 경리단, 한국화장품과 같은 실업팀들의 존재도 큰 도움이 되었죠. 

 불과 고등학생이었던 그들에게 전 국민이 그토록 환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고교야구 중계를 보면 선수들이 너무도 앳되어 보입니다. 학부모들의 밀착 케어로 아이스러움이 계속 묻어나는 걸까요? 하물며 제 아들이 어느덧 그 나이가 돼 버린 것도 한몫했을 겁니다. 물론 40년 전 고교생들은 기본적인 피부관리를 하기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는 이유도 있겠지요. 그러나 외모를 떠나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평균수명이 짧았던 만큼 성숙해지는 나이도 빨라졌을 거란 생각입니다. 어느 위인전을 읽어 보아도 저 나이 때 나는 간식이나 찾고 있었는데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니, 내가 갓 사회로 나올 나이에 그들은 벌써 불멸의 작품을 완성하다니... 믿기지 않는 성숙함에 감탄해 마지않는데요, 먼 옛날은 아니라 하더라도 40년 전 고등학생 정도면 충분히 요즘의 성인급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성숙한 나이였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철든'내면이 외모에서도 드러났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저에게 최고의 고교팀은 '선린상고(現 선린 인터넷고)'였습니다. 어디 저뿐이었겠습니까. '박노준 김건우'의 황금콤비가 버티고 있던 선린상고는 전 국민이 사랑하는 팀이었죠. 강팀이었던 경북고, 부산고, 광주일고 등과 비교해 우승 횟수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최고의 스타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우승은 꼭 필요치 않았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내가 박노준이다, 나는 김건우다 하며 입술을 꼭 깨물며 홈런을 노리곤 했는데요, 야구천재들의 기가 막힌 퍼포먼스를 보며 왜 우리 학교에는 야구부가 없는지 한탄했던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뭐 야구부가 있었다고 박노준처럼 될 것도 아니었으면서 말이죠.



 이 장면입니다. 경기 다음날 신문 1면에 도배가 되었던 박노준의 홈 슬라이딩 순간. 1981년 경북고등학교와의 봉황기 결승전에서 1회 말 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다 발목이 꺾이는 모습을 사진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9시 뉴스의 첫머리에 이 소식이 다뤄질 정도였고, 병원으로 바로 후송된 박노준 선수에게 국민들로부터 위로의 편지가 쇄도했을뿐더러 병원 주위는 여고생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아이돌도 상상할 수 없는 인기의 스펙트럼을 가진 고등학생 야구선수였던 것입니다. 이 경기에서 패한 선린상고는 준우승에 그치며 긴 슬럼프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학교의 성적을 떠나 박노준과 김건우라는 이름은 많은 소년들의 워너비로 남아있었습니다. 

   


 최동원, 선동렬의 라이벌 관계야 모르는 분들이 있을까요? 두 괴물의 등장은 우리나라 야구사에 가장 값지게 기록되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부모님을 졸라 자주 사 보던 잡지는 '주간 야구'와 '월간 야구'였습니다. 야구 좋아하지 않는 녀석들은 주위에 없었지만, 이 정도면 그중에서 '준 덕후'급은 되었던 것이죠.  


 시간이 흘렀습니다. KBS강릉방송국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취업에 모든 신경이 집중돼 있다가 다행히 직장인이 되면서 다시 슬금슬금 야구가 그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항상 TV 앞에만  있었으니 '보는' 야구가 아닌 '하는' 야구가 그리워졌다는 말입니다. 이젠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일회용 렌즈도 장착했으니 시력 걱정도 없었을뿐더러 사회인 야구팀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여서, 어느 날 야구를 좋아하는 한 PD 선배를 불러놓고 거사를 도모했습니다. 


"팀 한번 만들어 봅시다!"

 

 공 하나만 있으면 되는 운동도 아니고 글러브, 배트, 각종 장비와 한 벌의 유니폼도 다 갖춰야 하는 스포츠라 걱정이 많았지만 놀랍게도 스무 명에 육박하는 직원들이 가입 신청을 했습니다.


 "거 봐요, 내가 뭐랬어. 다들 그동안 하고 싶은데 못했던 거라니까."


