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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n 30. 2020

10 녹차전쟁-보성 VS 제주

모든 곳의 어떤 것들








 우리나라 각 지역을 떠올리면 대표적인 연관 명사들이 튀어나옵니다. 순창은 고추장이고 횡성은 한우지요, 울릉도는 호박엿이라고 해야 할지 오징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둘 이상의 특산물이 떠오른다면 그곳은 참으로 축복받은 곳이겠군요. 꼭 먹을거리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수원 하면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의 갈비 통닭도 있겠지만 '화성(華城)'이라는 자랑스러운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떠오르고요, 여수 하면 언제부턴가 '밤바다'가 최강의 연관검색어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지역명이 아닌 '녹차'라고 먼저 운을 띄우면 어떤 장소가 떠오르시는지요? 아마 가장 많은 표를 얻는 곳은 전남 '보성'이나 경남 '하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성 하면 녹차고 녹차 하면 보성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그러나 제주에 사는 분들에게 녹차는 어디냐고 묻는다면, 굳이 보성까지 떠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탐라의 산물로도 거듭나고 있는 중입니다. 실제로 녹차밭 자체가 관광지가 된 곳도 꽤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두 라이벌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습니다. 보성, 그리고 제주의 녹차밭들입니다. 먼저 녹차 생산의 국가대표, 보성으로 가 보실까요.


   보성 대한다원의 녹차밭 풍경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찍은)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급경사의 초록색 장관, 그 압도적인 배경이 녹차밭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림에서나 사진에서나 급한 각을 이루는 경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 마련인데요, 그 경사를 이루는 것이 초록의 차나무 군락이라 평화로움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 같습니다. 

 보성의 계단식 녹차밭은 무려 국가 중요 농업유산으로 지정된 특별한 곳입니다. 일부 차밭이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다는 이유로 지정이 미루어져 오다가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의 사원을 중심으로 밭이 조성됐다는 역사기록 등을 주민들과 관련 학자들이 입증한 덕에 우리나라의 대표적 차 산지로 우뚝 서게 되었는데요, 전국 녹차 재배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곳이 보성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확실한 선두를 지키고 있는 곳임에 틀림없겠습니다.



 '다른 것들도 많지만 녹차밭도 명물이다'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는 오직 녹차밭이다' 하는 자신감에 가깝습니다. 보성과 그 주변으로는 녹차 외 수많은 특산물과 알려진 관광지도 많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당당함이 보성의 녹차밭에서는 노골적으로 스며듭니다. 그 당당함이 근원이 인공 구조물이 아닌 장쾌한 초록의 물결이기 때문인지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다원의 최상부까지 올라가면 남해의 잔잔한 수면까지 조망할 수 있는데요, 녹차밭의 초록과 바다의 푸른빛이 단층을 이루는 전망에서 이 본고장의 녹차를 입 안에 머금게 된다면 실로 환상적인 조화를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나무에 얽힌 유명한 설화가 있지요. 선종의 창시자로서 탱화의 스타이자 살아오며 알게 된 친구나 선생님 중 꼭 한 명 이상은 닮은 사람이 있다는 바로 그 무적의 '달마대사'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달마대사가 벽을 바라보며 수양을 하는 면벽 정진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잠이 쏟아졌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고차원의 단계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수년 동안 희멀건한 벽만 바라보는데 잠이 안 올 턱이 있겠습니까. 꾸벅꾸벅 조는 달마의 모습을 상상하니 어찌 그리 인간적으로 느껴지는지요. 졸음이 이어지면 눈꺼풀은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법, 너무나도 무거운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하자 달마대사는 스스로 눈꺼풀을 잘라 속절없이 마당에 내버리는 대승의 면모를 자랑합니다. 달마대사 그림의 핵심인 부리부리한 눈매는 그래서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달마가 던져버린 이 눈꺼풀은 땅 속에서 싹을 틔워 차나무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눈꺼풀이 차나무가 된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달마대사는 나무의 잎을 따서 차로 달여마시며 잠을 쫓았다고 하니 설화의 마무리 부분까지 기가 막힐 뿐입니다. 녹차에 들어있는 카페인 성분이 잠을 쫓는 각성제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적절하고도 해학이 넘치며, 과학적으로도 환영받을 달마대사 설화임에 틀림없겠습니다.  




