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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May 15. 2021

압니다, 곧 그리워질 것을

모든 곳의 어떤 것들 - 外傳







 지나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매일같이. 

 순간적인 충동으로 내려왔고 이기적으로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연인과의 관계였다면 갑자기 뒤를 따라와서는 한눈에 반했다며 사귀자고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옛 애인을 찾아가겠다고 황당한 통보를 한 뒤 일방적으로 뒤돌아서는 격인데 이렇듯 진심으로 가득한 배웅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건지 불편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방송대상이라도 수상하지 않는 한 평생 받을 꽃다발의 운도 며칠 동안 다 써버린 느낌이었습니다.  

 

 퇴직 후엔 다시 제주에 와 살겠다고 했고 실제로도 그럴 생각입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익숙했던 사람들과 공간들로부터 점점 희미해져야 할 것을, 베푼 것보다 받은 게 많은 모든 것들에게 고맙지만 여기까지라고 선언하며 냉정히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요. 

 그나마 이 아름다운 섬을 떠나기 전 극히 일부분일지라도 제주를 글에 담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여행이 끝나고 쓰는 기행문이 아닌 뿌리를 박고 살아가면서 풀어놓은 현실의 이야기들이라 애착은 더 짙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헷갈립니다, 용기가 있는 것인지 무모한 건지. 마음이 가는 대로 삶의 무대를 바꿔가며 사는 게 부럽다는 사람들도 꽤 있으니 나만의 결단력을 스스로 칭찬해도 되는 건가 하며 불안함을 이겨내기도 하고, 남은 가족들과 벗들에게 일말의 미안함도 없는 듯 박차고 일어서는 싹수없음에 자책에 자책을 거듭하기도 하면서 조울(躁鬱)의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중입니다.



 완도로 가는 배에 차를 싣습니다. 아침 6시, 해가 길어졌습니다. 차 안은 이삿짐으로 가득합니다. 혼자만 가는 건데 무슨 살림이 그리 많을까 했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들만 챙겨봐도 타이어가 걱정될 정도로 차를 묵직하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수없이 육지를 오가며 비행기를 버스 타듯 했었어도 배는 처음입니다. 결국 제주를 떠나면서야 바닷길을 통해 이동하게 되는군요.  

 남은 가족들과 집안 사정 때문에 당분간 자주 와야만 하는 제주도인데도 마치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친구로 남기로 하고 사랑의 유효기간을 끝내고자 하는 연인과의 이별이 바로 이런 느낌인지요. 침을 꿀꺽 삼키고 뒤돌아 바라본 제주는 그러니 낯설어 보입니다. 제주의 풍경을 낯설어하는 나 자신이 낯설어 깜짝 놀랍니다. 배를 타고 막 들어오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같이 행복한 떨림이 그들의 표정에서 감지됩니다.

 '아주 오래전, 나 역시 읽히기 쉬운 표정을 하고 이곳으로 날아왔겠지..'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그랬습니다.    


  제주항 터미널 앞에서 돌아본 제주


 어마어마한 덩치의 배는 닻을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눈치를 챌 수 없게 만듭니다. 한량없이 속이 넓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안정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완도로 가는 대형 선박의 이치로도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언제쯤이나 그런 마음의 덩치를 지닐 수 있을까요? 그곳이 노력한다고 되기는 하는 경지인 것인지 의심만 깊어질 뿐입니다.

 출항 후, 답답한 항공편에서는 할 수 없었던 호사를 누립니다. 배의 고물 쪽 갑판으로 향합니다. 이제는 정말 연인과 작별을 할 순간입니다. 하늘에서보다도 극적인 별리의 과정입니다. 깊어지는 바다만큼이나 한라산의 형체는 흐려지고 멀어집니다. 분명 장관이긴 한데 순수하게 감탄을 하며 똑바로 쳐다보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느 글에서 그렇게 써 내려간 기억이 있습니다. 온갖 힘든 일들의 근원이 쓸데없이 예민한 감성 때문이라 해도 수시로 삐죽 튀어나오는 감성의 가시들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가는 걸 선택하겠다고 말이죠.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속의 가사가 그런 느낌일까요. 


  나의 자라나는 마음을 못 본채 꺾어 버릴 순 없네


 미련 남길 바엔 그리워 아픈 게 나아


 서둘러 안겨본 그 품은 따스할 테니 


 그렇게 강한 척 해도 변곡의 순간엔 하릴없이 약해짐을 반복합니다. 아니,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조차 해 본 적 없습니다. 날카로운 감성은 무엇과도 마찰을 일으켜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워 아픈 게 나아'라는 다짐은 생각보다 굳은 각오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아픔을 오롯이 몸 전체로 흘려보내는 도체(導體)로서의 존재들만으로 세상이 가득하다면 그 또한 두려워할 만합니다. 모든 것에 한계치의 공감과 격정이 뒤따라오고 끝없는 고통과 심연의 반복은 일상이 될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될 때는, 영혼을 끌어내는데 익숙지 않고 차라리 세속에 찌든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온갖 연약한 감성들에 영향을 받고 나이 듦으로 인한 상실의 감정에 정신을 못 차리고 휘둘릴 때는 어느 정도의 무심함만이 정답인 것입니다. 