 그동안 조마조마했던 속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치켜뜨며 건방진 자세로 선배에게 툭 내뱉었습니다. 시내에 공설 야구장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막막했습니다만 일단 저지르자 생각하니 다 진행이 되더군요.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시내에서 사회인 야구팀을 운영하는 분을 만날 수 있었고, '강릉 KBS Good Fellows'팀을 만드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팀 이름을 말하려니 오그라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처음 방송국 옆 학교 운동장에서 캐치볼을 할 때만 해도 과연 이 팀이 유지는 될 것인가 싶었지만 다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습니다. 한 달 두 달 늘어가는 실력에 의욕은 더 높아졌고, 복잡했던 야구부 운영 역시 부원들의 성실함으로 원활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2,30대가 대부분이었으니 얼마나 일취월장했을까요, 강원지역 한 사회인 야구대회에서는 준우승도 차지하고 목동 야구장으로 원정을 떠나 SBS 야구팀도 꺾었습니다. 창단 후 불과 2년도 안된 시간에 이룬 성과들입니다. 하면 됐습니다. 


    강릉고등학교 야구장에서


 최고참이셨던 분들은 정년퇴직하셨거나 퇴직에 임박하셨고 저와 두세 살 터울이었던 나머지 선수들은 이젠 국장급 부서장이 되어 회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인 동호회팀에는 꼭 슬램덩크 마냥 홍일점 주무가 있기 마련인데요, 이제는 고전이 된 쿵쿵따를 거쳐 홈쇼핑 채널과 유튜브에서 씩씩하게 활동 중인 친동생 같은 후배 아나운서 지연이도 보이는군요. 모두들 그립습니다.

 이 사진을 보여주면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때를 추억할 것 같습니다. 회사의 동료들과 나눌 추억이 선명히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91년부터 4년마다 한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올스타들이 맞붙는 슈퍼게임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호각세를 보이는 양국의 수준이지만 1990년대 일본은 한국 프로야구를 몇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입장이었죠, 실제로 훨씬 강하기도 했습니다. 3회째를 맞는 1999년 11월, 총 4번을 치르는 슈퍼게임 중 후쿠오카 돔 -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홈구장, 이젠 야후 호크 돔이라 불리더군요 - 에서 열리는 3차전에 일정을 맞춰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우와~~ 지붕이 있는 경기장이라니요, 선수들의 타격 소리가 신기하게도 콘서트홀처럼 확성되어 울려 퍼졌습니다.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을 바라본 뒤 중계석은 어디일까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마침 3차전 중계를 KBS에서 할 예정이었고, 마침 가지고 있던 회사 신분증으로 중계석까지 무사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TV와 라디오 캐스터를 맡았던 표영준, 김현태 선배님이 선수들 자료를 보고 계시더군요. "선배님!"하고 일부러 크게 불렀습니다. 두 분의 깜짝 놀라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할 정도입니다. 평소에도 보기 힘든 녀석이 일본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아는 체했으니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더욱 기뻤던 것은 바로 그때가 총 4경기 중 우리나라 대표팀이 유일하게 이긴 날이었다는 겁니다. 생생합니다. 승리투수는 정민철, 세이브에 진필중, 그리고 경기 MVP는 해태 타이거즈의 홍현우 선수였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더그아웃 뒤에서 승리를 거둔 우리 선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신 하일성 해설위원은 캐스터들을 대동하고 일본 최고의 포장마차 명물 거리, 나카스로 향하셨습니다. 하필 승리의 날을 골라 찾았다니, 최고의 일정을 잡은 셈이었습니다. 그날, 4차... 까지 달렸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 흐릿하지만 아마 그랬을 겁니다.   


    표영준, 김현태 선배님과 후쿠오카 나카스의 포장마차 거리에서


 '야구장들'이라는 공간을 선택하니 장소가 한두 곳이 아닙니다. 각각의 구장에서 가졌던 인상과 기억은 같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야구를 관전하거나 직접 그라운드에서 뛰거나 그 두근거림은 같은 종류이기에 이토록 중구난방으로 이어 붙일 수밖에 없군요.  


