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에는 지리산의 수려한 경관에 대한 묘사는 물론, 당시 터 잡고 있던 사찰과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승들의 모습을 남기고 있어 옛길, 지명 등과 더불어 불교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본고는 대체로 그러한 내용을 소재로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유람록 읽기의 대상을 지리산이라는 공간에서 눈길을 돌려 유람을 다녀간 사람에게 맞추다보면, 시대별 우리 역사의 큰 획을 그었던 사건들과 이와 연계되는 저자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특히 1618년 4월 현곡 조위한(1567~1649)이 남원을 출발하여 하동 쌍계사와 인근의 여러 곳을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산록』에는 굴절된 우리 역사의 흐름과, 이에 맞물리는 저자의 파란만장한 삶이 읽혀진다.
한양 태생인 현곡은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병든 모친을 모시고 피난 다니다가, 모친의 친정이 있는 남원으로 이주하며 지리산과 인연을 맺게 된다. 전란이 끝난 후 그는 다시 한양으로 상경하여 1601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미관말직이지만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1609년 증광시에 급제하며 본격적인 벼슬길에 오른다. 당시 현곡은 뛰어난 문장가로 인정받으며 허균, 권필, 이안눌, 양경우 등 당대의 이름난 문사들과 교류를 하였다. 이들 중 특히 남원 출신 제호 양경우(1568~1630?)와는 서로 주고받은 시문의 내용으로 보아 깊은 신뢰감을 가졌던 벗으로 보인다.
현곡은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좌천을 몇 차례 당하는 등 순탄치 않은 벼슬생활을 이어가다가, 1613년(광해5)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음)를 당하고 만다. 이후 인목대비 폐출 논의가 시작되자 벼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 1618년 2월 가솔을 이끌고 삶의 터전을 다시 남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현곡은 남원의 주포면 성촌(省村)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양경우의 ‘서만(西灣) 조지세를 그리며’(지세는 조위한의 자)라는 시의 제목으로 보아, 성촌은 지금의 주생면행정복지센터가 있는 ‘서만마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곡은 남원으로 거처를 옮긴 지 불과 두 달 만에 지리산 유람을 나섰다. 마침 삼도토포사로 남원에 들른 그의 동생 조찬환과 함께 유람을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현곡은 지리산을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마음에 담고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심정은 그가 한양을 떠나며 지은 ‘차귀거래사’의 “고향으로 돌아가세,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돌아가도 되지 않겠는가. (중략) 고운(최치원)의 높은 기개 우러러보고, 깊고 그윽한 두류산을 바라보며”라는 내용에서 드러난다. 세상과 등지며 남원으로 돌아오는 된 데에는 지리산이 그의 마음 한 곳에 뚜렷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현곡은 5년 후인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다시 조정으로 불려 들어가 벼슬생활을 이어가는데, 남원에 머물던 1621년에 군담소설, 피란소설로 잘 알려진 『최척전』을 집필하였다. 이 글 내용 중 남원에 살던 최척의 가족이 정유재란을 맞아 지리산 연곡사로 피신하였다가 뿔뿔이 헤어지게 되고, 주인공 최척이 섬진강을 배회하며 가족을 찾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지역에 대한 지리적 개념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진정(院津亭) 현판. 전북 남원시 금지면 귀석리 원마을의 모정 현판이다. 이 이름에서 예전 이곳에 원(院)과 나루(津)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마을은 2020년 8월 섬진강댐 수문 개방으로 인해 제방이 무너지며 큰 수해를 입었던 곳이다. 아직도 수해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고, 제방과 길의 복구공사가 진행 중이다.]
[섬진강 본류와 요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인근 곡성 동산리에 있는 동산정. 1618년 조위한 일행이 남원에서 섬진강을 건넜을 때는 이 즈음에 수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곡은 4월 11일 그의 동생 조찬환, 양경우의 동생 양형우, 그리고 현곡과 이웃하고 있던 방원령과 중주원에서 섬진강을 건너 곡성으로 향하였다. 중주원은 지금의 남원시 금지면 귀석리 원마을에 있었고 이곳에는 순자진이라는 나루도 있었다. 현곡 일행은 곡성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구례로 향하는데, 섬진강과 협곡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곡성 압록에 이를 즈음 현곡은 그의 마음이 비춰지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강을 따라 30리를 가니 협곡의 좁은 길에 아슬아슬한 잔도가 매우 험난했다. 빠른 물살과 가파른 협곡은 단양(丹陽)의 영춘(永春)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사군(四郡)의 협곡만 일컫고 이 협곡이 있는 줄은 모른다. 어째서일까? 모르긴 해도 강과 산의 빼어난 경관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런가 보다.”(최석기 외 역, 지리산 유람록)
여기서 사군이라 함은 남한강 상류의 풍광이 아름다운 단양, 영춘, 제천, 청풍을 말한다. 곡성 섬진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서 느낀 소회를 ‘차귀거래사’에서 읊었던 자신의 처지와 오버랩 시키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022.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