 "세상 뭘 그리 깊이 고민하고 사나, 태어난 김에 사는 거라 생각하면 편한 거 아냐?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에만 신경 쓰자고. 어차피 잠깐 살다 가는 거야."


 어찌 보면 영혼의 고뇌로 가득한 척하는 존재보다 한 단계 위에 서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닐까요. 일정 수준의 담담함과 무심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평범한 내공으로는 불가능한 경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별과 상실의 순간 동반될 아픔의 세기는 주위의 이런 고수들 덕분에 완화되고 치유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성향이지만 그들의 냉정한 무심함이 이 순간엔 너무도 부럽기만 합니다.   



 2시간 30분, 배라서 더 짧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완도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낯선 곳에 발을 내디디니 호기심이 발동하는군요. 여유가 있는 여행이었다면 장보고와 윤선도의 흔적을 찾아서, 다리로 이어진 땅끝마을의 속살을 느끼며 바삐 돌아다녔을 모습이 그려집니다. 경험하지 못한 의미의 공간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요. 부족한 글일지라도 언젠가 이 멋진 곳들을 담아낼 날이 있을 거라 담담하게 그려봅니다.


 완도에서 강릉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도 6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국도를 타고 올라가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후에는 시간과 공간감각이 무디어질 정도로 멍한 상태가 되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습니다. 휴게소에 들른 뒤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바꿔 제천에서부터는 국도를 이용해 강원도로 향합니다. 때문에 도착은 더 늦어지겠지만 이 편이 훨씬 낫습니다.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연결되는 국도의 기분 좋은 곡선은 지금까지의 단조로움을 상쇄하며 운전자의 여유를 되찾게 합니다.



 바람의 기세가 등등한 날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신이 사납습니다. 머리카락도 날리고 모래와 먼지가 소용돌이치면서  몸속으로 꽂혀 박힙니다. 심지어 운전 중 순간적 돌풍으로 차가 위험스럽게 한쪽으로 쏠리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싫습니다. 정리가 되기 힘들고 차분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람은 이곳들의 특징이자 자랑이기까지 합니다. 제주도와 강원도, 태풍급으로 몰아치는 강풍으로 악명이 높지만 그 악동 같은 바람으로 거대한 풍력발전기를 돌려 유용한 전기를 생산합니다. 제주의 바다 위와 대관령의 초원 위에는 흰색의 로봇들이 긴 팔을 휘두르며 굳건히 서 있습니다.

 이것도 운명입니다. 어차피 선택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삶의 무대로 삼았던 공간들이 바람의 신이 머무는 장소였다면, 신의 노여움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자연의 바람, 이방인으로서 맞는 역풍, 공히 감당해야 할 몫일 뿐입니다. 




 그 유명하다는 안목 커피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노트북에 와이파이를 잡습니다. 달랑 자판기만 있었던 시절에 이곳을 떠났는데, 상전벽해란 이런 것이었군요.


 본문에서도 전했습니다만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 조금이라도 사람을 위해 기여할 영혼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려 굳이 애쓰며 글을 써내려가지 않아도, 누군가에겐 그 문장이 답이 되고 기회가 되며 다시 살아갈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랑 가득한 심지로 뽑아낸 글에는 얼마나 커다란 힘이 담겨 있을까요. 다시 생활의 공간이 된 강릉에서도 못난 글씨들을 하나씩 하나씩 눌러써야겠습니다.

 

 당분간 혼자 살아가야 하는 처지라 소소할 것이라 여겼던 이사도, 하나씩 짐을 풀어놓고 보니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실감합니다. 예상은 했어도 허술한 곳이 여기저기에서 드러납니다. 필요한 살림들이 너무도 많아 마트를 돌아다니며 카트를 채우고 돌아와야만 합니다. 20년 전이라 추억의 공간이 되었던 강릉의 회사는 이제 새로운 업무에 적응을 해야 할 '생존'의 공간으로 의미가 바뀌는 중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정신이 어지럽고 사납습니다. 신입사원 시절로 돌아간 듯 어리바리함이 극에 달할 때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문자가 왔음을 진동으로 알립니다. 연이어 도착한 메시지들을 확인합니다. 

 

"출판과 관련해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편집주간과 상의한 결과 책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긴장이 풀렸습니다. 좌절을 서슴없이 씹어 삼킨 후 단단한 내공을 키워보려 했던 투고의 과정이어서 지레 접어버렸던 기대였습니다. 운이 좋은 녀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토록 동경하던 삶의 공간들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행운에 더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살을 붙였던 문장들이 가당치 않은 대접을 받았으니까요.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강원도로.


 알았습니다, 그리워질 것을. 

 그리고 벌써 그립습니다, 제주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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