 야구를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근무했던 곳은 강원도와 제주도, 프로야구 연고지가 아닌 유이(唯二)한 광역자치단체들입니다. 강원도에서는 그나마 직관이 고팠던 날이면 운전을 해서라도 야구를 보러 갈 수 있었지만 제주도에서는 순간의 끌림으로 프로야구를 관람하기가 영 수월치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자연환경을 택하니 포기해야 할 것들이 생기게 마련인데요, 가슴 아프게도 야구 관전이 그중 하나였습니다.   

 

 내가 사는 곳의 팀에 무조건 애착이 가고, 우승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던 것은 유학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턱없이 비싼 입장권 요금 때문에 동할 때마다 갈 수는 없었지만 시애틀 마리너스의 홈구장인 세이프코 필드(Safeco Field)로 향하곤 했던 저는, 딱 열 살 남짓의 야구에 미친 그 녀석과 마찬가지였습니다. 

 2009년 페넌트 레이스 마지막 날 찾은 홈 경기장은 무언가 들뜬 분위기가 공기에 섞여 있었습니다. 귀국 전 볼 수 있는 마지막 경기여서만은 아닌 듯했습니다. 그 해의 성적에 관계없이 선수들과 관중들 사이 일체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세이프코 필드에서의 2009년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홈경기, 우익수 자리에 이치로 선수가 보입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자신의 야구용품을 나눠주며 홈 관중과 하나 되는 마리너스 선수들 


 세이프코 필드도 T-모바일 파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일본 닌텐도사(社)가 경영권의 상당 부분을 소유한 시애틀 마리너스는, 그 이유 때문인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넘어온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압도적인 스즈키 이치로를 비롯해서 이와쿠마 히사시, 조지마 겐지 등이 수많은 일본 팬들을 세이프코 필드로 끌어들였습니다. 캔 그리피 주니어와 랜디 존슨, 알렉스 로드리게스 등 슈퍼스타를 배출한 마리너스는 마지막 지구 우승의 해였던 2001년 이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뚜렷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해 2009년에는 그래도 나았군요, 85승 77패의 준수한 성적을 냈지만 4개 팀이 있던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서 3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야구팬들의 성향 차이만큼이나 미국 역시 도시마다 팬들의 기질이 다르겠지만, 전반적으로 미국 야구장의 홈 팬들은 그렇게 선비일 수가 없습니다. 엉덩이가 의자에서 좀체 떨어지지 않습니다, 간식을 사러 갈 때 빼고는 말이죠. 홈 팀이 득점을 해 극적인 역전을 하는 순간에도 "유후~~~"하며 손뼉을 몇 번 칠 뿐이고, 긴박한 상황에서 어이없이 실점을 할 때 역시 "아~~" 하는 잠깐의 탄식뿐입니다. 물론 '대체로' 그렇다는 소리입니다만, 흥분이 극에 달해 내야의 그물망을 스파이더맨이 무색하게 타고 넘었던 우리 팬들의 액티브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관중석 분위기였습니다. 한 마디로 '이기면 좋고 지면 말고' 였던 것이죠. 맥주나 마시면서 선선한 저녁 날씨를 흠뻑 즐기는 것이 관전 포인트였습니다.

 포스트 시즌 진출은 물 건너갔으니 시즌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한 해의 끝인사를 건네는 선수들이 경기장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며 관중들과 악수를 나누고 선물과 사인을 전달합니다. 어느 때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선수들과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는 홈 팬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선수들 표정도 환했습니다. 시즌 성적을 떠나 무사히 한 해를 소화했다는 안도감과 이제 한동안 쉴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일까요, 세이프코 필드의 한 해 마무리는 미소와 박수 속에서 흐뭇하게 매듭지어지는 광경이었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시애틀 구단입니다만 우리나라 선수에게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팀들보다 아시아 야구에 밝았기 때문이었겠죠. 이대호 선수의 시원한 홈런 장면도 생생하고 백차승 선수의 투구도 기억납니다만 역시 추신수 선수의 시애틀 시절은 많은 팬들에게 아직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부산고 시절 야구천재였던 추신수는 시애틀에 입단해 눈물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견뎌내고 메이저로 입성합니다. 200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된 추신수는 이적 후 첫 경기였던 7월 27일, 친정팀 시애틀 마리너스전에서 홈런을 때려내지요. 이듬해 부상의 악몽이 찾아오기도 했으나 이후 인디언스에서의 꾸준한 활약은 그를 수준급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거듭나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금의환향한 자랑스러운 KBO의 선수입니다. 추신수 선수의 감회는 얼마나 남달랐을지요.)

