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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섭 Jun 24. 2022

'장항동'이 어디메뇨?

산청 대원사는 장항동에 있었다 


▲대원사계곡 탐방로 들머리. 지리산국립공원 유평탐방지원센터를 거치지 않고 대원주차장에서 계곡 쪽으로 바로 길이 이어진다.


지리산 대원사(경남 산청군 삼장면) 앞에는 거대한 암반과 바위 사이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군데군데 옥빛의 소(沼)를 이루는 물길이 있다. 이른바 대원사계곡이다. 이 골짜기에 산청군과 지리산국립공원공단의 협업으로 조성된 ‘대원사계곡 생태탐방로’가 2018년 11월 15일 개통되었다. 이 길은 대원사에서 약 1km 위에 있는 유평마을과 대원사계곡의 들머리라 할 수 있는 대원주차장을 잇는 3.5km 구간으로, 목재데크와 자연 흙길로 조성되어 있어 누구나 편안하게 계곡 풍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본고는 이 길의 중심에 있는 대원사에 대한 역사와 이곳에 대한 옛사람들의 기록을 소개하며, 이 탐방로가 지리산 인문학 답사코스로도 활용되었으면 바람으로 2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내가 두류산의 동쪽 기슭을 유람하면서 장항동을 찾고자 하였으나, 산속의 노인들도 그곳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마음에 실망하고 대원암에 투숙하였다가, 그곳의 벽에 걸린 시들을 보고 비로소 이곳이 장항동임을 알았다. 대원암 앞에 장항치가 있는데, 장항동이란 이름은 아마도 이 때문에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대원암만 알고 장항동은 알지 못하니 이는 장항치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나는 선현이 향기를 남긴 곳이 없어져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 이에 기록한다.”  

   

위의 글은 19세기 중후반 지금의 하동 옥종면 월횡에 거주하며, 인근의 모한재를 중심으로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유학자 월촌(月村) 하달홍(1809~1877)이 쓴 「장항동기(獐項洞記)」의 내용이다. 글 말미의 선현(先賢)은 장항동을 거쳐 지리산 유람에 나섰던 성리학자 남명 조식과, 남명의 학맥을 이어받은 겸재 하홍도 두 분 선생을 일컬음이다. 겸재는 ‘유장항동(遊獐項洞)’이라는 이름의 시를 남겼다.     

 

장항이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노루의 목’으로, 그 모양처럼 길이 이어지는 곳에 있는 좁은 골짜기 상의 고개를 의미하며, 노루목이라는 우리말 이름과 더불어 전국 각처에 그 지명이 남아있다.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현재 대원사로 들어서는 입구인 지리산유평탐방지원센터에서 대원사 앞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대원교에 이르는 좁은 도로 상의 삼거리나 사거리로 교차되는 길이 있는 곳, 즉 고개를 장항치라 하였고, 고개를 넘어 길이 만나는 골짜기를 장항동이라 했던 것이다. 월촌의 바람처럼 그가 기록을 남긴 후 약 150여 년이 지난 이즈음, 필자도 잘 몰랐고 사람들에게 잊혀져있던 지리산 장항동의 이름을 세상에 다시 전하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


▲계곡 옆으로 이어지는 길은 도로 쪽으로 올라서며 이어진다. 이 곳 어디쯤인가가  ‘장항치’일 것이다. 


 한편 16~17세기 이곳을 다녀간 남명과 겸재는 대원암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으나, 17세기 후반부터 이 절집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가 각종 기록에서 발견된다. 현재 대원사의 절집 안내문에는 ‘548년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라 하였고, 폐사된 옛터에 1685년 운권스님이 절을 짓고 대원암이라 하였으며, 1890년 구봉스님이 낡은 건물을 중건하고 대원사로 불리게 되었다.’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원사 일주문. 현판에는 지리산이 아닌 방장산 대원사로 되어있다. 방장산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하나로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대원사 입구. 최근 절집 입구를 넓히며 새로 지어졌다.


▲대원사 전경


이는 대체로 조선후기 고승인 석실명안(石室明眼.1646∼1710)이 지은 「지리산 대원암기(智異山大源庵記)」의 내용을 따르고 있는데, 다만 석실명안은 ‘산의 동쪽 천왕봉 아래 옛 절터가 있는데 몇 백 년 전에 누가 처음 열었는지는 모른다.’라며 창건역사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회암(檜巖) 운권(雲捲)대사가 있는데 사상 구암스님의 법을 이은 분이다. 금상(숙종)께서 즉위하신 지 11년 기축년(1685년)에 여러 제자들을 이끌고 여기에 들어와 재물을 모으고 장인들을 불러들여 한해가 가기 전에 보전을 크게 일으켜 세우고 대원(大源)이라고 편액을 붙였는데, 대개 道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며 운권스님의 법호가 회암인 것을 밝히고 있다. 승려들의 법맥을 정리한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에 의하면, 운권스님은 17세기에 활동한 당대의 고승 백암성총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 석실명안과는 같은 스승을 둔 법형제가 된다.


1710년 석실명안이 산청 왕산사에 머물다가 입적하였을 때, 그의 제자들은 대사의 사리 2과를 수습하여 1과는 왕산사의 북쪽에 석종형 부도로, 다른 하나는 대원암의 남쪽 시냇물 위에 무덤을 만들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보아 석실명안과 대원암의 관계가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상루. 대원사 출입문 위에 있는 누각이다.


그리고 함양 벽송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고승 경암응윤(1743~1804)은 대원암이 중창된 지 1세기 후인 1787년에 「대원암기」를 쓰며, ‘대원암의 법당 이름은 천광전(天光殿)이고, 누각은 운영루(雲影樓)가 있다’라고 전각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현재 대원사의 주불전은 대웅전이고, 절집 출입문 위에 있는 누각의 이름은 봉상루(鳳翔樓)이다.[202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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