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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사(君子寺) 이야기①

지리산 함양 마천면의 절집

by 조용섭

〇군자사(君子寺) 이야기①


군자마을 -imsz-20210620_090236.jpg [지리산 함양 마천면 군자리 풍경. 이곳에 있던 큰 사찰 군자사는 19세기초 폐사되고 절 이름은 마을 이름으로 남았다.]


군자사는 조선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조선후기에 발간된 대부분의 인문지리서에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1832년에 간행된 『함양군읍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나, 기사 말미에 ‘금무(今無)’ 즉 ‘지금은 없다’라고 표기하고 있어, 적어도 이 해 이전에 폐사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듯 군자사는 19세기 초반 폐사되었고, 이 즈음 절터에 마을이 들어서며 군자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군자사는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467번지를 비롯한 일대에 있었다.


또한 군자사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싶어 하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산 북쪽 산자락의 함양이나 남원을 거쳐 천왕봉 등정에 나선 사대부들은 대부분 이곳에 들렀던 곳이다. 말하자면 군자사는 조선시대의 ‘지리산 유람 전진기지’ 같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군자사는 유람객들에게 숙식 등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절집에 들렀던 사대부들이 남긴 ‘지리산 유람록’에는 군자사의 시대별 모습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어, 절집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지리산 함양 마천면의 중요한 역사공간이었고, 지금은 마을 이름으로 남아 그 흔적을 전하고 있는 군자사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여 왔는지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 불우佛宇’조에는 다음과 같이 군자사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군자사 지리산에 있다. 전설(俗傳)에, ‘신라 진평왕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신증』 유호인의 시에, ‘10년 동안 떠들 적에 내 어이 견디었던가. 구름 산에 자취 감추고 한바탕 꿈 달게 여기자. 지는 해에 번쩍이는 놀 취점(鷲岾)에 비꼈고, 긴 바람은 비를 몰아 용담(龍潭)에 지난다.”


참고로 위의 글에서 ‘취점’은 벽소령의 옛 이름으로 추정되며, ‘용담’은 지금의 용유담을 일컫는다.


그리고 함양 선비 정수민(1577~1658)이 1656년에 편찬한 『천령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진평왕 관련 속전’ 외에, 유호인(1445~1494)의 군자사 관련 시詩 15수를 추가로 수록하고 있다. 이후에 편찬된 인문지리서 대부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함양군 관내의 사근역 찰방으로 재임 중이던 이덕무(1741-1793)는 1783년 군자사를 방문하였을 때, 그곳에 걸려있던 사적기(寺跡記)의 내용을 그의 문집인 『청장관 전서』에 다음과 같이 옮겨 남기고 있다.


“군자사/1783년(정조7)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와 함께 두류산 구경을 가서 군자사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天嶺 함양의 옛이름)의 남쪽 50여 리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아래 큰 시냇가에 이 절이 있다. 578년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여기에서 태자를 낳았고 환도하여서는 이곳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한 것이다. 그 후로 거듭 난리를 만나 흥폐를 거듭하다가 1198년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이 산 위에 있는 무주암에 와 머물면서 내관(內觀)에 정진하였다.


얼마 후 그가 승평선사로 돌아가며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이 절터를 보고 절을 지으려다가 유감스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제자인 진각국사에게 명하기를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그곳에 가서 절을 지으라.’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그 영수(領袖)로 하여금 먼저 불당을 새로 짓고, 점차로 승사(僧舍)를 완성하게 한 다음, 대중에게 고하기를 ‘절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가 감히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그의 문제(門弟)인 신담(信談)을 시켜 이곳을 주관하게 하고, 금대암에 물러가 있다가 다시 단속사로 옮겨갔다.


그 후 세상이 많이 바뀌면서 이 절은 또다시 흥폐를 거듭하다가 1317년 혜통화상(慧通和尙)이 이 절에 와서 절을 크게 수리하고 증축하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도이(島夷-일본)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 절 또한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1404년 천태종의 영수(領袖) 행호 대선사가 새로 크게 확장하므로 옛 규모보다 더 커져서 상실(像室)과 경대(經臺) 등 모두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680년 청신사(淸信士) 순일 운석(淳一韻釋)이 옛 누(樓)를 고쳐 새롭게 하고, 신관도인(信寬道人)이 기와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단청은 올리지 못했다가 1684년 봄에 통정(通政) 태감법사(太鑑法師)가 유악((幼堊)을 칠하였다.

-1684년에 방호의 필추(苾芻-비구比丘) 형곡복환(荊谷復還) 쓰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중략)…이 절은 현재 퇴폐(頹廢)하여 단지 비구승(比丘僧) 10여 명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이덕무는 1684년 형곡복환이라는 승려가 지은 사적기를 옮겨 적고, 신라역사에 근거한 창건유래 비평, 그리고 퇴락한 절에 10여 명의 승려가 머물고 있다는 당시의 절집 상황을 전하고 있다. 또한 사적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진평왕 관련 전설 외에,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며 절집을 중창한 내력과 관련된 승려들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군자사를 포함한 마천면 불교의 역사적 변천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문지리서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신라 진평왕 관련 전설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과는 달리, 이덕무는 진평왕은 후사(태자)가 없었고, 딸인 선덕여왕이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전설의 내용에 비평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군자사 사적기’의 원문은 전해 지지 않는다. (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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