 2009년 여름 미국 횡단 여행을 계획하면서 자연히 이곳은 필수 방문지에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신수가 뛰고 있는 인디언스의 본거지가 궁금했으니까요. 클리블랜드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인디언스의 홈구장은 '프로그레시브 필드(Progressive Field)'입니다.


  프로그레시브 필드, 클리블랜드




 추신수 선수의 인기는 상당했습니다. 타석에 그가 등장할 때마다 울려 퍼지는 기차의 기적소리에 맞춰 홈 팬들은 동시에 "CHOO~~~~~!"라는 함성을 쏟아냈는데요, 너무도 저음으로 울리는 바람에 마치 야유하는 것처럼 들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경기장 곳곳엔 추신수의 반소매 유니폼을 입은 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왜 그리 기분이 들뜨던지요.

 TV 중계로는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타석에 있을 때나 아니면 수비 위치에 공이 날아왔을 때만 볼 수 있기 마련입니다. 그와 상관없이 경기 내내 그를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직관의 매력이 아닐까요. 당연히 추신수의 포지션인 우익수 쪽 뒷자리를 한참 전에 예매해 두었습니다. 당혹스럽게도 막상 자리를 잡고 보니 너무 멀어 보이더군요. 펜스가 높아서 그런 건지, 더 크게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그랬던 건지, 디지털카메라의 줌을 당길 때로 당겨봐도 이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더 크게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신수 파이팅!!!!"


  

 추신수 선수를 따라 한 건 아니지만 제 등번호도 17번입니다. 20년 이상 달고 있는 번호라 애착이 더하는데 이런 우연이 있다니요. 

 네, 알고 있습니다. 번호가 같으면 뭐하겠습니까, 하하하... 그저 공통점이 있다는 게 미소가 지어질 따름인 거죠. 괜히 기분 좋지 않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선수와 내 등번호가 같다면, 그건 엄청난 인연일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면 될 입니다. 그렇다고 느끼면 되는 거죠. 참 기분 좋은 클리블랜드의 밤이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복직 후 얼마 안 있어 동기와 후배가 갑자기 보자고 합니다. 

 이런, 야구부를 만들어 보자는 얘기를 합니다. 강릉에서 팀 만들어 봤으니 노하우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 같이 시작해 보자고 했습니다. 안 될 것 같았지만 결국 되었던 전례가 있으니 거칠 게 없었습니다. 다만 훨씬 섬세해야 했습니다. 이전과 달리 정식으로 전국 사회인팀의 전산망에 등록해야 하고 모든 인적사항까지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해야 했으니까요. 선수단 전원을 스포츠 공제보험에 가입시켜야 했고 각종 회의에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리그에 뛸 수 없었습니다. 평균 2주일에 한번 치르는 경기였지만 엄격한 룰이 적용되는 데다 과분하게도 오라야구장이라는 정식 야구장에서 경기를 치르다 보니, 실력과 무관하게도 모두가 마치 프로선수가 된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리그 참가 첫 해 꼴찌를 면치 못한 '제주 KBS노라보카'팀은, 2년 후 순수한 아마추어로만 이뤄진 4부 리그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비상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승격된 3부 리그에서도 종합우승의 쾌거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항상 성장하는 팀의 일원이 되어서 감개무량했습니다. 점점 분위기가 좋아지고 상승곡선을 그리는 팀에 속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팀을 창단해 버리면 됩니다.  


 

  

 전력에 별 도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추신수가 된 듯 자랑해 봅니다. 이제는 뛰어난 실력의 후배들이 많아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만 마음으로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멋진 추억을 남겨준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번창하고 또 번창하라, 멋진 사내들이 있는 팀 노라보카여!




