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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사(君子寺) 이야기②

지리산 함양 마천면의 절집

by 조용섭

-앞 편에서 계속


[『청장관전서』69권 '한죽당섭필 하' '군자사' ⓒ한국고전번역원]


‘군자사 사적기’에 언급된 고려시대 수선사(송광사) 사주(社主)를 지낸 보조국사와 진감국사의 ‘군자사 중창’ 관련 내용에 대해 확인할 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역사적 사건과 시기를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전기 행호대사가 1404년에 군자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은 다른 문헌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행호대사가 세종 즉위 직후인 1418년경 천판태종사를 사임하고 지리산(안국사)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보다 약 15년 이상 앞당긴 시기에 지리산 마천면과 인연을 맺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고려와 조선전기의 고승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주로 머물렀던 상무주암, 금대암, 안국사 편 본고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이덕무가 옮긴 ‘군자사 사적’에 나오지 않는 임진왜란 발발 전인 16세기 군자사의 모습은 1586년 양대박(1543~1592)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두류산기행록」에서 잘 드러난다. 남원 출신 양대박은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고, 임진왜란 발발 초기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인물이다.


“1586년 9월 4일. 날이 저물어 군자사로 들어갔다. 이 절은 두류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지만 길이 넓고 평탄하여 힘들게 부여잡고 오르지 않아도 되었다. …(중략)… 두 노승이 문 밖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음산한 행랑채는 반쯤 무너졌고, 불전은 적막하여 예전의 군자사가 전혀 아니었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승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유람객들이 연이어 찾아오고 관청의 부역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중들이 어찌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절이 어찌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관청에서 시키는 부역을 헤아리며 그 까닭을 낱낱이 말하였다. 오춘간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 일이 괴로운가? 내가 수령에게 고하여 그대들의 부역을 줄여주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수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 가혹한 정치의 폐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산 속에서 걸식하는 승려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에 시달리니, 살을 깎는 듯한 고통은 금수(禽獸)라도 면치 못할 것이다. 한참을 탄식한 후 법당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원통전(圓通殿)에서 불을 밝히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이렇듯 밀려드는 유람객들을 감당해야 하는 군자사의 유람 노역이 절집 유지가 힘들 정도로 어려운 일임을 하소연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신분이 높은 유람객이 방문했을 때는 이들에게 부역면제 등의 청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종전 이후 17세기에는 군자사와 관련된 기사가 여러 문헌기록에서 발견된다. 1601년~1604년까지 함양군수를 지냈던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은 '군자사 미나리밭에는 개구리가 없다'(君子寺芹田自古無蛙)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문집인 『태촌집』에 남기고 있다.

“군자사는 함성(含城. 함양) 치소의 남쪽에 있다. 즉 두류산의 서북쪽 산자락이다. 절 아래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는 미나리밭이 있는데,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 광물의 이름으로 추정)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옳고 그른지는 모르겠으니,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영가(永嘉. 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다는 것이나, 상주 사불산에 칡이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이와 같이 고상안은 처음으로 군자사에 있던 신비한 우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연관성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17세기에 쓰인 지리산 유람록에는 군자사가 옛 영정사(靈井寺)였다‘라는 내용의 글이 다수 등장한다. 심지어는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군자사라는 이름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다음은 영정사라는 이름이 나오는 17세기 지리산 유람록을 정리한 것이다.

ⓐ1610년 박여량/군자사는 옛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1611년 유몽인/저물녘에 군자사로 들어가 묵었다. (중략)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로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무슨 뜻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1643년 박장원/저녁 때 군자사에 이르렀다. 이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는데,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1680년 윤 8월 송광연/다시 20리를 가서 군자사에 이르렀다. 함양군수 윤천이 두 명의 악공 및 안주와 술을 보내왔다. 절 앞에는 옛날 신령스런 우물(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는데, 뒤에 군자사로 개칭하였다. 무엇을 근거해 군자사로 이름을 바꾸었는지 모르겠다.