 녹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크게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먼저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 - 인도 출신이지요, 김수로왕은 다문화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 이 인도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왔다는 설이 있고요, 두 번째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던 김대렴이 귀국길에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곳곳에 심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무언가 도입과정이 더 구체적인 흥덕왕 시절의 기원설이 그럴듯한 것도 같지만, 만약 가야국 기원설이 맞다면 400만 명에 달하는 김해 김 씨의 시조이신 수로왕은 대략 42년 생이시니(A.D.42) 우리나라 차나무와 차의 역사는 2000년에 육박하는 셈이 돼, 한민족에 있어서 녹차란 유사 이래 최고(最古)의 국민음료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단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차의 음용이 다도(茶道)라는 형식을 띠며 역수출돼, 걸맞은 예절과 구비된 다기가 차 마시기의 조건으로 첨가되면서 대중화의 길에서 비껴간 듯한 과정을 거친 것도 사실입니다. 품격을 위해 인기를 맞바꾼 셈이었는지요. 그러나 녹차의 맛과 효능을 아는 대중이 그대로 있을 리 없었습니다. 정통 다도는 그것대로 유지되면서 사무실 한쪽의 탕비실에서는 언제든 간편하게 마실 수 있으니, 녹차는 이제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초록빛 물의 위상을 획득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수확 체감의 법칙'. 언제 배운 용어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슴푸레 뜻은 알 것 같지만 말로 정확히 설명하려니 머뭇거리게 되는 개념들이 점점 늘어나는 요즘이라 결국 검색을 통해 정리를 해 봅니다. '수확 체감의 법칙 - 토지, 자본, 노동 등의 생산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의 생산요소만 증가시키고 다른 생산요소를 일정하게 유지하면 생산량의 증가분이 차츰 감소하는 법칙'이라고 되어 있군요. 쉽게 말해서 옷감을 아무리 많이 공급해도 옷을 만들 사람이 더 늘어나지 않으면 만들어지는 옷은 어느 순간 이후 더 늘어나지 않는다는 뜻이겠습니다. 인력이나 기술의 투자 없이 던져주는 옷감만으로 무한정 옷을 생산하리라는 기대는 놀부 심보나 다름없다는 것이죠. 굳이 단순화시켜 이해할 필요도 없이 쉬운 개념입니다만 수확 체감의 가장 적확한 예를 우리 주변에서 찾는다면 바로 녹차 티백(Tea Bag)이 아닐까 합니다. 티백을 담가놓고 처음으로 마시는 녹차는 쓴 맛까지 느껴질 정도지만 두 번째로 우려냈을 때는 적당한 산미가 느껴질 가능성이 크고, 세 번째부터는 점점 녹차맛보다는 물맛에 가까워지는 게 당연합니다. 녹차 본연의 풍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물만 계속 집어넣을 것이 아니라 티백을 추가해야 할 일입니다. 매일 아침 수만 개가 소비되는 조그만 티백 속에도 경제이론의 원초적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같이 일하는 작가가 사무실 선배를 보며 요즘 피부가 좋아지신 것 같다고 하니 선배님이 한마디 하십니다.


 "사실 요즘 그런 소리 좀 듣긴 하는데, 혹시 아침마다 마시는 차 때문이 아닐까?"  


 설마 하며 녹차의 효능을 찾아보니 '항암작용, 심혈관질환과 당뇨병 예방, 피부건강에 우수함'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더군요. 매일 드신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진 않았지만 차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피부과에서 주입하는 신비의 주사들 만큼의 효과는 아닐테니, 직접적인 녹차의 효능이라기보다는 플라세보 효과가 더 큰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저는 선배님의 피부가 눈에 띄게 좋아지셨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후배인 작가는 만경창파와 같은 회사생활을 썩 잘할 것 같아 안심이긴 합니다.  