 1982년, OB, 삼성, 해태, MBC, 롯데, 삼미....  6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야구가 개막했습니다. 잇단 프로 스포츠의 개막을 놓고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소리가 들립니다만 나중에 어른이 돼서 돌아보면 될 일입니다. 프로야구 출범 기념으로 옆 학교 아이들과 한 판 붙기로 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선발투수로 낙점된 터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몸을 풀어봅니다. '이렇게 던지면 되겠지?' 하고 투구 동작을 하는 순간,  "악!".... 목에 번개를 맞은 느낌이 들더니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됩니다. 그 좋아하는 야구를 할 생각에 무리해서 있는 힘껏 공 던지는 시늉을 하다가 목 근육이 순간 뭉쳐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젠 그럴 수도 없는 아빠의 등에 업혀 가까운 외과로 갑니다.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통곡해 버립니다. 지나친 기대와 흥분은 중요한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집 주변 공터나 학교 운동장의 한켠에서 나뭇가지로 파울라인을 대충 그려 넣고 경기를 할 줄 알았습니다. 그때의 꼬마 야구광들은 이제 배가 나오고 머릿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아저씨가 되었지만, 어릴 적엔 상상할 수 없었던 정식 야구장에서, 자격이 있는 심판을 두고, 전광판에 올라와 있는 본인들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죽기 살기로 치고 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야구를 즐길 뿐이라 해도 서툰 동작과 실수에 배꼽을 잡을 일은 끊이지 않는군요.


 평범한 인생은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꼭 해야 하는 것을 미루면서 그럼에도 별 느낌 없었던 시기와 그렇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는 시기 말입니다. 물론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두부 자르듯 둘로 나눌 수는 없는 것이겠습니다. 삶의 어떤 부분은 후회 없이 실천하며 살아왔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떤 것은 평생 미루다가 삶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눈물로 후회를 쏟아내기도 하겠지요. 사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요?

 변명이 많습니다. 이젠 아무리 용을 써도 예전처럼 다리가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분명 공을 보는 순간 번개처럼 휘두른 것 같은데 공이 지나가고 한참 뒤에야 배트가 돌아가곤 한다고 말이죠. 그러면 어떻습니까. 삼진을 먹어도 상관없습니다. 연신 미소가 지어지거든요, 야구만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앞 동 유리창을 수없이 깨 먹고 혼이 나도 여전히 다음날 똑같은 자리에서 공을 던졌고, 못다 한 야구가 지독히도 그리워서 직장 동료들과 주말마다 캐치볼을 하고 타격 연습을 했습니다. 이곳저곳 멍들고 긁히는 일도 많았지만 개의치 않고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습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다쳤다면 분명히 심한 엄살을 부렸을 터입니다.

단언컨대 야구로 말하자면, 하고 싶은 것을 못해 후회하는 두 번째 시기는 저에게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미루어 본 적 없이 사랑했고, 뛰어들었고, 퍼뜨렸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아쉬움으로 남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힘도 어느 정도 이상이고 운동신경도 괜찮다는 사람들은 담장을 넘겨 본 경험이 제법 있을 텐데요, 그걸 해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진정 담장을 '넘기는' 제대로 된 홈런입니다. 때린 공이 외야 한 구석 숲 속으로 굴러가 빠른 발로 홈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이른바 '런닝 홈런'이 아닙니다. 야구에 대해 후회는 없지만 홈런에 대한 갈증은 해소할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전 경기에서 팔꿈치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했는데도 일주일 후 열린 2차전에 꾸역꾸역 출전합니다. 집에서는 엄살이요, 경기장에서는 투혼인 것이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투수의 공이 워낙 빨라 또 삼진을 먹겠지 하며 살짝 위축된 내 모습이 보입니다. 눈 한번 질끈 감고, '될 대로 돼라' 주문을 겁니다. 투수의 손에서 공이 빠져나오는 순간에 타이밍을 잡습니다. 세 박자까지 가지 않고 '하나, 둘..' 센 뒤 힘차게 배트를 돌립니다. 손바닥에 느낌이 제대로 왔습니다. 풀 스윙 후 바라봅니다.


 '어....?' 

 공이 까마득히 외야석 쪽으로 날아갑니다.

 이럴 수가...   담장을 넘겼습니다. 팀 동료들의 환호가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홈런입니다! 드디어 해냈습니다!


 순간 귀가 먹먹해지며 시야가 점점 좁아집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얼굴이 간지럽습니다.


 강아지가 핥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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