맨 위의 ⓐ의 글을 쓴 박여량은 함양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에도 참여했던 지식인인데, 군자사의 예전 이름이 영정사(靈淨寺)라고 처음 언급하였다. 그 아래에 인용된 글 모두가 영정(靈井)이라고 쓰는 반면에 박여량은 영정(靈淨)이라 한 것은 다르지만, 아무튼 고상안의 신비로운 우물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위에서 인용한 지리산 유람록에는 17세기 초중반의 군자사 모습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또 이덕무가 옮긴 ‘군자사 사적’ 내용에는 17세기 후반에 있었던 절집의 보수불사 과정과 불사를 이끈 승려 이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1610년 9월 3일. 박여량(1554~1611) 「두류산일록」

“군자사 앞에 있는 시내는 험악하여 말을 타고 건너기에는 넘어질까 염려스러웠다. 산골 백성 중에 건장한 자들을 불러다 업고 건너게 하여, 먼저 절 앞의 누각에 올랐다. …(중략)…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과 선당(禪堂), 남쪽 누각뿐이다.”


위의 글은 임진왜란 종전 후 불과 10여 년이 지난 시기에 쓰인 것인데, 비록 대대적인 중창은 아니지만, 빠르게 복구되어가는 절집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박여량은 다음날 군자사를 출발하여 천왕봉으로 향하던 중, 주능선에서 산자락 아래를 내려다보며 ‘직령(直領. 곧은재) 서쪽에 있는 절은 도솔암이고,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印悟)가 지어살고 있는 곳이다.’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인오는 법명이고 법호가 청매인 청매인오대사에 대하여는 본 면지의 도솔암 편에서 상세히 기술하였다.

그리고 박여량이 다녀간 후 30여 년이 지난 뒤에 군자사에 들른 안의현감 박장원(1612~1671)은 중창불사가 이루어진 절집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643년 8월 21일 박장원 「유두류산기」

“절의 법당과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절의 서쪽 구석에 화려한 단청 칠을 한 새로 지은 별전이 있는데, 삼영당(三影堂)이라고 했다. 삼영당 안에는 청허·사명·청매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 촛불을 들어 비춰보니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세 대사의 초상화 중 사명대사는 수염을 깎지 않았다.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으니 참으로 잘 생긴 장부였다.”

박장원은 이렇듯 제대로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선 군자사의 모습을 전하면서, 세 대사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새롭게 지어진 삼영당이라는 건물을 언급하고 있다. 청매인오(1548~1623)의 스승인 서산대사 청허는 조선불교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상징적인 인물이고, 청매의 동문 법형인 사명대사 역시 의병활동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사대부들도 존모하는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앞의 박여량의 글에서 언급하였듯 청매대사는 1610년에 도솔암으로 와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1623년 영원암에서 입적하였다. 그리고 18세기말 즈음 벽송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고승 경암응윤이 지은 「영원암 설회사적기」에는 “만력 연간에 부용·청허·청매 세 조사가 서로 이어서 주석하고 득도하여, 영원이라는 이름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방장실에 삼영전(三影殿)이라는 편액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라며 청매대사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기록으로 보아, 군자사 삼영당은 청매대사의 문도들이 조성한 것이 확실하다.

또한 1611년 봄 지리산 유람에 나선 남원부사 유몽인은 추성리 어름터 인근에 있었던 두류암의 선방에서 혜일이라는 승려를 만나 그에게 시를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혜일은 법호가 호감으로 『불조원류』에 청매대사의 제자로 나오는 승려이다. 즉 1610년 도솔암으로 와서 수행하던 청매대사는 이렇듯 영원암, 군자사, 두류암 등 지리산 마천면의 절집을 중심으로 수행하며 제자들을 길렀던 것이다. 조선전기 행호대사가 그러하듯, 청매대사 역시 지리산 마천면과 큰 인연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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