 플라세보 효과에 대한 임상실험은 여러 곳에서 이루어져 밝혀진 결과도 믿을 만하다고 하는데요, 잘 아시듯 치료나 진통 성분이 포함되지 않은 캡슐이라도 자신의 증상에 알맞게 처방된 약이라고 믿고 섭취하면 효과가 나타난다고 느끼는 사례들이 많아, 많은 사람들은 플라세보 효과를 오롯이 심리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실험에 효과를 보인 환자들에게 꾀병의 누명을 씌우기도 하는데요, 플라세보 약을 투여받은 환자의 뇌영상을 분석한 결과 실제로 모르핀 성분의 화학물질이 갑자기 분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별로 아프지도 않았는데 약이라고 받아먹으니 심리적으로 나아진 것처럼 착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뇌 속 모르핀 성분이라는 진짜 '약'이 나와 통증이 감소하고 증상이 완화되었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플라세보 효과는 뇌 속의 약 성분을 분비시켜 스스로 몸을 치료하게 만드는 훌륭한 처방인 것입니다. 선배의 피부는 녹차라는 약으로 인해 실제 효능으로도, 어느 정도의 플라세보 효과로 인해서도 좋아지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몇 개월 더 드시면 백옥 미남이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남은 회사생활 더 잘할 작정입니다.


 

  한라산의 품 안에 있는 서귀포 서귀다원, 차밭에 제주 특유의 무덤도 보입니다


 제주의 녹차밭으로 갑니다. 제주 서쪽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규모의 녹차밭도 있지만 좀 더 제주의 자연과 어우러지는 곳이겠다 싶어 5.16 도로를 넘어 서귀다원을 찾았습니다. 보성의 극적인 광경에 비하면 그저 밋밋할 수도 있는 모습을 북쪽의 한라산과 남쪽의 바다가 포근하게 끌어안아 퍽이나 이국적이고도 평화로운 풍경으로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여유롭게만 생각하고 경사로를 올라갔던 보성의 녹차밭에서 뜻밖의 체력단련을 했다면 서귀포의 다원에서는 야트막한 뒷동산을 한가롭게 산책했다고나 할까요. 급경사가 거의 없는 제주의 중산간이 녹차밭 지형에도 그대로 적용되니, 다리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는 상태에서 주위를 찬찬히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방대한 규모라는 것을 알고 보성의 대한다원을 찾았고 그다지 넓은 차밭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서귀다원을 갔던 것이지만 계단식 차밭으로 유명한 곳이 보성이고 완만한 경사지에 조성된 것이 제주의 차밭이니 두 녹차밭 라이벌의 개성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풍경을 찾아본다면 보성의 차밭에서는 가족이나 동호회 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이 보였고, 제주의 다원은 간혹 보이는 연인들이 주 고객이었다는 점일까요.


 커피에 더 익숙해 차에 대한 지식은 그리 많지 않은 분들도 차의 종류가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실 듯합니다. 절기상 곡우 닷새 전부터 잎을 따 만드는 '우전'을 시작으로 세작과 중작, 대작으로 분류한다고 하지요. 가격은 처음 잎을 따 만드는 차가 가장 비싸다고 합니다. 또한 발효 정도에 따라 불발효차인 녹차에서 발효율이 높아질수록 우롱차, 홍차, 보이차가 된다고 하는데요, 홍차는 발효율이 85퍼센트 이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다양한 기호식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특히 대량 생산되는 품목일지라도 품질과 맛이 상당히 뛰어나 까탈스럽고 예민한 현대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곤 합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기호식품 하나로 인해 역사의 큰 줄기가 바뀌었던 사례들이 있는데요, 정도의 차이일 뿐인 그 중독성을 생각하면 기호식품의 역사는 더 이상 '기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 두 차례 일어난 아편전쟁으로 중국은 서구 열강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강이자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중국의 국민들이 영국 등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을 때의 충격은 오죽했을까요. 지구의 반대편에 얼마나 힘이 센 국가들이 존재하는지 모를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중국인들의 게으름을 탓할 수도 있지만, 그 많았던 유사 이래 전쟁 중 서구 열강의 무자비함을 마음껏 비난해도 마땅한 하나가 바로 아편전쟁입니다.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나라 영국은 세계 최강의 식민지 부자국가로 동인도회사를 통해 동방의 상품들을 수입하며 은(銀)을 그 대가로 지불했습니다. 영국인들이 열광했던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 바로 차였는데요, 차문화에 섞이지 못하면 사교계에서 따돌림을 당할 정도로 먼 중국에서 온 차는 영국의 국민 기호식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아편전쟁 직전까지는 동인도회사의 수입품 중 90퍼센트를 차지한 것이 차였다고 하니 어마어마했던 차 열풍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무차별적인 차 수입의 반대급부로 영국은 그 시절 화폐 역할을 했던 은이 바닥나버려 경제의 유통에 심각한 위기를 겪었고, 이에 아편을 중국에 수출해 그들에게 넘겨줬던 은을 다시 회수하게 됩니다. 착한 기호식품을 받아들여 생긴 경제위기를 강력한 중독성의 마약으로 메운 것이죠. 아편을 맞닥뜨린 건 자국민이 아니니 중독이 되건 부작용으로 죽어나가건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겁니다. 고상한 잔에 담긴 붉은빛의 홍차를 음미하기 위해서, 마약 굴에서 비참한 죽음의 사신과 마주하게 될 아시아의 희생양을 죄의식 없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폐해가 심각해지자 당연히 이에 반발해 아편 사라고 하지 말라는 청나라와, 아니다. 너희는 아편 계속 수입해라 하는 대영제국 간의 전쟁에서 중국은 굴욕적인 패배를 하고 맙니다. 변명과 이유 없는 전쟁은 없다고 하지만 아편이 빌미가 된 전쟁이라뇨. '大'영제국이란 그들의 수식어가 뻔뻔해 보일 수밖에 없는 역사의 단면입니다. 1차 아편전쟁 후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광저우를 비롯한 5개 항구가 강제로 개항되며, 2차 전쟁 후에는 베이징 조약을 통해서 중국은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러시아에 상당한 이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그렇듯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홍콩의 많은 호텔에선 영국의 차문화인 '애프터눈 티세트'가 브런치 메뉴로 경쟁하듯 선보이고 있습니다. 순수한 홍차, 혹은 우유를 넣은 홍차에 곁들여지는 3층 이상의 트레이 위 다과들은 홍콩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음식이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아편으로 인한 극심한 폐해와 이어진 전쟁의 패배로 결국 할양의 비극까지 겪게 된 단초가 다름 아닌 차였음에도, 영국으로 건너가 생활문화로 자리 잡은 애프터눈 티가 아픔의 공간이었던 홍콩의 한 복판에서 무덤덤한 듯 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차를 마시고 다과를 즐기면서 홍콩인들은 어떤 감정을 쌓아 왔을까요. 자유무역항이 되어 공정한 무역으로 부를 끌어모으게 된 그간의 영광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습니다. 형식상 중국이 되었지만 본토와 첨예한 대립을 겪고 있는 지금의 홍콩에 대해 각국은 그야말로 복잡 미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홍콩의 미래가 어디로 나아갈지에 따라 이해득실이 달라지기 때문이겠지요. 작은 항구도시만의 문제로 치부해버릴 일은 아니겠습니다. 홍콩의 행정장관이나 중국의 정책 결정권자들도 깊은숨을 들이쉬고 차 한잔 하면서 더 먼 앞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타협책을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보성과 제주의 녹차밭에서 홍콩과 영국까지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비약이 정도를 넘어섰는데요, 꽁꽁 막혀버린 코로나 19 시국에 글에서라도 종횡무진 세계를 누비고 싶었던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라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디에서건 무슨 상관일까요.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 마시는 소중한 녹차 한잔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공간을 여유 넘치는 쉼의 장소로 만들어 줄텐데 말이죠. 최고의 플라세보 효과를 가져다 줄 녹차의 본고장은 그 의미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진부하고 뻔한 결론이겠지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겠군요.

 

 보성 VS 제주, 무승부를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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